[희곡] 웃음가스 (2)

by 곡도




복지가 마음껏 즐기십시오, 여러분. 좋은 시간을 가지세요. 여러분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지요.


모두들 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복지가 (관객들을 가리키며)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밖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잊지는 않으셨겠죠? 그들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완벽해질 수 없을 겁니다. 우리의 마음 한 구석도 늘 불편할 거예요.


모두들 시큰둥하다.


복지가 그들은 하루 종일 말라빠진 빵 한 조각 밖에는 먹지 못한답니다.


모두들 시큰둥하다.


복지가 버터도 없이요.


모두들 소스라친다.


모두들 그럴 수가.


과학자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까? 집집마다 전깃불이 환하게 빛나는 시대에요?


복지가 아직 집집마다 전깃불이 환하게 빛나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요. (관객들을 가리키며) 불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뒷골목의 어두운 틈새에는 창백하고 누추한 사람들이 가득하죠.


사업가 다 놀고먹으려는 게으름뱅이들이겠지.


복지가 아니,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12시간씩 일해요. 종종 그 보다 더 일하기도 합니다.


여배우 그런데 왜 버터 살 돈이 없는 거죠?


교수 버터를 살 돈은 있습니다. 다만 버터를 사고 나면 빵을 살 돈이 없을 뿐이죠.


평론가 아니, 그렇다면 차라리 빵 없이 버터만 먹는 게 낫겠어요. 어떻게 버터 없이 빵을 먹는단 말입니까?


시인 맞아요. 그건 비인간적인 짓입니다. 폭력이에요. 고문이죠.


사업가 분명 그 고문은 굉장히 효과적일 겁니다. 일주일만 맨 빵을 먹여도 난 내 금고 번호를 다 불어버리고 말테니까요.


과학자 일주일이라구요? 인내심이 대단하시군요. 전 3일도 못 버틸 겁니다.


평론가 아, 그렇다면 버터 없이 빵을 먹는 걸 불법으로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모두들 맞아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요.


시장 여러분,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가난’을 불법으로 만들어야 해요.


모두들 감탄한다.


복지가 에이, 그건 너무 심한데요. 가난이 그 사람들 잘못도 아니잖습니까.


과학자 아니죠.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위생의 문제니까요. 공동체 전체의 건강과 생존을 위해 썩은 부위는 도려내야해요.


사업가 훌륭한 생각입니다. 개혁적이고 현대적인 생각이에요. 가난한 인간들을 싹 감옥으로 보내버립시다. 그럼 그 구질구질한 가난도 마침내 구제되겠지요.


시장 연료가 없으면 불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을 테니까요.


시인 아니, 잠시 만요. 가난뱅이들이 연료이고 가난이 불이라구요? 오히려 반대로 가난이 연료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불이 아닙니까?


교수 좋은 지적입니다. 가난을 먹고 타오르는 불. 자칫하면 그들이 모든 걸 삼켜 버릴 거예요.


평론가 그렇다면 더더욱 감옥에 넣어야겠는데요.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요.


여배우 그 사람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그들은 때때로 너무 자학적이거든요.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봐요. 착각일 뿐이지만요.

시장 그래요. 감옥 안에서는 그들도 안전할 겁니다. 더구나 감옥에서는 일요일마다 버터 바른 빵이 나오죠.


과학자 아니, 정말인가요? 그럼 그들은 지금 당장 감옥으로 뛰어들지 않고 뭘 하고 있답니까?


교수 조심하세요. 그들이 버터 맛을 알게 되면 술에 취한 것처럼 거칠어질 테니까.


시인 반대로 우리는 맨 빵의 맛을 알게 되면 술에 취한 것처럼 무기력해 지죠.


평론가 그래서 우리가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먹는 겁니다. 빵 맛을 느끼지 않으려구요.


사업가 하지만 언제나 그 빵 껍질의 쓴맛이 혀끝에 남아있거든. 그래서 자꾸 침을 뱉게 된단 말이야. (바닥에 침을 뱉는다.)


여배우 여러분, 제가 고백 하나 할까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얼마 전에 저는 버터 없이 빵을 먹었답니다. 그것도 무려 흑빵이었지요.


모두들 (놀라며) 흑빵을요? 버터도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여배우 연극에서 굶주린 고아 소녀 역을 맡았었거든요. 얼어 죽은 거지 할머니의 주머니 속에 있는 흑빵 조각을 훔쳐 먹는 장면이었어요. 누군가 내게 진짜 흑빵을 가져다 줬는데, 세상에, 그건 빵이 아니라 꼭 뭉쳐놓은 마른 이끼 덩어리 같더라구요. 이빨이 부러질 것처럼 딱딱하다가 막상 입안에 들어가면 모래알처럼 부스러지죠. 맛도 꼭 진흙덩어리 같구요. 전 그만 구역질을 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연극은 계속돼야 하잖아요?


시인 이야, 그래서 공연하는 내내 그 빵을 먹었나요?


여배우 아뇨, 대본을 고쳤어요. (작위적으로 연기를 해보이며) 소녀는 얼어 죽은 거지 할머니의 주머니 속에서 ‘버터 바른 크루아상’을 꺼내어 먹는다.


평론가 저도 그 연극을 봤습니다. 연극은 성공적이었어요.


여배우 맞아요. 빵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교수 그거야 버터 값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연극 표값도 없었을 테니까요.


여배우 저런. 버터도, 연극도, 고상한 대화도 없다니, 대체 그 사람들은 왜 살고 있는 거죠?


과학자 그런 삶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고 미시적인 삶을 위해서라면 굳이 인간일 필요가 없어요.


시장 (관객들을 가리키며)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염치도 희망도 없는 실패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요.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거예요. 이미 늦어버린 거죠.


시인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다른 삶을 살기에는 언제나,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지요. 그래서 그냥 이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신의 진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근사하게 포장할까 근심하면서요.


사업가 우리에게는 들려줄 진-부한 이야기라도 있지요. 성공담은 언제나 귀담아 들을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누가 패배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저 구질구질한 신세한탄일 뿐인데요.


복지가 말씀하신대로 불행은 이야깃거리가 아니죠.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연민을 가져야 해요.


평론가 맞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 우리들의 이야기에 광택을 더해주죠.


교수 온기가 아니구요?


과학자 이 세상에 온기 있는 이야기는 없어요. 온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죠. 알고 보면 과학이론들보다 더 냉담한 게 ‘이야기’에요. 재능과 속임수로 그 냉담함을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여배우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잖아요? 그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과학자 아, 공감. 또 다른 냉담함이죠.


여배우 공감이 냉담함이라구요? 말도 안돼요. 단어의 뜻도 모르시나요? 오히려 이 둘은 반대말에 가까워요.


시인 자아, 진정하세요. 제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공감이란 이런 겁니다. (여배우를 마주보며) 우리는 서로의 거울인 거예요. 내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주죠.


여배우 내 말이 바로 그거에요.


시인 하지만 거울에는 온기가 없지요.


여배우 네? 아니, 하지만…….


복지가 자아, 자, 여러분. 온도계 같은 건 치워버리세요.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중요한 건 우리에게는 행복만큼이나 불행에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사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었다고 할지라두요. 언젠가는 가난도 사라질 겁니다. 그렇고 말구요. 인류는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이 모든 여정의 끝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인류의 발전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게 될 리가 없지요. 시간문제예요. 하지만 그 전에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태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모금함을 앞으로 내밀며) 여러분, 우리가 남들이 예상하는 것만큼 무관심하지는 않다는 걸,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지극히 공평하다는 걸 증명할 기회입니다. 수줍어하지 말고 여러분의 선한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비심의 무게를 재게 해주세요. 물론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는 걸 저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그래요. 우리는 무관심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공평해요. 우리의 선한 마음을 보여줍시다.


복지가 감사합니다. 역시 여러분은 훌륭한 분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 해요. (샴페인 잔을 높이 들며) 다시 한 번 건배합시다. 여러분의 우정과 건강, 그리고 베푼 만큼 다시 여러분께 돌아올 더 큰 번영을 위하여, 건배.


모두들 왁자지껄하게 건배한다.


복지가 자아, 그럼 누가 먼저 시작 하시겠습니까?


시장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제가 먼저 말씀 올리겠습니다. 기부에 앞서서 우선 제가 사과부터 드려야 될 것 같군요. 우리 주변에 여전히 빈곤과 소외, 불운이 남아있다는 건 저희 같은 정치인들의 부덕의 소치니까요. 저 역시 그 책임을 가슴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옛말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치 스스로 불행하길 진심으로 원하는 것처럼 영 가망이 없기도 하지만, 오늘날 정치인들에게는 무한책임이라는 도덕적 사명이 있지요. (관객들을 가리키며) 부랑자가 구걸을 하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도 정치인들을 욕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자기도 어엿한 유권자의 한사람이라 이거죠. 자신의 한 표가 다른 성실한 시민들의 한 표보다 0.00001g도 가볍거나 무겁지 않다고 큰 소리를 친다니까요.


시인 바야흐로 계몽의 시대니까요.


사업가 무슨 소리. 정말 계몽이 되었다면 여태 가난할 리 없지.


시장 네, 아시다시피 이제 정치는 그런 비천하고 불행한 인간들에게 아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참 난감한 일이죠.


교수 어쨌거나 그 부랑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잖습니까. 지금은 모두가 평등합니다. 0.00001g도 가볍거나 무겁지 않아요.


평론가 뭐, 이론적으로는 그렇죠. 그 남자가 유색인종만 아니라면요.


여배우 세상에. 이제는 여자도 투표권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남자와 평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깜둥이보다 우월하기 때문이죠.


과학자 (여배우에게) 실례지만 그건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뇌의 크기와 무게를 정밀하게 재봐야 해요. 객관적인 수치가 필요합니다.


교수 단언컨대 그건 정치인들이 필사적으로 막을 겁니다. 부엌데기 흑인 하녀의 뇌가 자신들의 것보다 더 크고 무겁다는 걸 들켰다가는 큰일이니까요.


시인 그거야 굳이 뇌를 재어볼 필요까지 있나요? 정치인들의 머리가 보통사람보다 작다는 건 모자쟁이에게만 물어봐도 알 수 있을 텐데요.


사업가 유곽의 창녀들에게 물어봐도 될 거예요. 그 치마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게 정치인들의 중요한 공무니까요.


여배우 과연 창녀들의 치마 속만 일까요? (웃음)


과학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그건 비과학적입니다. 과학은 그런 간접적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간단하게 머리를 열어서 무게를 재어보도록 하죠. 물론 정치인들의 머릿속에서 그 작은 뇌를 찾아내려면 고생 좀 하겠지만 말입니다.


모두 웃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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