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웃음가스 (3)

by 곡도



시장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걱정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온갖 문제로 제게 시비를 걸고, 함부로 저의 진정성을 폄하하고, 뭐 뻔뻔하게 저를 우스갯거리로 만들기도 하지만, 익숙한 일이니까요. 이게 정치인의 숙명이죠. 아니, 정치 자체의 숙명이기도 해요.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뒷사람들에게 엉덩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평론가 그래요. 우리는 너무 많은 엉덩이들을 봐왔습니다. 얼굴이 아니라요.


사업가 어쩌면 우리가 엉덩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들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르지.


모두 웃는다.


시장 괜찮습니다. 전 괜찮아요. 마음껏 조롱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지독한 말 속에 실은 무한한 애정이 숨어있다는 걸 전 알고 있으니까요. 무한한 애정 말입니다. 그저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을 뿐이죠. 정말이지 요즘처럼 모든 것이 다수결과, 협상과, 계약과, 배신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정치인들이야 말로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치인들이 나태하고 무기력하지는 않아요.


평론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국민들이 나태하고 무기력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죠?


시장 아니,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태하고 무기력합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여러분은 짐작도 못할 거예요.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니까요. 저 같은 정치인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결해줘야 하지요.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토록 정치인들에게 무례한 거죠. 부모에게 애정만큼이나 증오가 깊은 것 처럼요. 하긴 이 세상에 부모의 노고를 알아주는 자식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배은망덕이야 말로 자식의 숙명이에요. 끝없이 인내하는 게 부모의 숙명인 것 처럼요. 정치인의 사명도 바로 그런 부모의 숙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초인적인 인내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아니, 꼭 온 세상이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작당이라도 했다는 듯이 군다니까요. 대체 본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구요. 그들은 가난과 무지와 무능을 오히려 무기처럼 휘두릅니다. 개인적인 불행을 사회 탓으로 돌리고 무력감을 앞세워 사람들을 협박하는 걸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들은 그걸 정의라고 부릅니다. (갑자기 관객들을 향해 분노하며) 씨팔, 그 놈의 민주주의 타령. (정신을 차리며) 아, 물론, 하지만, 그래요, 부모는, 못난 자식일수록, 밥 한 술 더 떠먹인다는 심정으로, 더욱 살뜰히 보살펴야 합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구요. 자식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면 부모는 저절로 배가 불러지는 법이니까요. 그게 바로 제 마음입니다. 제 진심이에요. 여러분, 다음 선거에서도 저의 이 말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장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인사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시장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교수 (앞으로 나서며) 시장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만약 시장님께서 제 수업의 학생이었다면 전 분명 낙제 점수를 줘야했을 겁니다. 아직도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시장 구시대적이라구요? 제가요?


교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걸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하고 있잖습니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번지르르한 자선인 것처럼요. 그게 아니죠. 그들이 가난하고 불행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의 가난과 불행을 그들에게 떠넘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유하고 행복한 것도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이기적이고 냉담하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을 돕는 건 바로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마땅히 그 사람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는 거지요. 우리들은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들은 더 많은 걸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아니, 모든 걸 요구할 권리가 있죠.


시장 (웃으며) 아하, 이제 보니 존경하는 교수님께서는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신흥 종교의 추종자가 되신 모양이군요. 자유와 의지를 가진 인간을 물질의 잉여물 따위로 전락시키는 그 종교 말입니다. 유물주의를 증오하는 가장 유물주의적인 종교요, 계급을 거부하는 가장 계급주의적인 종교이고, 엘리트를 고발하는 가장 엘리트주의적인 종교더군요. 결국 자기부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겁니다.


교수 나는 운명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시장 아니, 제가 듣기론 오히려 그 반대던데요. 그 종교는 ‘유전유죄 무전무죄’라고 가르친다죠? 그게 운명이 아니고 뭡니까?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 큰 죄인이고,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갖고 있는 셈이라던데요. 카인, 도적떼, 수전노, 노예상인, 샤일록, 부르주아, 흡혈귀라는 주홍글씨. 개인의 덕성과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교수 아니요. 이거야 말로 덕성의 근원에 관한 얘기입니다. 착취야 말로 도덕보다 더 오래된 얘기니까요.


평론가 하하, 착취. 그래요. 그 말은 곧 대단한 유행어가 될 겁니다.


교수 나는 오히려 유행에 저항하려는 겁니다.


시장 네, 네. 교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제 주변에도 포교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요. 안타깝게도 제 자식 놈도 그 중 한 명이지요. 그 놈은 제 아들인 걸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 애비를 부끄럽게 여겨요. 단지 제가 좋은 가문 출신이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대다, 부자에, 다소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단편적인 이유 때문이지요. 도대체가 공평하지를 않아요. 사람의 삶에는 다채로운 층위가 있고, 내게도 결핍과 실망, 고뇌가 있다는 걸 알아주려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가난하고, 무능하고, 무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자도, 권력가도, 지식인들도 고통 받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걸 모른 체하려 든다니까요.


복지가 실례지만, 그 둘의 고통이 같지는 않지요.


시장 물론 고통에도 수준 차이라는 게 있다는 건 압니다.


교수 바로 수준 차이에 고통이 있는 게 아니구요?


시장 교수님, 우리 좀 더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눌 순 없나요? 아시다시피, 인간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결국 정의롭게 되지도 않을 거구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단 말입니다.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겸손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아요.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 철학적, 정치적, 심지어 생물학적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수님의 종교는 잔인해질 겁니다. 그 믿음은 비인간적이거든요.


교수 ‘어른스럽다’라는 게 한계도, 양심도, 염치도 없는 건가요? 그거야 말로 어린애 같군요. 그거야 말로 비인간적입니다. 그거야 말로 야만이에요.


시장 하, 야만이라구요?


교수 야만이고 말구.


시장 그건 모욕입니다.


여배우 어머나, 하지만 난 ‘야만’적인 게 좋던데. ‘야만’은 섹시해요. 그게 백인보다 흑인이 더 섹시한 이유죠. 그래서 흑인들은 교육을 시키면 안 되는 거예요. 불감증에 걸린 문명인들은 이미 충분히 많으니까요.


시인 그래요. ‘야만’은 제 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모험과 향수를 자극하죠. 원초적인 힘이 느껴져요. 지지부진한 타협 따위는 없는 진정한 힘, 비민주적인 힘 말입니다. 우린 그런 게 필요해요.


사업가 하하, 다들 현학적이시군요. 하지만 지금은 학자와 예술가의 시대가 아니라 군인과 사업가의 시대입니다. ‘야만’이란 결국 ‘자원’이란 뜻일 뿐이에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주인이 없는 자원이죠.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에요.


평론가 좋은 지적이군요. 하지만 중요한 건 ‘자원’이 아니라 바로 그 ‘아직’입니다. 거기에 모든 매력과 잠재력이 들어있지요.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아직’이란 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모든 게 이미 지나치게 많이 이루어졌거든요. 그래서 문명은 언제나 ‘야만’을 질투해왔습니다. 마치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걸 누리고 있다는 듯이요.


복지가 (한숨을 쉬며) 어쨌거나 ‘야만’에는 죄의식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최소한 덜 하겠죠. 그럼 그게 바로 낙원이 아니고 뭐겠어요. 모든 미신들이 하나씩 타파되고 세상은 더 합리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죄의식이 남아있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점점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느끼는데, 어째서 죄의식은 점점 더 깊어지는 걸까요?


평론가 정말로 우리가 모든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죠. 그 사실을 그냥 인정해 버리세요. 그럼 우리는 죄의식에서도 자유로워질 겁니다. 아니,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거예요. 심지어 역사에서두요. 이제는 역사도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거든요.


과학자 그래요. 우리는 각자가 가장 높은 곳에 있지요. 내려다 볼 곳은 있어도 더 이상 올려다 볼 곳은 없어요. 지금은 과학만이 유일하게 공적인 영역입니다.


교수 세상에,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은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있기나 한건가요? 여러분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해 버렸군요. 그래요. 핸들이 고장 난 기차에서 차라리 브레이크를 놓아버리면 마음이 편하죠. 어차피 모든 게 멸망해 버린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즐거워집니다. 그 어떤 짓을 해도 다 운명이라고 믿게 되고, 자살하는 사람에게는 동정이나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질투심 때문에 조롱을 퍼붓죠. 시장님, 제가 꿈꾸는 천국이 비인간적이라고 하셨나요? 그렇다면 당신들이 꿈꾸는 건 지극히 인간적인 지옥일 겁니다.


시장 죄송하지만 정치인은 꿈같은 건 꾸지 않습니다. 언제나 숙면을 취하죠. 하지만 굳이 고르라면 천국보다는 지옥이 제가 일하기에는 훨씬 더 편할 겁니다.


교수 아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사업가 나 참, 그만들 좀 하세요. 고급이니 저급이니, 종교니 이념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어쩌고저쩌고……. 그게 뭐든 간에 저에게는 다 한가한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그런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하고 있는 사이에 그만 빈털터리로 늙어버리고 말겁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돈을 좀 챙겨야 하는 시절이 아닙니까?


평론가 맞는 말입니다. 신이 보편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이제 돈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거든요. 국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돈을 통해서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마침내 우리가 서로를 진짜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혈통을 발견한 거예요. 진정한 인류애가 가능해진 겁니다.


시인 일리가 있어요. 이제 우리는 신의 저주로 바벨탑에서 언어가 갈라졌던 그 시절 이전으로 돌아간 겁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다시 한 가지 언어로 말하게 된 거예요. 이제 다시는 그 무엇도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지 못할 겁니다. 신 마저도요. (장난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왜냐하면 신은 죽었으니까요.

모두들 웅성거린다.


여배우 (과장된 비극을 연기하듯이) 네, 저도 얼마 전에 그 소식을 들었어요. 깜짝 놀랐답니다. 그 분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지만요. 한 때는 참 정정한 분이었는데. 그렇게 어리광이 심하더니 임종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이었다죠. 혹시 어떻게 죽었는지 들으셨어요?


모두들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소리죽여 웃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쏘는 시늉을 한다.


교수 자, 고루한 농담은 그만합시다. 난 지금 신 같은 아첨장이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에 대해 얘기하려는 겁니다.


복지가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요? 그게 누구죠?


교수 바로 민중이죠.


시장 아하, 그래요. 민중. ‘착취’만큼이나 널리 퍼진 유행어죠. 새로운 우상숭배.


사업가 나도 민중에 대해서는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민중이 누구죠?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디에 있는데요? (무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이런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요? (관객들을 가리키며) 저기 저 거리를 돌아다니는 저런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까? 난 그들을 골목에서, 시장에서, 공원에서 매일 마주치지만 진짜 민중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시인 뭐든지 이름이 먼저 생기고 난 뒤에 실체가 안에 담기는 법이죠. 일단 민중이란 이름이 생겼으니 민중은 존재해야 합니다.


과학자 글쎄요. 그들은 그저 제각각의 불만을 떠들어대는 제각각의 사람들일 뿐이에요.


여배우 뭐, 불만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것이죠.


시장 불만이 바로 민중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불만을 얕보면 안 돼요.


교수 불만은 불안이 되지요.


복지가 그 둘이 무슨 차이가 있죠?


시인 뉘앙스의 차이죠. 하지만 뉘앙스야말로 단어의 본질이거든요.


평론가 민중들은 야수와 같아요. 도무지 길들여지지를 않아요. 문명이 가지고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야만이죠. 아시겠습니까? 교수님은 우리에게 야만적이라고 하지만 교수님이 떠받드는 민중들이야말로 훨씬 더 야만적입니다.


여배우 ‘야만’은 섹시해요. 그들은 돌덩이처럼 뜨겁고, 날생선처럼 비려요.


복지가 그들은 어디에나 있지요. 모든 곳에요.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요.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요.


과학자 그러니까 민중이 상수냐 변수냐의 문제겠군요.


사업가 그들은 성가신 질문입니다. 대답을 원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끝없는 질문.


시인 다 틀렸습니다. 민중은 나선형의 불길이에요. 회오리처럼 허공을 돌아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죠. 적절한 바람만 불어준다면요.


교수 이미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있어요.


시장 자 자, 진정들 하세요. 우리끼리 백날 떠들어 보았자 결론이 나질 않아요. 그러지 말고 (무명을 가리키며) 이 사람에게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서 유일하게 민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속삭이며) 말하자면 평균 이하에 가깝다는 말이에요. (무명에게 큰소리로) 거기, 우리 유권자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명 (당황하며) 네? 저....저요?... 저 말인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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