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그래요. 당신 의견이 듣고 싶군요. (관객들을 가리키며) 당신이 저 민중들의 대표인셈치고 말입니다.
무명 아...아니, 대표라니... 글쎄요, 제가.... 저는..... 미..민중이 뭔지 잘…….
사업가 어려울 게 뭐요?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잖아.
무명 저... 자신에 대해서요? 그..글쎄요... 저는... 그러니까... 저 자신에 대해서는…….
여배우 뭐지? 말더듬이인가?
과학자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야.
무명 저는..... 말하자면..... 그게…….
시인 어디가 모자란 모양이구만.
교수 (화를 내며) 여러분, 이런 자가 민중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평론가 그럼 누가 민중을 대표하죠?
교수 누구든 이 자보다는 나은 사람이어야죠.
무명 저는..... 그게..... 그러니까…….
여배우 여전히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네.
무명 저.... 저에게는.... 이야기가..... 그러니까.....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모두 동요하며) 이야기?
시인 이야기가 없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복지가 불행한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이야기가 있는 법인데.
여배우 세상에. 이야기가 없는 삶이라니, 끔찍할 거예요.
시인 이야기가 없다는 건 영혼이 없다는 겁니다.
평론가 이건 영혼 이전의 문제입니다. 존재 이유도 동력도 없는 거예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과학자 과학적으로도 그건 사실입니다. 심지어 원자들도 이야기를 찾아 우주를 떠돌아다니거든요.
시장 우주에도 이야기가 있나요?
과학자 빛이야 말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죠.
사업가 그럼 (무명을 가리키며) 이 남자/여자는 지금 홀로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는 셈이구만.
교수 (관객들을 향해) 네, 맞아요. 바로 그게 민중입니다. 어둠 속에 방치되어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땅 속 깊은 곳으로 뻗어있는 뿌리처럼 그들이 바로 우리 모두의 근본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뿌리가 병 들면 화려했던 꽃들도 시들고 무성했던 이파리들도 떨어지고 말지요. 그걸 모른다면, 아니, 모른 척 한다면 그거야말로 천하의 배은망덕이에요. (시장을 향해) 당신이 그들의 부모라고? 헛소리. 그들이 바로 당신의 부모요. 배은망덕한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란 말이야. 분명히 말하건 데 이건 그들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지극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교수가 품속에서 폭이 좁고 긴 봉투를 꺼내 모금함에 넣는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교수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복지가 자자, 우리끼리 싸우지 맙시다. 싸울 필요 없어요. (무명 주위를 돌며) 우리는 모두 민중을 사랑합니다.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죠. 민중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들을 더욱 얕보게 되는 자기모순을 우리는 침묵 속에서 견뎌야만 합니다. 가증스럽지만 그게 우리의 숙명이에요.
평론가 너무 걱정 마세요.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는 유행도 언젠가는 지나갈 테니까요. 그 때까지는 우리도 좀 더 뻐길 수 있어요.
사업가 뭐, 그렇다면 우리는 제법 오랫동안 뻐길 수 있을 겁니다.
여배우 사람은 뻐길 수 있을 때 뻐겨야만 돼요.
시장 그게 바로 정치적인 기쁨이죠.
시인 (앞으로 나서며) 여러분이 꼭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중차대한 시대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계급투쟁 같은 건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갈등에 불과해요.
모두들 위기라니요?
사업가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는데요.
평론가 무지는 타파되고 있구요.
여배우 예술도 새롭게 거듭나고 있죠.
과학자 과학은 매일매일이 혁명과도 같아요.
교수 모두들 자신의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시인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구요? 아하, 이래서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시인이란 애초에 예언자였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시장 예언자라니, 그럼 그 예언을 좀 들어볼까요? 이왕이면 내년에 있을 선거 결과부터 좀 알고 싶군요.
시인 내년이요? 난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예언하려는 겁니다.
여배우 지금 이 순간이라뇨. 예언가는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닌가요?
시인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의 미래죠.
평론가 거 참 시인답군요. 시적인 궤변이에요.
시인 시적이지도 않고 궤변도 아닙니다. 시인의 광기에 대한 편견은 여성의 모성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끈질기죠. 난 누구보다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표수집가보다 더 정교하고 집요하게요. 자, 보세요.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나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게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여배우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게 딱히 새로운 얘기는 아니잖아요? 노인들은 언제나 그 점을 한탄해 왔어요.
시인 아뇨. 이건 완전히 새로운 얘기입니다. 뒷방늙은이들의 진부한 넋두리가 아니에요. 19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현실이지요. 보세요.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5년은 고사하고 5분 전하고도 같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빨리 뒤집어 지고 있는지 어지러워서 쓰러질 지경이란 말입니다. 한 번 쓰러지면 어느새 한 세기가 후딱 지나가버릴걸요?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어젯밤에 내 침대에서 잠들었던 나는 더 이상 오늘 아침에 깨어난 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젯밤에 꾸었던 꿈도 어느새 몇 십 년도 더 된 골동품이 되어 있고, 아침에 가졌던 자신의 의견을 저녁에 비난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일관되고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더 이상 우리에게 없어요. 끊임없는 자기부정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이지요.
교수 일리가 있어요. 모든 게 너무나 빨라서, 난 가끔 우리 삶이 짧아지고 있는 건지 길어지고 있는 건지 헷갈립니다.
과학자 모든 건 상대적이죠. 상대적이지 않은 건 빛뿐이에요. 빛은 절대적이거든요.
복지가 그럼 우린 절대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거군요. 매일 신문에서는 19세기가 빛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고 떠들어 대니까요.
과학자 아시다시피 ‘빛의 속도’는 더 이상 은유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빛의 속도를 정확하게 계산해 냈죠. 초당 30만 킬로미터에요.
시인 그래요. 세상은 초당 30만 킬로미터씩 빛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9세기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꿈까지 추월해서 몇 광년이나 까마득히 앞질러가고 있는 거예요. 이거 참, 꿈보다 앞질러가는 세상이라니, 끔찍하지 않습니까?
여배우 아아, 그럼 우리의 꿈은 어떻게 되는 거죠? 화석 연료들과 함께 무쇠기차 화통 속에 처넣어버려야 하나요?
시인 실제로 모두들 그 일에 열을 올리고 있죠. 마치 병을 퍼트리는 쥐를 소탕하듯이 꿈을 소탕하고 있어요. 하지만 꿈이 없다면 인간은 그저 공기 빠진 풍선과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텅 비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배를 곯았는데, 지금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이나 멍청한 사람이나 모두가 다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사업가 그건 사실이에요. 방금 식사를 마치고도 금세 굶주린 사람처럼 다시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게 된단 말이죠. 도무지 성에 차지가 않아요.
평론가 트림의 공허함.
복지가 기근과 풍요 사이를 쳇바퀴 돌 듯이 맴도는 삶.
과학자 심지어 우주 전체가 그렇죠. 수축과 팽창의 영원한 반복이니까요.
교수 아니, 그럼 이 세상이 그저 제자리에서 부풀어 올랐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할 뿐이란 말인가요? 영원히?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없이? 역사도, 성취도, 진전도, 결말도, 완성도 없이? 아니오. 난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시장 거창한 아마겟돈이라도 기대하셨나 보군요.
사업가 냉엄한 정의의 심판이 뒤따르구요.
여배우 결백한 사람들만이 사는 낙원이 도래하는 거죠.
교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과학자 대신 종말도 없잖아요? 그거로는 부족한가요?
복지가 하지만 종말이 없다는 건 ‘희망’조차 없다는 말이잖습니까. 희망 없이 어떻게 단 하루라도 살 수 있겠어요?
평론가 희망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관객들을 향해) 저 사람들을 보세요.
교수 그래서 저들은 매일 밤 죽었다가 아침마다 다시 태어나죠.
과학자 (농담으로) 그리고 낮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말이죠?
여배우 아유, 희망 없이는 정말 지루할 거예요.
사업가 지루한 것만큼 끔찍한 병도 없지요.
시장 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꿈이 필요한 겁니다. 꿈은 희망을 불러오구요, 희망은 지루함을 잊게 해주죠. 특히 노동의 지루함을요.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이에요. 그 꿈이 정말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평론가 하지만 그동안 진부하고 식상한 꿈들이 얼마나 우리를 괴롭혀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희망보다는 악몽을 더 많이 만들어냈죠.
시인 자아 자,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관객들을 가리키며) 오늘 날 꿈이 없는 사람들의 텅 빈 머릿속은 쾌락과 분노, 기껏해야 스포츠와 술과 섹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타락을 어려워하지 않고 또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마치 타락만이 기계보다 인간이 우월해지는 유일한 방법인 것 처럼요. 마치 타락만이 자신이 여전히 인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인 것 처럼요. 마치 타락만이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소명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요. 쪼그라들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위대하니까요. 인간은 자신에게 걸맞는 위대한 꿈을 가져야만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꿈으로 머릿속을 꽉꽉 채워 넣어야 합니다. 각각의 머리를 꿈으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게 해야 해요. 인간은 지금보다 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여배우 하지만 그렇게 많은 양의 꿈을 어떻게 만들어내죠? 세상 전체를 연극무대로 만들 수는 없어요.
시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꿈의 공장을 세우는 겁니다. 새까만 굴뚝이 줄지어 서 있는 방직 공장만큼이나 많은 공장을요. 거기서 세상 사람들 모두 가질 수 있을 만큼 수백만, 수천만, 수억 개의 꿈들을 찍어내는 겁니다. 바야흐로 꿈을 대량 생산하는 거예요.
모두들 꿈을 대량생산 한다구요?
복지가 꿈을 대량생산한다니. 희한한 얘기군요.
평론가 그건 꿈이 아니라 소비욕구 아닌가요?
여배우 어머, 언제부터 그 두 가지가 다른 거였죠?
사업가 허 참, 배우신 분들은 사업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니까. 시장조사는 해보셨어요? 유통경로는요? 모든 사람들이 다 꿈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에요.
시장 하지만 필요 없는 사람에게도 물건을 파는 게 요즘의 상술이죠.
교수 그건 그래요. 일단 대량생산 되고 나면 모두들 그 물건이 필요해지는 모양이더군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았다면 왜 대량생산이 되었겠냐는 식이죠.
여배우 설사 필요하지 않아도 사야만 해요. 그래야 당당해질 수 있어요.
시인 생각해 보세요. 전구니, 사진기니, 재봉틀이니, 철교니, 해열제니, 축음기, 페인트, 전화기, 증기엔진 따위에게 꿈이 밀리다니 말도 안 됩니다. 다른 물건들처럼 꿈도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이 생산돼야 해요. 누구나 탐낼 만큼 멋지고 저렴해야 하는 건 물론이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더 이상 꿈을 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근사한 꿈들을 어디서나 손쉽게 구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업가 꼭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쟁이처럼 말씀하시는구만. 우리가 서로 통하는 구석이 많다는 걸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평론가 대량 생산된 꿈이라니, 그건 영양제도 치료제도 아닌 기껏해야 진통제일 뿐이에요.
시장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부러져 본 사람이라면 진통제를 우습게 여기지는 못할 겁니다.
복지가 하지만 꿈을 대량생산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여배우 그게 바로 신이 하려던 일이었죠. 결국 실패했지만.
시인 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간은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아니, 어떻게요?
시인 인간의 꿈은 오직 인간만이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통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어야죠. 거대하고 강력한 꿈을 가진 뛰어난 인간 말입니다. 우선 그가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꿈을 합친 것 보다 더 크고 완전한 꿈을 꾸는 겁니다. 그럼 전문가들이 그 꿈을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재생산해낼 겁니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개의 꿈들을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스스로 감히 머릿속에 그려보지도 못했던 위대한 꿈들이 세상에 공짜로 뿌려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 꿈을 소비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평론가 네, 좋습니다, 좋아요. 정말 멋지군요. 그런데 그 위대한 인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시인 (어깨를 으쓱하며)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모두들 야유를 보낸다.
시인 아아,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는 곧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낼 겁니다. 나타날 때가 되었어요. 지금은 충돌의 시대이고, 충돌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니까요. 그 에너지가 모이면 번개처럼 한 사람에게 꽂히고 마는 거죠. 그는 자신을 숨길 수 없을 거예요. 숨기려 해도 튕겨져 나오고 말테니까요. 사람들이 그의 꿈에 자석처럼 달라붙어서는 그 꿈의 일부가 되려고 그를 닦달한 겁니다. 모두가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려고 그의 옷자락에 매달릴 거예요. 그럴 수밖에요. 암흑 속을 헤매다가 빛을 발견하면 저절로 (오른손을 위로 뻗어 보이며) 손을 뻗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설사 그 끝이 낭떠러지일 지라도 말이죠. 그래요. 꿈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장 요란하고 영광스러운 파멸을 꿈꾸게 될 겁니다.
모두들 침묵한다. 그 때 무명이 앞으로 나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