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그렇게 이야기가,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가요?
시인 그래,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예요. 이것 보십시오. (무명을 가리키며) 말더듬이가 드디어 제대로 입이 트였네요. 벌써 이렇게 반응이 오지 않습니까? 그 위대한 사람에 대한 어렴풋한 소문만으로도 말입니다. (관객들을 가리키며) 그 위대한 사람은 먼저 민중들을 움직일 겁니다. 민중들이야 말로 꿈이 가장 고갈된 사람들이니까요. 비쩍 마른 스펀지처럼 누구보다 먼저 게걸스럽게 타인의 꿈을 빨아들이죠. 그 다음에는 기회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움직이고, 권력자들이 움직이고, 돈이 움직이고, 결국에는 세상 전체가 움직일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가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거죠. 모두 함께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모두들 웅성거린다.
교수 (혼잣말처럼) 당신의 얘기는 나를 황홀하게 하지만 동시에 소름끼치게 하는 군요. 마치 선악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꿈처럼.
시인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낸다.
시인 그래서- 저는 오늘 몇 푼의 돈보다 더 값진 기부를 준비했습니다. 이건 머지않아 우리 앞에 나타날 그 위대한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시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대단한 시에요. 이 시는 분명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 사람이 나아갈 방향과 성취할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과 성취할 업적이죠.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예언이랍니다. (종이를 펼치며) 자, 그럼 모금함에 넣기 전에 여기 계신 여러분에게 먼저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94장짜리 시니까 여러분 모두 충분히 음미할 수 있을 겁니다. (종이를 펼치며) 제목 [꿈의 산업].
모두 머리 위를 쳐다본다.
무명 (앞으로 나오며 관객들에게) 이런, 여러분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군요. 94장짜리 시 나부랭이를 듣고 있을 생각에 말입니다. 이미 쓸데없는 얘기들을 너무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염려마세요. 저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시 따위는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제 이야기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시인이 시를 넣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인사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시인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무명 내친 김에 남은 다섯 사람도 대충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이야기에서라면 모두 주인공 한 자리씩 차지했을 양반들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제가 주인공이니까요. 하지만 제 이야기보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해 제가 간략하게 요약을 해드리죠.
평론가가 앞으로 나온다.
무명 (빠른 말투로) 평론가는 시인의 94장짜리 시를 한줄한줄, 차근차근,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깎아 내리고는 시인의 어린 시절까지 언급했습니다. 최근 들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정식분석을 들먹인 건 꽤나 기발했어요. 시인을 폭발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시인의 어머니를 음란한 여자라고 불렀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어머니가 그렇다는 거지만요. 하지만 ‘음란’이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평론가는 말했어요. 시는 우리를 여전히 수치스럽게 만들지만 심리학은 모든 단어를 죄에서 구원한다구요.
평론가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인사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평론가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과학자가 앞으로 나온다.
무명 (빠른 말투로) 과학자는 자신이 얼마를 기부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도출하기 위해 열세 가지 공식으로 계산해서 최적의 숫자를 뽑아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모두들 알아듣는 척 했지만 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과학자는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문맹의 시대에 글을 아는 소수의 자들만이 느꼈을 법한 기쁨이죠. 아니, 분명 그 이상일걸요. 아, 그래서 과학자가 얼마를 기부했냐구요? 모르겠습니다. 과학자는 계산식만 늘어놓고 답은 알려주지 않았어요. 결국 우리는 과학자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학자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인사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과학자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사업가가 앞으로 나온다.
무명 (빠른 말투로) 사업가는 다짜고짜 자신의 인생역정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았습니다. 이야기는 가난했던 부모의 초라한 결혼식에서 시작해서 오늘 아침밥으로 먹었던, 그것도 반이나 남겼던 고급 푸아그라에서 끝을 맺었지요. 여러분이 그 지루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정말 교훈적이었거든요. 그는 자신이 힘들 때 아무도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때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었다면 오히려 성공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죠. 그는 ‘생명’이란 결국 ‘경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죠. 노력하고, 안되면 더 노력하고, 안되면 더더 노력하고, 안되면 죽을 정도로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했어요. 그는 적선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망치는 일이긴 하지만 이 파티의 여흥을 위해서 기꺼이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업가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인사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사업가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여배우가 앞으로 나와 포즈를 취한다.
무명 (빠른 말투로) 아, 드디어 우리의 스타가 나왔네요. 찬란한 불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실은 저도 딱 한 번 그녀의 공연을 보러간 적이 있습니다. 맨 뒷좌석이라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요. (여배우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자, 보세요. 정말 아름다워요. 매력적이고, 당당하죠. 심지어 조명들도 그녀를 사랑해요. 그녀는 늘 주인공만 맡지요. 주인공이 아닌 인생은 상상해본 적도 없을 겁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미소를 보내고, 궁금해 하고, 자리를 비켜주죠. 물론 여러분도 이 배우의 얘기가 듣고 싶으시겠죠. 그녀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기가 막히게 잘 춘답니다. 여러분을 위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 줄지도 몰라요. 한 번 그녀의 얘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사이) 아니, 안되겠어요. 그랬다간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러분 모두 이 아름다운 배우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러 다른 극장으로 달려가 버리겠죠.
무명이 여배우의 주변을 돈다.
무명 전 어렸을 때부터 배우들을 동경했습니다. 손가락 끝까지 긴장된 그들의 몸짓, 피부가 되어버린 그 뻔뻔한 가식, 반인반수의 인어들처럼 이야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그 타고난 본능이 부러웠어요. 배우들에게는 이야기가 넘쳐흐릅니다. 우리들의 혼을 쏙 빼놓죠. 특히 여배우들이 그래요, 여배우들에게 실례가 아니라면. 여배우들은 이 아름다운 치마 속에 이야기를 잔뜩 넣어가지고 다니나 봅니다. 이렇게 슬쩍슬쩍 치마를 걷어 올리면서 사방에 이야기를 흘리는 거죠. (여배우의 치마를 자신의 몸에 휘어 감으며) 저도 배우가 될 걸 그랬어요. 그럼 이야기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무대 위에서 살다가 무대 위에서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사이) 여배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연극표 100장을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연극을 볼 권리가 있고 또 그게 의무라고 하면서요. 확신하건대 연극표를 받은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 표를 다시 돈 몇 푼에 팔아치울 겁니다.
여배우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인사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여배우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가 앞으로 나온다.
무명 여러분도 눈치 챘겠지만, 이 사람은 아까부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해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들 사이에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인 모양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투를 꺼내 모금함에 넣었습니다.
?가 폭이 좁고 긴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자선 모금함 구멍에 넣고는 조용히 자리로 물러난다. 모두들 박수를 친다. 무명이 ?에게 공손하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무명 자아, 이렇게 모든 자선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 졸고 있는 옆 사람 좀 깨워주시겠어요? 제 이야기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니까요.
복지가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빠짐없이 자선 모금에 참여해 주시다니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웃들의 식탁은 더 따듯해지고, 우리의 잠자리도 더 편안해 지겠지요. 당분간 우리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코 냉담하지 않으며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들 그럼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말구요.
모두들 서로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다. 무명이 공손하게 복지가에게 풍선 하나를 건넨다. 이제 무명의 손에는 단 하나의 풍선만이 남아있다.
복지가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파티를 즐겨보도록 할까요?
모두들 환호한다.
복지가 여러분에게 감사의 뜻으로 제가 소소한 여흥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이 분도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셨죠. 여러분도 분명 이 분의 이름을 들어봤을 거예요. 자, 준비 되셨나요? 여러분, 호레이스 박사를 소개합니다.
호레이스 박사가 화려하지만 품위 있는 파티 정장을 입고 연예인처럼 등장한다.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수염마저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양복 가슴 주머니에는 커다란 꽃이 꽂혀있다.
호레이스 박사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호레이스 박사입니다. 본업으로 말씀드리자면 치과 의사죠. 아아, 두려워하지 마세요. 도망갈 생각도 마시구요. 지금 제 손에는 칼도 송곳도 뺀찌도 들려있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도 그렇게 잔인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낙천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지요. 병원 밖에서는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요. 오늘 그걸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원 없이 웃게 만들어 드릴 작정입니다. 정말이에요. 여러분은 평생 이렇게 웃어본 적이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웃게 될 겁니다.
여배우 저희의 발바닥이라도 간질이실 건가요, 박사님?
호레이스 박사 당신의 발바닥이라면 얼마든지요. 하지만 오늘은 좀 더 의학적인 방법을 쓸 겁니다. 바로 ‘웃음 가스’죠.
모두들 웃음 가스요?
과학자 진짜 이름은 ‘아산화질소’죠.
호레이스 박사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따분한 이름은 기억하실 필요가 없어요. 전 ‘웃음 가스’라는 이름이 더 좋더군요. 뭐, 이름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중요한 건 이 가스를 마시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행복해진다는 거예요. 막 웃음이 터져 나오죠.
시인 행복해져요?
평론가 웃음이 터진다구요?
교수 아무 이유 없이요?
호레이스 박사 아무 이유 없이요.
여배우 그럼 배우들이 더 이상 광대 분장을 할 필요가 없겠군요.
호레이스 박사 오히려 슬퍼 보일 걸요.
사업가 이 가스가 비싼가요?
호레이스 박사 전혀요. 거의 공짜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복지가 그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면 좋겠네요.
시장 내게 매일 같이 따지러 오는 시민들에게도 줘야겠습니다.
시인 아예 지구 전체를 이 가스로 덮어버리면 좋을 텐데요.
호레이스 박사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허기도 분노도 지루함도 모두 잊어버리고 말테니까요.
평론가 그런데 그 웃음 가스라는 건 어디 있죠? 박사님은 빈손이시잖아요.
호레이스 박사 이미 여러분께 나누어 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두들 저희에게요? (모두들 주변을 둘러본다.)
호레이스 박사 바로 여러분이 손에 쥐고 있지요.
모두들 자신의 손에 들린 풍선을 바라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