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천을 온몸에 두른 나그네는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이오니아식 기둥이 늘어선 높고 긴 회랑을 지나 널찍한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접견실 내부 양쪽에도 하얀색 기둥이 늘어서 있었지만 순전히 장식일 뿐 천정까지 닿아 있지는 않았다. 그 기둥 사이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아폴로, 디오니소스, 헤르메스, 아레스, 아킬레스, 테세우스 등이었다. 사방의 벽은 여러 가지 운동 경기를 하는 벌거벗은 남성들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고 벽의 하단부에는 보라색 히아신스 화분들이 놓여있었다. 전체적으로 모든 게 고상하고 세심하며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노골적으로 '그리스로마 풍'이었다.
"어서 오세요."
접견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한 중년의 남자가 나그네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햇빛에 그을리긴 했지만 환한 표정에 단발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한 눈에도 균형 잡힌 건강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얼룩 하나 없는 - 짐작하겠지만 그리스로마 풍의 - 하얀색 옷은 너무 깨끗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물론 천의 소재나 디자인은 더 현대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훨씬 젊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남자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그네는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자신의 크고 더러운 가방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가 제게 이 도시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이곳에서는 저를 받아줄지도 모른다면서요."
"이주를 원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먼 길을 오셨을 텐데, 시원한 음료라도 좀 드릴까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블릿을 들고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중앙성시를 떠난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럼 그동안 어느 도시에 계셨어요?"
"어느 도시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나그네의 대답을 받아 적던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혼자 지내셨다는 건가요?"
"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세상에.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불행했던 건 더더욱 아니구요.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하고 싶군요. 매일 같은 곳에서 매일 같은 사람들과 매일 같은 일을 하며 매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거야 말로 성숙한 삶이죠."
남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좋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럼 저희 도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사실 자세히는 모릅니다. 오직 남자들만 거주하는 도시라는 것 밖에는요."
나그네의 심드렁한 말에 남자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쾌활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잃지는 않았다.
"그럼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아시다시피 멸망의 날 이후 인간의 모든 유전자가 방사능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남녀 간의 교접에 의한 자연적인 출산은 철저히 금지되었지요. 다행히 곧바로 중앙성시에서는 인큐베이터로 아이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3차 지취사변이 일어나 중앙 집권이 무너지면서 마침내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첫 번째로 독립을 선언했던 도시가 바로 이곳입니다. 저희는 그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나그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사실 남녀 간의 생물학적 생산이 금지된 이후, 그러니까 인류가 종족 번식이라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와 희망이 있었습니까. 가족이라는 모순된 제도가 철폐되고, 모든 성적 취향과 행위가 해방되고, 진정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존중되는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처음 얼마간은 잘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너그럽게 다양한 기호와 취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공유했습니다. 심지어 '성적취향'이라는 단어조차 거의 폐기되었습니다. 온 인류가 꿈에서나 그리던 자유와 관용의 세계가 도래한 것 같았죠. 무한한 공감과 한 없는 너그러움.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은 점점 다시 같은 취향끼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인에게 공감받기보다 내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뿌리 깊은 본능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죠. 취향의 특이성이 인격의 보편성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취향으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억압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일상이 되었고 폭력과 살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인간적인 현상이었지만 무질서와 대혼란을 야기했죠. 그리하여 3번의 지취사변을 거치면서 여러 개의 독립된 자치 도시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중앙성시는 단지 생산, 양육, 교육의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 15살이 되면 자신의 도시를 찾아 떠나야 하죠."
나그네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런, 다 아는 얘기를 제가 길게 늘어놓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역사를 잘 모르는 친구들도 있어서요. 나이 든 사람의 노파심이죠. 하지만 역사는 중요한 거예요. 역사를 모르면 오늘을 이해할 수 없거든요. 오늘이 바로 그 긴 역사의 결말이니까요. 매일 매일이 그렇죠. 어쨌거나 그렇게 이 도시는 만들어졌습니다. 네, 이미 아시다시피 우리 도시는 남자들만이 거주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모두 동성애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동성애는 단지 취향이나 욕망의 문제만은 아니에요. 오히려 윤리와 존엄의 문제이지요. 진정한 평등의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그네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이미 자신의 얘기에 흠뻑 빠져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중요한 건 여자가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왜냐구요? AI가 인간의 지성적인 정신 행위를 모두 담당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가치라고는 오직 육체적인 가치뿐이니까요. 인간의 육체적 힘, 기능, 통제력 말입니다. 그것이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 힘, 기능, 통제력이 되는 거죠. 이것이야 말로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진정한 우월함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이를 출산하는 기능마저 사라진 여자에게 더 이상 어떤 우월함이 있나요. 여자의 육체가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는 건 이제 객관적으로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자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인정하려들지 않아요.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에는 반대한다구요? 이 무슨 궤변이란 말입니까. 말장난이지요. 차이를 인정한다면 차별도 인정해야 해요. '차이'를 인지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차이가 있다면 결코 평등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눈이 재빨리 반짝였다가 다시 금세 사그라졌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웅변에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건, 그렇게 입으로는 주구장창 평등을 외치는 여자들이 막상 현실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한껏 몸을 사린다는 겁니다. 갑자기 특혜를 요구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육체적 무능과 결함과 결핍이 오히려 권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를 친다니까요.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저열함입니다. 책임감 있고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염치도 자존심도 긍지도 없는 거예요. 육체의 열등함이 결국 영혼의 열등함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죠. 그런 타락한 존재와 육체 관계를 맺다니 너무나 불결한 일이 아닙니까. 타락은 전염성이 강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와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요. 강한 것을 강한 것으로 인정하고 약한 것을 약한 것으로 인정하는 정당한 상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도시의 모토는 '포스트-르네상스' 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상이었던 지덕체를 추구하지요. 그리스는 알고 있었어요. 건강한 지성과 인격과 신체는 오직 남자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요. 남자들의 평등하고 책임있는 의지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걸 말입니다. 오직 남자들만이 인간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남자들만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될 수 있어요. 오직 남자들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남자는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분 좋은 흥분이었다. 육체와 영혼의 활기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보기 좋게 붉어지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반면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어떤 생각에 깊이 잠겼다가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부릅뜨곤 했다.
"동의하시나요?"
남자가 숨을 고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나그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건......."
그리고 나그네는 잠시 우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 여자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남자가 아니기 때문인가요."
나그네의 질문에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질문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불쾌해졌다. 대체 나그네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인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 두 가지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여자는 여자이고 또한 남자가 아니면 여자인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요."
나그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자웅동체이신가요? 최근 들어 인큐베이터에서 종종 자웅동체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조금씩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더군요. 그렇다면 도시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그들이 사는 도시는 동쪽으로 5000km 정도 더 가셔야 해요. 소문으로는 요즘 그 도시도 상당히 번성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나그네의 얼굴은 더 우울해졌다.
"그 도시에서 오는 길입니다. 여기에 가서 의논해 보라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남자는 당황한 나머지 크게 소리쳤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결국 남자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럼 당신의 성별은 뭐죠?"
"없습니다."
"없다구요?"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니, 저런, 저기, 그런 경우는 처음 들어 보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그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전혀 생기 없는 싸늘한 웃음이었다. 반면에 남자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뻣뻣하게 굳어졌다. 처음의 그 여유와 교양은 온데간데없었다.
"에, 그렇군요. 그런데, 어쨌거나, 그렇다면, 저희 도시로의 이주는 불가할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도시는 남자만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여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그네가 항변했다.
"그거야 그렇죠."
남자가 인정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 도시의 요구 조건에 적합하지 않나요. 여자가 아니니 여자처럼 열등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네, 그건 그렇지만...."
"아니면 오히려 제가 여자보다 더 열등하다는 건가요?"
"네?"
"저는 누구보다 열등한 사람입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침묵의 순간이 지나갔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남자 쪽이었다.
"존재란 상대적인 것만이 아니라 절대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남자는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대답일까?
"여자들의 도시를 한 번 가보도록 하세요."
남자가 간신히 처음의 친절함과 침착함을 되찾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게, 잘 모르겠지만, 외관상으로는 여자들과 더 비슷할 테니까요. 어쩌면 여자들은 받아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관대하지요."
그리고는 얼른 다시 덧붙였다.
"그것 역시 일종의 나약함이지만요."
그러나 나그네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낡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둘러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회랑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코 상대적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는 누구보다 우월한 것일까 아니면 누구보다 열등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