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앞의 에피소드인 '다른 지구의 [미운 오리 새끼]'와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모래 투성이의 회색 천을 온몸에 두른 나그네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러나 기하학적인 모양이 독특한 긴 복도를 지나 채광이 잘 되는 시원하고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 데 놓인 책상 앞에 앉아있던 여자는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다소 당황한 듯했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친절하게 말했다.
"먼 길을 오신 것 같군요. 우선 좀 앉으세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먼지에 찌든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며 나그네가 대답했다.
"누군가 저희 도시를 방문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조금 길쭉한 황갈색의 얼굴에는 생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누가 제게 이 도시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여자들의 도시인 이곳에서는 저를 받아줄지도 모른다면서요."
"이주를 원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여자는 이번에는 정말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저희는 이주자를 받지 않아요."
"저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나그네가 맥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이주자를 받지 않습니다."
"제가 여자라고 해두요?"
나그네가 고집을 부렸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애초에 잘못 알고 오신 겁니다. 이곳은 여자들의 도시가 아닙니다. "
"그럼 남자들도 함께 거주하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여자들만 사는 곳은 맞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자가 더듬거리며 막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사무관님, 손님이 계신데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어서요. 이번에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가 장애인 도시로의 이주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완강해요. 친구들과 이웃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군인들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추방하도록 하세요. 우리의 원칙은 확고합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어요."
"알겠습니다."
여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나그네는 돌아서서 방을 나가는 여자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 사람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 머리 스타일만 빼고는 아예 같은 사람인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검은 머리에 조금 길쭉한 황갈색의 얼굴에서는 생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나그네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리고 방금 보셨다시피, 우리는 여자들의 도시가 아닙니다. 모두 한 사람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클론들이에요. 우리는 중앙성시로부터 독립하여 클론을 자체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 번에 많은 클론들을 생산해 낼 수는 없지만, 어쨌든 도시 주민을 자급자족하고 있는 점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요."
"사람들이 모여서 도시를 만든 게 아니라 도시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만든 거군요. 그것도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요. 대체 무엇 때문이죠?"
나그네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죠."
여자의 눈이 밝게 빛났다.
"민주주의라구요?"
"민주주의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뭐, 일종의 전설 같은 얘기죠. 어리석음에 대한 교훈으로 자주 언급되는."
"네,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도시의 창시자는 완벽한 민주주의를 꿈꾸었습니다. 물론 그녀도 멸망의 시대에 민주주의가 철저하게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세계가 멸망한 원인 자체였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민주주의의 탓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한계와 성격을 잘못 이해했던 사람들의 탓이었다고 생각한 거죠. 아니, 그들은 잘못 이해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망할 수밖에요. 심지어 고대 그리스에서도 알고 있었던 걸 후대에서는 완전히 곡해하고 말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떤 점을 말인가요?"
"바로 '다양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자는 책상 서랍을 열고 하얀 포장 상자 속에 들어있는 하얀색 사탕을 한 개 꺼내 입안에 넣었다. 나그네에게도 권했지만 나그네는 정중히 사양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민주주의가 다양성을 보장하고 수호하며 다양성 역시 민주주의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치 목적이 선하면 결과도 선할 거라는 믿음처럼 유아적이고 저급한 망상이었죠. 급기야 다양성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가치이자 경쟁력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답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도 민주주의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낙관론이에요.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가까웠지요."
잠시 여자는 혀로 사탕을 굴려서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사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그것에 저항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이자 핵심이에요.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닌 잡탕일 뿐이죠.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던 고대 그리스를 보세요. 눈부시게 발전한 정치, 문화, 경제 체제를 이룩하고도 그들이 통일 제국을 거부한 채 도시 국가에 머물렀던 건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주주의는 거대 국가나, 수많은 인구들, 다양한 인종들이나 계층들, 상충되는 이익집단들에 의해서는 결코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강력하고 전체주의적이며 단일한 종족의식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오직 같은 인종만이, 오직 남자들만이, 오직 자유인들만이 투표권을 가졌던 건 그들이 민주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이를 없애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나그네는 알듯 모를 듯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는 '관용'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요? 다른 말로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요."
"아하."
여자가 흥분해서 외미디 소리를 질렀다.
"관용, 바로 그 단어의 뉘앙스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어를 좀 더 엄격하게 이해하고 제한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어요."
여자는 사탕을 또 하나 입 안에 넣고는 다시 나그네에게 권했다. 이번에는 나그네도 사탕 한 개를 집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사탕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관용이란 오직 철저하게 전체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만 한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국민의 일원인 누군가가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다른 국가나 종교, 철학, 이념, 이익을 위해 이 나라의 여론을 조장하고 투표권을 행사한다고 말이에요.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관용을 파괴하기 위해 관용을 요구하고, 자유와 평등을 파괴하기 위해 자유와 평등을 자처한다면, 민주주의는 자기모순에 의해 저절로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멸망의 시대에 민주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죠. 사실 멸망의 시대의 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해서 민주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다양성이 민주주의를 법치주의로 변질시키고 말았어요. 다양성 사이의 분란과 갈등을 조정하고 통제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하지만 민주주의의 하위 개념이어야 할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의 상위 개념이 되어버린 순간, 법치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우선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여자는 사탕을 와그작 씹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조금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히틀러를 일종의 롤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잔인무도하고 미숙하고 일관성이 없었어요. 오히려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가장 오해하고 남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말하자면 철저하게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만큼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정확했습니다. 유대인이 섞여 있는 한, 단일 종교와 순수 인종을 이루지 않는 한, 불신을 제거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국가는,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그네는 말이 없었다. 대신 입 속의 사탕을 와그작 소리 나게 씹어 삼켰다.
"그래서 우리 도시의 창시자는 모든 다양성을 완벽하게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한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직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클론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죠. 그래서 그녀는 자기 자신의 클론들을 만들어 이 진정한 민주주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심지어 그녀는 어느 정도 도시가 자리를 잡자 '창시자'라는 특권을 가진 자신이 민주주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결단을 내렸답니다. 안타깝지만 바로 그게 민주주의의 숙명입니다. 리더를 키우고 그 리더를 제거하죠. 개성을 존중하지만 평준화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의 진정한 관용이,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각자 로봇처럼 개성도 없고, 판단도 없고, 선택도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예요. 우리는 매일매일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우고 심지어 서로를 가열차게 비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껏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그리고 그것이 결국 유용한 합의와 평화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건, 서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믿음."
여자는 두 눈을 빛내며 감격에 젖었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민주주의를 이룩해 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 그럼 이제 왜 우리 도시가 이민자를 받지 않는지 잘 아셨겠죠?"
나그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고 더러운 가방을 다시 어깨에 둘러메고 자신을 받아 줄 다른 도시를 향해 먼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