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그런 날들이 있었다.
내가 어린아이도 어른도 아닌, 사실 그 누구도 아니었던 날들.
세상은 마치 두 세계 사이의 거대한 틈새에 빠진 것처럼
역사도, 달력도, 시계도, 주소도 없이
뼈대도 근육도 피부도 없이 이리저리 쓸려다니는 광대한 사막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신처럼 전능하고 또 불구자처럼 무능했다.
그리고 전능할 때나 무능할 때나 똑같이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누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고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동시에 무엇도 요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나 두렵고 또 지긋지긋했다.
교만함과 열등감이 뒤섞여서 나는 늘 우울했고
미지의 세계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이미 너무나 뻔해서
앞으로 이곳에서 수십 년을 더 버텨야 한다는 게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완전한 건 나이고 불완전한 건 이 세상일까?
아니면 불완전한 건 나이고 완전한 건 이 세상일까?
둘 다 완전하거나 둘 다 불완전할 리는 없어.
그럼 이토록 지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가 모르는 것까지 이미 다 알아버려서
내가 모르는 것 까지 이미 다 저질러 버려서
이미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생각해 보니 그런 날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