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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l 02. 2023

[연극] 테베랜드





연극 :  테베랜드

공연장소 :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공연기간 : 2023년 6월 28일 ~ 2023년 9월 24일

관람시간 : 2023년 7월 1일 오후 2시




     글을 쓸 때는 기승전결을 지키는 게 좋다고 한다. 문제 제기, 전개, 전환, 결론.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마지막을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궁금증을 가지고 끝까지 읽을 테니까. 아무리 짧은 글에도 서사가 있어야 독자들은 만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 둔 채 이리저리 밀당을 하며 말을 돌리는 데 익숙하지 않다. 지금도 몇 줄 쓰지 않았는데 벌써 입이 근질근질하다. 그래서 먼저 속 시원하게 똬아 결론부터 말하고 시작하려 한다. 이 연극은 재밌다. 한 번 보러들 가시라. 

    근래 들어 본 가장 훌륭한 연극은 아닐지라도, 근래 들어 본 가장 흥미로운 연극이다. 그리고 텍스트로 감상평을 풀어내기에 상당히 난감한 연극이기도 하다. 텍스트 자체가 바로 이 연극의 주제이기 때문이고, 또 연극적인 장치가, 오직 연극으로만 가능한 장치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촘촘하고 세부적인 설정은 또 얼마나 많은지. 만약 이 연극을 본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는 거라면 이 지지부진한 과정을 건너뛰어도 좋으련만. 글을 쓰는 건 때로는 밭을 가는 것처럼, 혹은 수를 놓는 것처럼 근면함을 요구한다.  소처럼 무거운 멍에를 지는 일이고 누가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이랴'를 외치는지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한 고랑 한 고랑, 한 땀 한 땀 고개를 처박고 문자를 세기는 일이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그제서야 멀찍이 물러나서 그 전체 풍경을, 기대 이상이거나 기대 이하인, 언제나 의외인 그것을 의구심을 가지고 음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음? 지금 나는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이 연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만약 무대 위로 한 사람이 올라오더니 '이건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일입니다'라고 말한다고 치자. 관객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건 정말 저 사람이 겪었던 일일까? 만약 저 사람이 정말 겪었던 일이라면 저 사람은 연기자가 아닌 걸까? 아니면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일까? 에이, 저 말은 그저 작가가 써준 대로 외워서 말하는 대사에 불과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일인 걸까? 아니면 작가도 누군가의 얘기를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한 걸까? 그럼 그 사람은 누구지? 아니, 어쩌면 그저 작가가 순전히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대 위의 저 사람은 아무도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자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걸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대 위의 저 사람은 아무도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자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라는 말인가? 그런데 그가 맡은 배역의 인물 자체가 '연기자'라면 또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무대 위의 저 사람은 아무도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자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를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라는 걸까? 그럼 그 연기자를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를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도 가능할 텐데? 나는 이 문장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지만,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 저 대사의 내용이 아니다.  저 대사는 그저 요점을 가시적으로 강조해 줄 뿐이다. 우리는 내용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무대 위의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말'을 하느냐이다. 아니, 꼭 '말'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무대 위에서 누군가 '어'라고 말하는 순간, 그저 아무 단어, 외마디 소리, 기침이라도 하는 순간, 무대는 돌연 혼종과 혼란의 기묘한 장소가 된다. 그리고 주체가 불분명한 가운데 자유를 획득한 텍스트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무대는 마치 마법진처럼 텍스트를 마법화 하는 데, 무대가 텍스트에게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텍스트가 무대에게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스핑크스야 말로 바로 텍스트의 화신이다. 스핑크스는 장황한 말들을 끝없이 늘어놓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기에 그것을 '질문'이라고 부른다. 스핑크스는 '인간'을 텍스트로 해체하는 데 (그것은 신화 속에서 상징적으로 살인으로 표현된다)  실상 그것은 텍스트가 인간을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해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도 괴물도 아닌 오이디푸스는 편협하고 단편적이며 소위 '문명적인' 인간이기에 오직 하나의 단어로만 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균일한 일체의 '인간'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핑크스가 죽은 건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혔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부당하게도 '답'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자체로 이미 신성모독이니까. 그것은 신을 살해하는 것이다. 폐륜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죽지 않는다. 스핑크스는 '무대'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오이디푸스를 그 무대 위에 높게 세워놓고 텍스트를 말하게 하고 더 나아가 텍스트 자체가 되게 한다. 그렇게 갈가리 찢어 다시 인간을 해체한다.  그렇게 스스로의 신성과 마법을 부정하는 인간에게서 신성과 마법을 회복시킨다. 그것은 폭력이다.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실은 실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텍스트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신이 백조로, 황소로, 남자로, 여자로, 아이로, 안개로 혹은 황금 비의 모습으로 무대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재림한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리고 텍스트가 재림할 때 우리에게는 적절한 의식이 필요하다. 창궐하는 텍스트가 저주와 폭력의 (혹은 저주와 폭력인) 무대가 되어 돌아왔을 때, 군중들은 왕에게 달려가 예언 속의 범인을 잡아달라고 아우성친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진짜 범인에게 관심이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예언의 내용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진짜 범인이 아닌 '범인'을 원하고 있다. 심판이 아니라 텍스트가 완성되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 연극이 시작되고 끝나기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법진을 지켜내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그 마법진을 둘러싸고 있는 또 하나의 마법진이다. 그들은 텍스트의 힘이자 텍스트의 무의식이다. 그들은 관객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불평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잘못이 아니다. 이 연극을 본 사람이라면 내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계속 이런 식으로 글을 풀어나갈 수는 없다. 나 역시 오이디푸스 식으로 어떻게든 '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답은 결국 스핑크스의 입을 통해 '질문'이 될 것이다.   

    연극이 시작되면 '극작가'가 무대로 올라와 관객들에게 자신의 공연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한다. 존속 살해범 마르틴을 '마르틴'이라는 역할로 연극 무대  위에 새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극작가는 범죄자를 무대 위에 세워 놓고 자신의 범죄에 대해 자백을 하도록, 혹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자백하는 자신을 연기하도록 시킬 참이다. 형식적으로는 새롭지 않지만 어쨌건 심리적으로는 참신한 시도임이 분명하다.  거울 속의 거울처럼 무대 위의 무대가 끝없이 펼쳐지면서 관객들은 범죄자를 연기하는 연기자이자 연기자를 연기하는 범죄자에게 이중으로 매혹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교도소 안 철장이 처진 농구장에서 마르틴을 만난다. 이 철장은 텍스트를, 혹은 무대를, 혹은 이 세상을, 어떤 경계를, 혹은 경계의 부재를 상징할 수도 있다. 뭐, 사실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는 그저 연극적 장치라고 해도 그만이다. 그는 이 철장 안에서 마르틴과 인터뷰를 하면서 연극을 위한 텍스트를 만들고자 한다. 여기서부터 1인칭 화자인 극작가는 '1인칭 화자'이자 '경험자'이자 '연기자'이자 '연기자를 연기하는 연기자' 등의 역할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이것은 연극에서 흔히 쓰이는 장치이지만, 이 부분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물고 늘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만약 이뿐이었다면 문제는 비교적 분명하고 간단했을 것이다. 돌연 여기에 일종의 방해-폭력이 개입되는 데, 살인자를 무대 위에 세우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당국에서 이 프로젝트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극작가는 하는 수 없이 '마르틴'을 연기할 마르틴 대신에 '마르틴'을 연기할 배우 '페데'를 뽑는다.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마르틴'과 '페데'는 한 명의 배우가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그러나 (분명 의도적으로) 배우는 '마르틴'과 '페데'를 다른 인격처럼 애써 구분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의상이나 머리스타일을 바꾸지도 않고 목소리나 표정에도 변화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상황과 대사가 아니면 '마르틴'과 '페데'를 결코 구별할 수 없다. 바로 이 두 인물의 혼동과 혼종이 내내 이 연극 전체에 중심적인 활기와 재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마르틴'과 '페데'라는 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연기자라고는 단 두 사람뿐인 이 무대는 점점 수많은 인격들, 역할들, 1인 다역과 다역 1인들이 우글거리게 된다.  '극작가' '극작가를 연기하는 배우' '극작가를 연기하는 극작가' '극작가를 연기하는 극작가를 연기하는 배우' '마르틴' '마르틴을 연기하는 배우' '마르틴을 연기하는 페데' '마르틴을 연기하는 페데를 연기하는 배우' '페데를 연기하는 배우' 등등등. 어느새 무대 위는 스핑크스의 날갯짓 소리로 가득 차고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으로 뒤섞이고, 애초에 누가 스핑크스이고 누가 오이디푸스였는지 불분명하기만 하다. 그러니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연극이 결국 암전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것이 이 연극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연극을 파악하기에는 어느 정도 충분하다. 나 역시 이미 피곤해져서 여기서 그만 글을 끝맺고만 싶다. 그러나 나는 자꾸 세부적인 내용에 머리 끄댕이가 끌어 잡힌다. 나는 텍스트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 연극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앞에서 여러 번 주장했고 여전히 그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연극 텍스트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꽤나 집요해서 심지어 전체를 위협할 지경이라는 것도 인정해야겠다. 이것은 그저 작가 개인의 취향일 뿐이고, 또 작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인지도 모르며, 어쩌면 작가의 의도와는 정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 실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꿈에 어떤 '침대'가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침대인가가 중요하듯이, 세부적인 내용들, 관계 설정, 대사의 뉘앙스와 인물들의 표정들이 이 연극의 분위기를 다시 전복시켜 버린다.

    존속 살해, 연극에 대한 연극적 고찰, 텍스트의 긴장과 충돌 등등 이 연극은 선이 굵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내성적이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나는 이 '여성적' 혹은 '남성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언제나 망설이곤 하지만 이보다 효과적인 표현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끝내는 쓰고야 만다. '여성적'이라는 표현을 다른 단어로 대체하자면 글쎄, '게이적'이라고 해야 할까?) 자잘한 설정들, 섬세한 관점들, 다채로운 이론들, 이 텍스트에서 연관되고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다시 이 텍스트 안에 하나도 남김없이 조근조근 다 들어가 있어서, 마치 아까워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할머니의 반짇고리를 열었을 때처럼 아기자기하고 어수선하고 잡다한 느낌마저 준다. 야심차다고 하기보다는 다소 조잡하다고 해야 할까. 농구공을 드리블하듯이 텍스트를 튀기고, 치고, 빠지고, 슛을 넣고, 튕겨 나오고, 스쳐 지나가고, 굴러가고, 어떤 건 링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이 모든 걸 하나의 연결 동작으로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 바람에 나는 내가 메모한 것의 10분의 1도 여기에 다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이 연극을 '여성적'이라고 느낀 건 존속 살해, 그것도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이라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을 중심에서 다루면서도 이 연극이 사실상 거기에는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이 연극에서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폭력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러니까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은 그저 진부하고 추상적이며 심지어 유치한 소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살인 사건에 대한 뉴스 기사처럼 순전히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폭력이다.  그보다 이 연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애착을 보이는 건 다름 아닌 '관계'이다. 폭력이라는 거대한 우주 속을 떠도는 텍스트의 행성들을 뚫고 서로에게 접촉하는 두 존재 말이다. 그것은 두 인간일 수도 있고, 텍스트와 삶일 수도 있고, 배우와 관객일 수도 있다. 어쨌든 두 남자 사이의 감정적 소통과 다정한 공감, 우정으로 표현되는 이것은 연극 전체를 (거의 멜로 드라마 만큼이나)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연극이 바라는 건 어찌 되었건 마음의 평화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행복한 결말 말이다. 시작한 것도 끝난 것도 없는데 돌연 서로에게 추파를 던지며 웃고 있는 무대 위의 저 두 배우처럼. 솔직히 말해 이 부분은 내 취향이 아니다. 결국 두 주인공이,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텍스트와 삶이, 배우와 관객이 서로를 통해 성숙해지는 아름답고 순진하지만 어설프기 그지없는 이 성장 드라마에 나는 반대한다. 그 모든 흥미로운 담론들을 지극히 감상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있어도 연극을 구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절대로 그러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 전체를 반대할 수는 없듯이 이 연극에게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어떤 위험이든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극은 한 번 위험을 감수해 볼 만하다.            

   우리 모두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매 순간 삶과 텍스트가 끊임없이 서로를 빗겨나가고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져서 삶은 삶대로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영원히 겉도는 듯하다. 그 황폐한 불모의 틈 사이를 우리는 미로처럼 헤매고 다닌다. 텍스트에게도 삶에게도 공감받지 못한 채. 절대적인 무관심 속에서. 아무 일도 없이. 그러나 어떤 폭력의 순간이 오면 (그것이 폭력을 통해서인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텍스트와 삶은 서로에게 뒤엉킨다. 그것은 살인과 근친상간이라는 극단으로 대표되는 강렬한 접촉이다. (이러한 사건이 폭력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1차원적인 시간의 순서가 무의미한 심리적 공간에서 원인과 결과란 아무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돌연 그 무엇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그 무엇도 미끄러져 내리지 않는다. 모든 게 질척하고 끈적끈적하게  녹아들어 간다. 경계와 구분이 사라진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몸을 섞는다. 아들이자 남편이 되고,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며, 아버지이자 형제가 되고, 자식이자 손자가 된다. 스핑크스가 되고, 오이디푸스가 된다. 아니,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이고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이다. 처음부터 그랬고 마지막 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마지막이라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고향이자, '오이디푸스'라는 텍스트의 무대이며, 이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테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도에는 있지만 찾을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떠나온 우리의 고향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한 번도 그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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