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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27. 2023

[연극] 네이처 오브 포켓팅

The nature of forgetting





연극 :  네이처 오브 포겟팅  The nature of forgetting

공연장소 :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공연기간 : 2023년 6월 22일 ~ 2023년 6월 24일

관람시간 : 2023년 6월 24일 오후 2시




     연극이 시작된다. 딸이 옷걸이에서 아버지의 옷을 고른다. "아빠, 이 양복을 입으세요. 옷걸이 끝에 걸어놓은 이 양복이에요. 빨간 넥타이는 주머니에 넣어 놨어요." 하지만 남자는 그 옷을 찾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옷걸이 한 구석에서 오래전 교복 저고리를 찾아내고는 좋아라 하며 그것을 입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어린 소년이 된다. 

     이 10분 동안의 전개만으로도 관객들은 모두 이 연극이 신파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좋다, 신파라. 영국의 신파는 과연 어떤지 한 번 볼까. 신파의 정석은 인종과 국민성을 뛰어넘어 뻔하기 마련인지라 (내 눈에서 눈물 한 번 뽑아 보겠다는 거지) 나는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국의 신파는 영리하고, 세련되고, 슬프다.

    내 눈에서 눈물 한 번 뽑아 보겠다고 대놓고 덤비는 데, 충분히 경계하고 얕보고 있었는데도,  마지막에는 그만 정말로 눈물이 찔끔 나고 말았다. 심지어 대사 중독자인 내가, 대사라고는 처음 저 딸의 대사 외에는 거의 무언극에 가까웠던 연극에서 눈물이 다 나다니. 부관참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내가 혹독하게 비판했던 '세 자매 죽음의 파티'가 언뜻 생각이 났다. 아, 그 연극이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이 연극은 '기억'을 다루고 있다. 잊고 싶은 않은 기억, 돌아오지 않는 시절, 떠올리면 사무치는 기쁨과 회한. 처음의 시작에서 볼 수 있듯이, 주인공 남자는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 정신병 때문인지, 일종의 치매 증상인지, 단지 너무 나이가 많아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현실의 사람들과 물건들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뻔히 걸어놓은 옷을 찾지 못하고, 딸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면, 혼란한 나머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에 과거의 기억은 마치 현실처럼,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그의 앞에 떠오른다. 마치 무대 위에서 환한 조명을 받는 연극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이 연극 무대 위에는 또 하나의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 장소가 바로 그의 기억이 재생되는 곳이다. 그는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다시 한번 그 옛날의 장면을 연출한다. 어린 날의 자신,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던 엄마, 소란스럽고 즐거웠던 학교 시절, 다정했던 친구들,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첫사랑과의 데이트. 그녀와의 결혼. 재미있는 부분은 그 '작은 무대' 밖의 무대이다. 조명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의 그곳은 창고, 옷방, 대기실, 그림자, 무대 뒤편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다. 좀 더 학구적으로 '무의식'이라고 해도 좋고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라고 해도 그럴듯하다. 그의 기억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작은 무대'의 뒤편인 무대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자신이 끼어들 장면이 나올 때를 조용히 기다린다. 그것은 일면 다정하고 또 일면 소름 끼치는 모습이다. 그들은 연기자들이자 동시에 이 '작은 무대'의 유일한 관객들이기도 하다. 우리의 기억을 관조하고 있는 우리 안의 존재들. 그들은 누구, 혹은 무엇일까? 기억의 조각? 혹은 영혼의 조각? 나의 영혼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영혼의 조각일까?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소중한 누군가의 기억을 그저  '기억'이라고 부르는 건 어쩌면 부적절한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단순한 풍경이나 사건, 물건에 대한 기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 안에 살아있어요.'라는 진부한 대사는 과연 우리의 짐작만큼이나 진부한 것일까? 놀랍게도 우리 기억 속의 인물들에게는 일종의 자신만의 인격이 있다.  우리 기억 속의 인물들에게는 일종의 자신만의  영혼이 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영혼의 조각이 마치 유리 조각처럼 우리 안에 박혀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군과와 관계를 맺는 일은 서로 영혼의 조각을 나누어 갖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인격 속에서 그들의 인격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걸까. 그들이 죽었든, 혹은 내가 죽었든. 

     그러나 기억은 혼란스럽고 유동적이며 뭉개졌다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다. 무대 뒤편에 있는 인물들 역시 각각의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일인 다역으로서 '작은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 다시 물러난다. 그들은 오래전 친구가 되었다가,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되었다가, 선생님이 되었다가, 엄마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혹은 옷을 돌려 입으며, 인물과 장소와 시간을 지정한다. 어쩌면 기억이란 아무리 생생하다고 해도 이미 '은유'나 '상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기억에서 이런 일은 흔한 일이며 물론 연극에서도 흔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그의 첫사랑이자 아내인 인물만은 결코 일인 다역을 맡지 않는다. 그녀는 '은유'도 '상징'도 아닌 오직 그녀 자신일 뿐이다. 그녀는 주인공인 남자만큼이나 그 '작은 무대'의 주인공이다. 어쩌면 진짜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은유'이거나 '상징'인 건 오직 주인공인 남자 그 자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이였다면 이 연극은 지극히, 그저, 신파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서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연극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리고 아마도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이 기억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병이 깊어져서 이 소중한 기억들마저 망각 속으로 삼켜지고 있는 것인지, 혹은 주인공의 병이 나아져서 이 악착같은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을 차린 주인공이 자신의 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과거로부터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인 듯도 싶다. 그러나 이러튼 저러튼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말'이란 그저 습관적이고 실용적인 장치일 뿐이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무대 위의 '작은 무대' 위에서는 기억들이 점점 겹쳐지고, 혼동되고, 반복되고, 순서가 뒤바뀌고, 속도가 빨라진다. 주인공은 그 기억들에 머무르고 싶어 하지만, 그 기억들을 다시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그 순간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기억들은 점차 그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들이 쏟아져 내리고, 모든 기억들이 뒤죽박죽 되고,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되고, 주인공은 고장 난 인형처럼  허우적거리고, 결국 모두가 옷을 벗어던지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한다. 그들은 고통받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들은 춤을 추고 있는 걸까. 이것은 지옥일까, 축제일까. 우리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글쎄, 나는 울었다.

    뭐, 정확히 말해서 운건 아니다. 눈물이 나오긴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나에게도 반드시 일어날 신파였기 때문이다. 만약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직전,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이 아니게 되기 직전, 연극이 끝나기 직전, 나는 내 작은 무대 위에서 나 자신만큼이나 나 자신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허우적거리며 돌게 될 것이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 내게 소중했던 개들과 고양이들, 내게 소중했던 장소들, 내게 소중했던 시간들, 한 번도 소중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까지 모두 한 덩어리로 곤죽이 되어서. 아마 그때는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분명 웃음조차 잊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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