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May 18. 2023

[연극] 오셀로




연극 :  오셀로

공연장소 :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

공연기간 : 2023년 5월 12일 ~ 2023년 6월 4일

관람시간 : 2023년 5월 17일 오후 2시




     나는 '햄릿'을 좋아한다. 그러나 '햄릿' 외에는  딱히 셰익스피어 희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말솜씨는 어느 글에서나 섬광처럼 빛나지만,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고루하다. 무엇보다 이야기나 인물이 좀 어정쩡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 어정쩡함과 완성도 부족이 오히려 연출가들의 창의력을 자극하고 배우들에게 한없이 넓은 무대를 제공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맥베스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리처드 3세는 희곡자체보다 연극에 풍부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나쁘지 않지만, '오셀로'라.... 이건 정말 애매하기 그지없다. 

     우선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고부터가 다소 어정쩡하다. 이 희곡전체를 관통하며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건 이야고가 저지르는 악행이 아니라 그 악행의 동기의 불분명함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이 부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승진이 좌절됐다느니, 오셀로가 자신의 아내와 소문이 있다느니, 금전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느니, 이야고는 있는 대로 구구절절 핑계를 끌어다 붙여보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다. 작가는 그저 관객에게 이 정도로 대충 이해하고 얼렁뚱땅 넘어가 주기를 비굴하게 부탁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셰익스피어가 이야고에게 그럴듯한 동기를 만들어주지 못했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야고에게는 사실 아무런 동기가 없다는 사실을 좀 더 솔직하고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고에게는 아무런 동기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그럼 아무런 동기도 없는 이야고의 악의는 대체 어디서 유래했단 말인가.

    사실 이 희곡에서 가장 어정쩡한 건 오셀로다. 그는 이 희곡의 제목으로 떡 하니 자신의 이름까지 박아놓고도 너무나 불분명하고 무기력한 인물이다. 나는 처음 이 희곡을 읽었을 때 왜 제목이 '이야고'가 아니라 '오셀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주인공의 자리는 마땅히 이야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처음부터 끝까지 동분서주하는 건 오셀로가 아니라 이야고가 아닌가. 더 다양한 인격과 감정을 보여주는 것도 오셀로가 아니라 이야고이다. 이야고에 비하면 오셀로는 목석과도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는 이야고에 의해 손쉽게 조종당하다가 별 저항도 없이 맥없이 무너진다. 허탈할정도로 싱겁기만 하다. 그런데도 '오셀로'가 이 희곡의 제목을 차지하는 영광을 얻은 건 왜일까.        

    나는 앞에서 이야고를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야고가 저지른 악행의 동기의 불분명함이 희곡 전체를 관통하며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핵심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취소한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오셀로'이며 '오셀로'라는 인물 자체가 희곡 전체를 관통하며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핵심이라고 말이다. 이야고가 오셀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그토록 악착같이 애를 쓴 건 오셀로에 대한 질투나 원한, 분노 때문이 아니다. 그건 그저 그가 바로 '오셀로'였기 때문이다. 그가 '오셀로'였기 때문에 또한 이야고는 '이야고'가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한쌍의 커플과 같다. 그러나 반드시 '오셀로'가 선행되어야 한다. '오셀로'라는 중력에 이끌린 '이야고'가 그 주위를 달처럼 돌아야 한다. 움직이는 건 '이야고'지만 그 모든 힘은 '오셀로'에게서 나온다.

      이 희곡에서 오셀로는 '무어인'이다. '무어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흑인 피가 섞였다느니 그저 아랍인을 지칭하는 거라느니 다소 해석이 분분하긴 하지만  요점은 그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에서 '오셀로'는 꼭 백인이 아닌 무어인이어야 했을까? 무어인이 아니라고 해도 이 거짓과 질투와 치정의 이야기 진행에는 별 무리가 없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이야기 속에서 오셀로대한 인종차별적인 혐오 표현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소소하게 그의 피부색이나 출신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저 손에 꼽을 정도일 뿐이고 그 수위도 미미하다. 무엇보다 그는 명망 높고 존경받는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명문가의 딸인 데스데모나와 결혼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그가 왜  굳이  '무어인'이어야만 했을까. 

       등장인물 중에 오셀로의 피부색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건 바로 오셀로 자신이다. 그리고 그는  데스데모나의 하얀 피부에 대해서도 여러 번 언급한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을 적나라하게 대비하면서 동질성보다 차이에 몰입한다. 그건 바로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오셀로 본인 스스로가  무어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무어인으로 보지 않을 때조차, 모두가 존경과 사랑을 바칠 때조차, 그는 여전히 무어인이기 때문이다. 무어인을 죽이는 무어인.  검고 더러운 피부를 가진 이방인. 누구보다 열성적인 인종차별주의자. 절대 행복해질 없는 인간. 그가 바로 오셀로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로 그녀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건 물론 그저 문학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인한 남자를 오히려 아이처럼 애틋하게 품어주는 여인의 사랑이나, 남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연민에 대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온갖 역경을 이기고 장군의 자리까지 오른 이 대단한 남자의 숨겨져 있는 나약함인지도 모른다. 7살 때부터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 오셀로의 영혼은 끊임없이 그것을 호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 오직 단 두 사람만 빼고는 말이다. 

     데스데모나가 그런 '오셀로'에게 사랑에 빠졌듯, 이야고 역시 그런 '오셀로'에게 사랑에 빠진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희곡에서 이야고는 수없이 오셀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보통 가증스러운 거짓말로 해석되지만 나는 그것이야 말로 이야고의 유일한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은 성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원한 심연을 뛰어넘어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향한 끝없는 관심과 열정.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것의 표현은 애착이 수도 있고 증오가 수도 있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지 다. '오셀로'가 '오셀로'가 되고 '이야고'가 '이야고'가 되고 '데스데모나'가 '데스데모나'가 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데스데모나의 사랑만큼이나 이야고의 사랑 역시 진실되고 강렬한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무모한 악행을 감행했던 이야고의 사랑이 과연 데스데모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뒤쳐진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사랑만큼이나 그런 이야고의 사랑 역시 갈구하고 기꺼워한다. 그리하여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에게 빠졌던 것만큼이나 이야고에게도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데스데모나가 바람을 피웠다고 비난하던 오셀로는 실은 자신이 이야고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오셀로는 행복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할 때, 가장 행복의 정점에서, 그는 현기증과 멀미를 느끼며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이야고는 단지 핑계일 뿐이다. 이야고는 그저 오셀로의 공범이거나 오히려 그저 이용당한 것에 가깝다. 어쩌면 이야고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오셀로 자신이 머릿속에서 창조해 낸 인물인지도 모른다. 다시 불행해지기 위해서. 왜냐고? 글쎄, 이야고의 악의에 아무런 동기도 없었던 것처럼 오셀로의 타락에도 아무런 동기가 없다. 그저 그러고 싶었던 것뿐. 그저 편해지고 싶었던 것뿐. 낯선 행복이 아니라 익숙한 불행에서만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던 것뿐. 행복은 오히려 그에게는 저주이자 조롱이자 위협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주저하며 이야고에게 끌려가는 듯 하지만 곧 오셀로는 이야고를 앞질러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가속도를 올리며 결국에는 이야고까지 따돌려 버린다. 마지막에 데스데모나까지 따돌려버린 것처럼. 그리하여 결국 그는 홀로 남고 홀로 죽는다. 그 순간 그는 드디어 안심했을 것이다. 이것만이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결말이기 때문이다. 아,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고전 희곡을 연극으로 만들 때는 아예 고전에 충실하거나 완전히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게 안전하다. 그런데 그 중간 어딘가를 선택하게 될 때 참으로 어정쩡한 공연이 되고 만다. 그중에 제일 나쁜 것은 관객이 불멸의 고전을 지루해할까봐 염려한 나머지 본전 생각을 못하도록 얕은 개그를 쉴 새 없이 남발함으로써 고전의 고전미까지 망쳐버리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 '오셀로' 공연은 고전에 충실한 편이어서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야고' 배우의 연기력과 재간이  적당한 웃음과 활력을 유지해 주어서 지루함도 덜었던 듯싶다. 사실 '이야고' 배우가 열일을 했던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앞에서 말했듯 애초에 이 희곡 자체가 어정쩡하다 보니 고전에 충실한 공연 역시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를 탓해야 할지 연극을 탓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이런 경우 역시 돌아가신 대 문호 셰익스피어보다는 연극을 탓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다. 우선 '오셀로'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과 표현이 좀 애매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어서 신선함도 깊이도 없었다. 무엇보다 감정 표현에 있어서 비극의 신파에 젖지 않고 현대적이고 세련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 듯하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조차 냉담함과 활력을 잃지 않는 오셀로를 보면서 오히려 관객석에서는 타이밍에 맞지 않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구질구질해져야 한다면  구질구질해져야 하는 것이다. 특별한 대안이나 해석도 없이 그저 멀쩡한 척하려고 하니 대체 이 공연을 왜 하는 것인지조차 무색해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데스데모나'에게서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피해자 중에 피해자인 순결한 데스데모나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조차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으니 대체 관객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30분만 더 달라며 목숨을 구걸할 때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의연하고 산뜻해서 아연하기까지 했다.

    나는 연극=소극장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극장 이상만 돼도 벌써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단점들은 어쩌면 이 연극 자체의 문제보다는 장소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큰 무대에서는 표정이나 연기의 섬세함 보다 스케일과 전체적인 구도가 더 중요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층고가 높은 이 무대를 몇 번이나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소극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대함이었다. 마치 거대한 우물에 갇힌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곳에서 나가기 위해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갔지만 다시 좁은 무대 위로 돌아오고 또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연극이었지만 이 무대에 어울리는 장대한 마무리가 좀 아쉬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세자매 죽음의 파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