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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07. 2023

[연극] 세자매 죽음의 파티





연극 : 세자매 죽음의 파티

공연장소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공연기간 : 2023년 4월 21일 ~ 2023년 5월 21일

관람시간 : 2023년 5월 6일 오후 2시




     이 연극을 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수많은 장벽을 넘어야만 했다. 중간에 포기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일단 이 연극은 얼마 전 내가 혹평했던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와 같은 연출가에 같은 극단의 작품이었다. 과연 이번에는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크게 기대가 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같은 연출가와 극단의 작품인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는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 이제 1대 1 동점인 상황이니 한 번 더 시도해 보자. 최소한 이번에는 같은 배우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마음을 먹고 티켓 가격을 봤을 때 나는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티켓 가격이 무려 6만 원이었다. 소극장 연극 공연에서 6만 원이라는 티켓 가격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 정도 가격은 중극장 이상에서 누구나 알만한 드라마 배우나 영화배우가 무대에 올라야만 가능한 법이다. 나는 이쯤에서 가뿐하게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6만 원어치만큼 기대가 되는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내 페이지를 살펴보니 예전 이 극단의 연극 티켓을 소지하고 있는 관객에게는 30%  세일을 해준다는 게 아닌가. 내가 비록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에 대해 안 좋은 평가를 내리긴 했지만 여기서 이렇게 도움을 받는구나 싶어 기쁜 마음에 얼른 보관하고 있던 티켓을 뒤져 보았다. 그런데 티켓이 없었다. 나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티켓을 잘 챙겨놓는 편인데 이 티켓만 없었다. 무려 18000원이나 할인을 받을 수 있는 티켓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서 이 연극에 대한 내 관람 의지는 확실히 꺾이고 말았다. 나는 가열차게 다른 연극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고 또 찾아봐도 볼만한 연극이 없었다. 심지어 다음 주, 다다음주까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2번이나 결제와 취소를 반복하며 갈등한 끝에 나는 이 연극을 보러 가게 되었다. 만약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이건 대단한 모험담이 되었을 테지만 결국 그렇지 못했다는 걸 미리 밝혀둔다. 그리고 이 연극에 대한 나의 분노는 이 모든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것에 대한 분노, 특히 18000원어치의 분노가 더해진 것임도 첨부하겠다.

    극장에 들어서면 붉은색 벽이 3면을 이루고 있는 무대와 만나게 된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가지가 잘려나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나무가 담겨 있는 커다란  화분이 놓여 있고, 그 화분 주위로 이리저리 놓여있는 10개의 붉은색 의자들, 그리고 무대 앞 쪽에 펼쳐져 있는 붉은색 천 위에는 산산조각 난 세 개의 화분과 뿌리까지 뽑혀 말라죽은 세 그루의 나무가 놓여있다. 이 무대만 봐도 아, 뭔가 과장되고 과도한 무언가가 한바탕 펼쳐지겠구나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좋던 나쁘던 과욕을 탓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약간의 불길한 예감,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나는 딱히 시작부터  어떤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을 밝혀두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 이 연극은 거의 참사 수준이었다. 어느 정도 참사였냐 하면 연극이 끝난 뒤 나는 박수를 칠 여유조차 없었다.

     이런 참사는 아마추어들이 제작하거나 학생들끼리 만드는 연극에서 일어날 만한 일이다. 작가도 연출가도 없이, 말하자면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작가이자 연출가가 될 때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마구 쏟아낸 정제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빠짐없이 한 연극 안에 욱여넣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컨트롤 타워도, 어떤 선택과 집중도 없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수준 미달의 아이디어조차 견제되거나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무대 위로 올려지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 나름의 풋풋한 맛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관객의 응원과 박수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전문가들의 공연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건 또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전문가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참사가 난다면 그것은  '작가'의 부재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연극인들 사이에서 작가라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풍토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한 젊은 연출가가 자신이 공모전에서 상 받은 작가의 글로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순전히 지원금을 타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밝히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같이 일해 보면 작가라는 사람들의 연극에 대한 이해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무슨 대단한 작가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은 세서 수정해 달라는 요구를 번번이 거절한다면서  자기가 써도 그것보다는 잘 쓸 수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댔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 사실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작가들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높은 혹은 연극에 대한 이해만 너무나 높은 사람들끼리 연극을 만들 때 이런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연극계 전반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 아닌가 싶다. 작가 없는 연극들의 전성시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연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부분이 아니다. 이 연극의 진짜 문제는 정신의 고루함에 있다. 메시지가 진부하다 못해 구질구질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로서의 연극은 죽었다'라고 대놓고 선언하면서 그 절정에 이른다. 별안간 예술로서의 연극이 어쩌고, 진실한 연극이 어쩌고 하며 관객을 상대로 불만과 훈계를 늘어놓아서 관객을 아연하게 한다. 마치 쌍팔년도 예술 대학 학과에서 깔깔이를 입은 시꺼먼 복학생들이 새내기 신입생들을 집합시켜 놓고 술주정으로 할 법한 이야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대 위에서 웅변되는 것이다. 스스로 예술 연극을 보여주면 될 것을 관객들을 모아놓고 세상 탓 예술 탓 신세한탄이나 구구절절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모두 알다시피 일기는 일기장에 써야 하고 술 먹고 새벽에 쓴 일기는 다음날 태워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 일기장을 가지고 연극을 만들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 연극에 대해 더 길게 늘어놓지는 않겠다. 좋은 점 나쁜 점을 따지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다. 다만 나는 이 연극을 보는 내내 마치 대놓고 바보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상당한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수준 높은 네가 예술이라고 약을 팔면 수준 낮은 내가 당연히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줄 아셨나요. 조잡한 물건을 강매하면서 내 면전에 대고 이건 예술이야 예술이야 예술이야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니 실제로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나는 예술 작품, 영화, 연극 공연에 대해 별점이나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연극에도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건 아니다.  

    이 연극과는 상관없이 체홉의 '세 자매'에 대한 단상을 첨부하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부터 내리막길로 내려가게 되는 걸까. 언제부터 생명의 기운과 삶에 대한 야망이 사그라지기 시작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모가 죽었을 때부터인 것 같다. 부모를 사랑했던지 사랑하지 않았던지 그건 아무 상관도 없다. 단순히 다음은 내 차례라는 불안감이나 유년시절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부정당해 버린 원인의 결과로써의 나 자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별안간 우리는 땅에서 뿌리가 뽑혀 메마른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기반과 믿음이 철저하게 파괴된다. 이제 우리는 고아이며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가족 구성원이 어른이 되어야 할 때, 그 가족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가정의 구조와 구도가  변하고, 가족 구성원이 빠져나가거나 새로운 외부인이 가족으로 편입되고, 서로 간의 갈등과 반목이 심화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어쨌든 잠재되어 있던 모든 불만과 불안이 쏟아져 나오고 평생을 알아온 서로가 -  여전히 서로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조차 - 너무나 낯설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사실을 부정하고 서로를 다시 부둥켜안으려고 애를 써도 이미 모든 것은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진짜 고아가, 그리고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손상은 결코 회복되지도 극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결핍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부모가 죽는 순간, 부모를 사랑했던지 사랑하지 않았던지 아무 상관없이, 우리 영혼의 반은 그들과 함께 죽는다. 우리는 나머지 반쪽만을 가지고 살아가며, 정작 우리의 죽음은 단지 우리의 반쪽의 죽음일 뿐이다. 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까?  우리가 죽으면 우리 영혼의 반쪽은 다시 우리의 나머지 반쪽을 만나게 될까? 모두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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