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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30. 2023

[연극] 시티즌 오브 헬




연극 : 시티즌 오브 헬

공연장소 : 대학로 자유극장

공연기간 : 2023년 4월 21일 ~ 2023년 5월 28일

관람시간 : 2023년 4월 29일 오후 3시




    보통 나는 연극을 예매할 때 크게 기대감을 갖지 않는 편이다. 보통 연극 10편을 보면 그중 하나 건질까 말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한 편을 건지기 위해 10편의 연극을 볼 가치가 있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왕복 4시간 거리의 극장으로 향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 연극은 다소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우선 제목부터 떡 하니 '지옥'을 표방하고 있는 데다가, 시놉시스의 내용도 마음에 들었고,  또 하나 '전박찬' 배우가 나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나 연극을 볼 때 배우, 연출가, 감독 등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좋으면 좋았구나 나쁘면 나빴구나 끄적끄적하고는 지나가면 싹 잊어버리기 일쑤다. 매번 작품 자체의 느낌에 기반해서 예매를 하다 보니 연출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전무하고, 단지 몇몇 배우만 겨우 인지하고 있는 편인데 전박찬 배우가 그중 하나다. 그것은 단지 어찌하다 보니 이 배우가 나오는 연극을 많이 보았다거나, 그가 어느 작품에서나 늘 분명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라거나, 또 내가 [에쿠우스]에서의 그의 연기를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이 배우의 형형한 눈빛과 선함도 악함도 똑같이 비웃어 주는 듯한 빈정거리는 표정을 좋아한다. 그 표정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극장을 방문할 의향이 있다. 그러나 이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문이 남곤 했는데,  내가 보았던 작품마다 연기 패턴이 비슷했던 대다가 다소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맡았던 역 자체가 차분하게 독백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경직은 의도된 설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소 연기력의 부족이었을 수도 있다. 과연 이 배우가 감정을 다채롭게 드러내고 자신을 통째로 내려놓아야 하는 역을 맡는다면 어떨지 늘 궁금했는데 나는 이번 연극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연극 자체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 연극은 내 기대 이상이면서 동시에 기대 이하였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정리하기가 조금 골치 아프다. 좋았던 부분만큼이나 싫었던 부분도 분명한데, 이렇게 이분법이 선명한 건 이 연극의 구조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실망이었던 부분부터 말하자면 일단 이런 종교적 은유 자체가 유행에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다. 한 마디로 촌스럽다는 얘기다. 신이니 악마니 하는 것 자체가 이제 닳고 닳아 고루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역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신과 악마 그 이상을 보아오지 않았나. 더 이상 신과 악마는 인간의 선과 악을 설명하지 못하며 더 이상 우리는 어떤 신이나 악마에게도 기도나 저주를 하지 않는다. 이제 신과 악마는 고차원적인 상징은 커녕 도식적인 우화나 풍자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그저 대중적이면서도 고전적인 향기를 슬쩍 가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사용될 뿐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이 소재를 다시 끌어내어 정면으로 다루어낸다. 그렇다면 여기에 새로운 해석이나 상상력이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저 과거의 진부한 일화들과 상징들을 채집하고 취합한 수준에 머무른다. 이 연극에 나오는 대사들은 하나하나 세심하게 선택되고 배열된 것이지만, 그것 또한 너무 지나친 나머지 문학적 풍부함을 잃었다. 그리하여 아동용 우화의 수준을 겨우 벗어난 정도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솔직히 이 연극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인간은 악하다는 거? 영원히 악했으며 영원히 악할 거라는 거? 너 자신을 알라? 아휴, 지루해라. 

   그러나 이 연극은 파다닥 튀어 오르는 전기처럼 관객을 감전시키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희곡 때문도 아니고 연출 때문도 아니다.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우'다. 연극이란 원래 배우의 공연이긴 하지만, 이 연극은 특히 그것에 온통 집중하고 있다. 대사도 내용도 의미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대사를 듣지 말고 배우의 말을 들어라. 내용을 알려고 하지 말고 배우의 얼굴을 보아라. 이야기를 내버려 두고 배우가 웃고 울게 해라. 배우가 신이 되게 하고 악마가 되게 하고 인간이 되게 해라. 무대만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은가. 무대 위에 다시 무대가 세워지는 그런 연극이 있는데 바로 이 연극이 그렇다.

    전박찬 배우는 이미 등장부터 분명한 인상을 남긴다.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은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내가 좋아하는 그 비틀린 표정도  연극 내내 실컷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말투나 행동은 경직되어 있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연극에서도 이것은 캐릭터 설정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설정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전박찬 배우에게 잘 어울린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역할은 악마다. 이 무대는 악마의 놀이터다. 그는 이 무대를 지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는 이 무대를 집어삼켜야 하고 자근자근 씹어서 다시 관객의 면전에 뱉어내야 한다. 등장인물들을 저글링처럼 돌리다가 어느새 관객 모두를 허공에서 돌려야 한다. 솔직히 그러기에는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말투나 행동이 다소 작위적이고 연극적이었는데, 그것이 '지옥이라는 무대 위의 악마라는 연기자' 설정이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이 남는다. 몇 천년을 살아온 연륜으로 인격과 비인격 사이를 자유자재로 능글능글하게 오가야 하는데 그 둘이 그만 흐지부지 섞여버린 채로 굳어져버린 느낌이다. 연기의 섬세함이 본래 이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섬세함을 아직 뛰어넘지 못하는 듯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이 배우에게 기대치가 높으며 그것도 상당히 높다는 걸 굳이 부연해 두겠다. 

     그런데 이 무대는 단지 악마를 위한 독무대는 아니다. 외면적으로 이 연극의 주인공은 악마인 듯 하지만 사실 신과 악마는 결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 왜냐하면 그들은 작가와 감독과 관객의 역할까지 겸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신과 악마는 어느새 미끄러지듯 슬며시 무대를 빠져나가고 만다. 우리는 이 무대의 진짜 주인공인, 연기 외에는 달리 할 게 없는 인간인,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본다. 처음에 이 '남자'와 '여자'는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저 비루하고 겁에 질려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모습일 뿐이다. 배우들 역시 딱 그런 정도의 느낌이다. 그러나 이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돌연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돌연 고개를 들고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돌연 옷을 벗어 안과 밖을 뒤집기 시작한다. 나는 선과 악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다. 배우와 연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남자' 역의 이기현 배우를 처음 본 듯한데, 어쩌면 전에도 보았지만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연극 초반에는 이 배우에게 그렇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정확하게 배우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또 변명하는 긴 독백의 장면에서 나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진정성이었다. 이것은 수없이 연극을 보면서도 굉장히 드문 경험이다. 우리는 배우가 하는 말이 배우의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배우가 하는 행동이 배우의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는 정해진 대로 대사를 읊고 정해진 대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매일 똑같이. 뻔하고 또 뻔뻔한 거짓말쟁이 같으니. 그런데 왜 때때로 배우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지는가. 대체 이 진정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진정성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진실을 말하기 위한 거짓말인가 거짓말을 말하기 위한 진실인가. 이것이 진정 연극의 악마적인 면인 것 같다. 배우야 말로 진정 악마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날 나에게 있어서 이 무대의 악마는 이기현 배우였다. 

    '여자' 역의 강해진 배우의 연기 역시 좋았다. 사실 더할 나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희곡 자체가 '여자' 역할의 배우에게 다른 두 배우만큼의 충분한 무대를 마련해주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여자'는 자신만의 독백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자신만의 특별한 에피소드 역시 갖지 못했다. 여자가 취조실에 불려 갔던 이야기는 이미 '남자'의 이야기의 재탕처럼 여겨져서 김이 세어버렸으며, 그렇다고 연극 전반에 딱히 여성적인 어떤 역할과 특성이 가미되지도  않았다.  '여자'는 두 '남자' 사이에서 애매하게 겉돌게 되는 데 마지막에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라며 후계자 대우 해주는 악마의 립 서비스로도 도무지 상쇄가 되지 않는다. 왜 충분히 흥미와 논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여자'를 이렇게  등한시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마지막에 '여자'를 위한 판을 한 번 제대로 깔아주었더라면 이 연극의 재미와 완성도는 몰라보게 높아졌을 것이다. 단언컨대 진짜 악마라면  '여자'를 이렇게 홀대했을 리가 없다. 오래전  악마가 '이브'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겼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나.  악마가 건네주고 '이브'가 움켜쥐었던 것은 사과가 아니라 바로 역할이었다. '이브'는 기꺼이 악역을 맡음으로써 연기자인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의 무궁무진한 자질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악마답지 않은 일이다. 결국 애매하고 익숙한 허탈함만 남기고 말았다. 

     이쯤에서 내용을 들여다보면,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 연극의 악마는 상당히 전형적이다. 다만 기존의 악마의 특성들이 효과적으로 정리되어 있긴 하다. 우선 악마는 언제나 무단침입하는 법이 없다. 악마는 언제나 큰 소리로 노크를 함으로써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린다. 그 노크 소리를 들은 자만이, 아니, 그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만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악마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던 자만이 문을 열어준다. 그렇게 스스로 악마를 집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초대가 아닐까? 악마는 집들이 선물로 짙은 심연의 어둠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잠깐. 그동안 문학과 예술에서 악마를 어둠으로 표현함으로써 뿌리 깊은 오해가 만들어졌다는 걸 지적해야겠다. 우리는 악마가 원래 '빛의 천사'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악마가 집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건 사실 어둠이 아니다. 오히려 빛이다. 단 하나의 그림자도 남겨놓지 않는 환한 빛이다. 그 무엇도 숨길 수 없고, 그 무엇도 그냥 모른 척 넘길 수 없는 적나라한 빛이다. 그것은 너무 밝아서 거의 비인간적이다. 그것이 악마가 아담과 이브에게 한 짓이다. 안전한 신의 그늘 속에 있던 그들에게 빛을 비춘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과 이브는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이 세상에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삶과 죽음의 운명 또한 알았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단지 거짓말을 까발릴 뿐이다. 그렇게 악마는 인간을 망가뜨린다.  

     이 무대 위에서도 악마는 몇 번이나 항변한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나는 모함을 하지 않아. 나는 악을 만들지 않아. 모두 사실이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악마는 왜 모든 걸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걸까. 왜 인간이 서로의  악을 모른 척 한 채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놔두지 않는 걸까?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소박한 희망을 왜 미리 짓밟아버리는가? 악마는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제발 어른다워지라고.  '주의 어린양'인 우리에게서 악마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주'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 '어린'인 모양이다. 신은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우리가 어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치마폭 속에 우리를 싸고돌면서 다 큰 자식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내려치다가도 커다란 젖가슴을 내밀며 만지라고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몸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영혼은 어린이인 기형이 되고 말았다. 떡 벌어진 어깨로 온갖 음행과 죄악을 저지르다가도 돌연 겁에 질려 주저앉아 아버지를 부르며 울음을 터트린다. 신에게 매달려 온갖 아부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칭얼대는 것이다.  내가 악마라도 짜증 나겠네. 악마는 말한다. "우리 어른답게 대화 좀 해요. 차분하게 앉아서. 어린애처럼 돌아다니며 소리 지르지 말고." 그러나 우린 그럴 수 없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차분해져야 한다. 차분해지면 서로 대화해야 한다. 대화하면 우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그 외에는 우리의 죄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의 마지막에 악마는 신의 영생과는 다른 영생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멈추지 말고 계속 죄를 낳으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마지막까지 악마가 '여자'를 남겨놓은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악을 출산하기 위하여. 그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얼렁뚱땅 얼버무려서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가 낳은 우리의 악은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남겨 놓은 악을 통해 계속 이 땅으로 돌아와 부활할 것이다. 우리의 계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진보할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악마와 싸우고, 경쟁하고, 어울려 놀면서 결코 늙지 않는 악마의 노후를 보장해 줄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부질없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세상이라는 이 지옥의 테마파크를 최대한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핑계도, 변명도, 원망도 하지 않는 진짜 어른들만이 이 테마파크에서 진정으로 놀아재낄 수 있다. 우리의 악마는 그런 친구들을 원하고 있다. 우리 역시 그런 친구들을 원하고 있다. 무대라는 지옥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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