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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02. 2023

[연극] 포쉬




연극 : 포쉬

공연장소 : 예스24스테이지 3관

공연기간 : 2023년 3월 9일 ~ 2023년 5월 21일

관람시간 : 2023년 4월 1일 오후 3시




   사실 이 연극을 예매하면서 상당히 망설였다. 이 연극의 안내 페이지에 있는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 때문이었다. '옥스퍼드 상위 1% 엘리트들의 추악한 일탈' '난봉에 가까운 그들만의 파괴적인 파티 문화와 상류층의 허위와 거칠고 천박한 의식 세계를 거침없이 풍자한다' 등등.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갈 듯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이 연극을 봐야 하는 걸까? 상류층이 아닌 우리는 모두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가? 그저 상류층의 삶에 대한 서민의 질투 어린 호기심을 위해? 서민만을 상대하는 데 질려버린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상류층을 마음껏 까고 비난하기 위해?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취미가 없다. 그러나 마침 보고 싶은 다른 연극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어쩔 수 없이 이 연극을 예매했다.  

    일단 생각보다 극장에 관객이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중앙의 좌석들도 많이 비어있었다. 그런데 왜 예매할 때는 중앙의 좌석들을 아예 선택할 수 없게 해 놓았는지 의아했다. 중앙 좌석들이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석진 자리에서 연극을 관람해야 한다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무대 위에는 테이블 세 개가 가로로 나란히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뒤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단번에 '최후의 만찬'이 떠올라서 나는 재빨리 의자들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10개. 결론적으로 연극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이 걸맞기는 했다. 결국 아수라장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까. 그런데 연극이 시작된 후, 나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 다소 애를 먹었다. 특히 배경 음악이 함께 나올 때는 거의 대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내 자리가 구석 쪽이라 스피커에 가까웠기 때문에 더 심했을 것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점점 배우들의 목소리들이 커졌기 때문에 나아지긴 했지만 그 때문에 공연 내내 다소 신경이 곤두섰다.

    여기까지 내 불만은 다 얘기한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극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연극은 '옥스퍼드 상위 1% 엘리트들의 추악한 일탈' '난봉에 가까운 그들만의 파괴적인 파티 문화와 상류층의 허위와 거칠고 천박한 의식 세계를 거침없이 풍자한다'라고 했던 자신의 설명에 지극히 충실했다. 어쩌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상류층 자제들에게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박아주고 마무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연극에 조금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타자인 그들을 조금쯤 내면화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그저 스트립쇼에 불과할 테고 관객 역시 그저 관음증 환자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우선 이 연극은 어마무시하게 마초적이다. 마초적인 기운이 넘쳐난다. 더 이상 주변에서 진정한 마초맨들을 볼 수 없는 오늘날 그것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건 마초적인 남자들만이 아니다. 연극도, 영화도, 음악도 상당히 여성향화 되어 있다. 단순히 문화 소비자가 여성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인류 전체가 여성적으로 변화하는 건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문화의 진화 과정인지, 아니면 민주주의가 고착되어서인지, 아니면 페미니즘의 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와중에 이 연극의  힘과 가증과 무식과 성적 에너지가 마구  발기하는 마초적인 기운이 나를 유쾌하게 했다. 좋게 말하자면 내숭과 섬세함과 부드러운 내면 따위는 없는 속도감이라고 해도 좋겠다.  우리는 이제 그만 대화하고 싶다. 그만 타협하고 싶다. 그만 설득하고 싶다. 강한 자에게 마음껏 조아리고 약한 자를 마음껏 짓밟고 싶다. 우리의 내면에는 아직도 여전히 마초성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우선 우리는 이 연극에 나오는 저 부유하고 저질스럽고 자아과잉에 오만하고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는 상류층 청년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있다. 어, 왜 얼굴을 찡그리지? 거부감이 드는가? 억울한가? 화가 치밀어 오르나? 심지어 연쇄 살인자에게도 감정을 이입하는 데 익숙한 우리가 아닌가? 단순히 극 중 인물에게조차 감정 이입을 거부할 정도로 상류층 자제들에 대한 우리의 혐오감은 짙다. 그러나 문제는, 감히 말하건대, 그들도 그저 평범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미숙하고, 잘하고 싶고, 잘하기 위해 애쓰는 평범한 젊은이들. 물론 그들은 결국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거의 괴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그들은 그 문턱 앞에 와있고, 그 문턱을 넘어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이 '라이엇 클럽'이 필요한 이유다. 평범한 아이들을 비범하게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 그들의 타락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 타락은 비범해지기 위한 또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솔직히 그들이 부잣집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건 죄가 아니다. 그들 자신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태생은 바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한다. 아니, 우리는 이미 존재가 규정된 채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 결코 다른 누구도 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저주이다. 그 저주는 우리의 성과 이름에 아로새겨지고,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되거나 혹은 그 이름에서 도망가려 함으로써 그 저주를 실현한다. 이 상류층 청년들도 이 저주에 걸린 것뿐이다. 그들도 이미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인 것뿐이다. 그들도 그런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들도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진정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은 것뿐이다. 그들도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들도 잘해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 역시 이런 시절을 겪어서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그들의 특혜와 특권에도 불구하고 - 우리만큼이나 - 그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우리에게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아이들은 반문할 것이다. 그럼 민주주의 시대에 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이 연극은 영국의 특수한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나라. 영국에는 지금도 여전히 왕과 여왕이 누군가에게 작위를 내려 귀족 사회를 보강하고, 지금도 여전히 가문이 사회적 성공을 좌우하고, 지금도 여전히 귀족의 자제들만이 갈 수 있는 사립학교가 - 버젓이 - 있다. 나는 언제나 영국이라는 사회가 어떻게 이 양분된 가치를 지탱하고 있는지 의아했고, 분명 그것은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들에게 병적인 혼란을 야기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평등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다. 증오는 공적으로 공공연히 고착된다.

     우리는 이 청년들이 자신들만의 '클럽'을 만들어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를 생각할 때 과연 그 비난이 온전히 정당한 것일까? 그들도 고통과 슬픔을 아는 인간이고 그들에게도 이해와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지 숙고해 볼 만한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고통과 슬픔을 느낄 자격조차 없으며, 그들에게 이해와 위로는 과분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들의 내면 자체를, 나아가 영혼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어 한다. 오히려 인간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략은 일면 성공적이다. 그들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괴물이 된다.   

    상류층 아이들은 이미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워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아차린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와 특혜만큼이나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과연 증오는 어느 쪽에서 먼저 시작되는가. 나는 결코 그들을 옹호하거나, 그들의 죄를 희석하거나, 그들을 되려 피해자로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비난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하고 뻔한 일이어서 여기에 늘어놓을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그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물론 우리로서는 저들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저들이 가해자이고 우리는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대대손손 그들은 모든 걸 누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맞다. 그것은 정당하다. 그들은 영원히 고통받아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개새끼들이니까. 그리고 그들 자신도 - 설사 인정하지 않더라도 -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정말이지 마음 놓고 당당하게 그들에게 쌍욕을 날릴 수 있다. 상류층이 아닌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우리에게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주제와 입장은 다변화된다.  빈민층, 중산층, 종교, 국가, 인종, 성별, 젠더, 장애, 이민자 등등등등등등.... 우리는 이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상대를 - 이쪽이든 저쪽이든 -  비인간화시킬 수 있다. 그것도 언제나 매우 정당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집합과 교집합의 증식 속에서 우리가 계속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계속 정당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아이들은 어떨까? 어쩌면 우리도 우리만의 라이엇 클럽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원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소박하고 무해한, 그러나 끝없이 발기하는 '우리'라는 라이엇 클럽.  우리는 모두,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아, 민주주의는 지긋지긋해. 다수결의 논리는 멍청해. 도덕과 법은 지루하고 평범해. 이제 그만 대화하고 싶다. 그만 타협하고 싶다. 그만 설득하고 싶다. 강한 자에게 마음껏 조아리고 약한 자를 마음껏 짓밟고 싶다. 왜 안 되는 걸까? 나는 누구보다 중요하고 특별한 인간인데. 그리하여 선천적으로 민주주의자인 우리는 오늘도 마초맨이 되기를 남몰래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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