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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l 23. 2023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연극 :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공연기간 : 2023년 7월 22일 ~ 2023년 8월 6일

관람시간 : 2023년 7월 22일 오후 3시




     이 연극을 예매하면서 조금 걱정이 앞섰다. 진부한 윤리론 강의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해서였다. 나는 관객이 되고 싶은 것이지 학생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애초에 어떤 사안의 옳고 그르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홀로코스트에 무슨 이론과 논쟁의 여지가 있겠는가. 사실 나 개인적으로 꼽아보는 몇 가지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연극에서 그런 것까지 다룰 것 같지는 않았다.

    연극은 다행히 내 걱정만큼 윤리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론 여전히 뻔하게 윤리적이었고 무엇보다 결코 만족스러울 만큼 치열하지 않았다. 사실 이 연극은, 그리고 이 희곡은, 문학적이거나 연극적인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들 것 같다. 단지 양쪽의 입장이나 시점을 되도록 균형 있게 그리고 지나치게 교양 있게 정리해 놓은 정도라고 할까. 인문학 교양수업을 위해 잘 만든 교육용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 앞의 문장을 칭찬과 비난 두 가지 모두를 위해 공평하게 쓰고 있다. 하지만 만약 비난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면 아마도 그 느낌이 맞을 것이다. 이 연극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진 연극. 아, 그리고 상당히 대중적이고.

     내가 '대중적'이라고 얘기한 건  이 연극 스스로가 아이히만에게 동조하지 않기 위해, 또한 관객들이 아이히만에게 동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 뜨뜻미지근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홀로코스트를 설계한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상당히 논쟁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로 그의 '말'은 굉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윤리와 휴머니즘과 상식을 갈아버릴 만한 흡인력이다. 연극에서 그가 하는 대사는 사전에 상당히 신중하고 - 어쩌면 편파적으로 - 다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 연극은 내내 아이히만의 대사가 '연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뉘앙스를 조절하고, 강력한 단어를 삭제하고, 개인적이고 심리학적인 평가를 덧씌운다. 가장 뻔하고 뻔하게도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한다. 그것이 이 연극에서 한나 아렌트가 맡은 역할이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는 결코 그를 이기지 못한다. 그저 상황을 살짝 호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연극은 아이히만의 힘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애써 평가절하함으로써 결국 아이히만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패배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지만 이것은 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그리고 오직 '평범성'에 관한 문제다.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이히만은 악이란 없다고 정확히 지적했다. 이 연극은 이 말에 더 주목해야 했다. 이 말 속으로 온전히 파고들어야 했다. 우리가 악의 시작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악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이히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홀로코스트의 설계자로 -  여전히 숫자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직접적으로는 사람도 죽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죽은 동물만 봐도 구역질을 할 정도로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가 홀로코스트를 설계한 것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해서였으며 어차피 시행이 결정된 프로젝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조정한 것 뿐이었다. 어차피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을, 어차피 무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죽인 것 뿐. 

       아이히만은 만약 다른 곳에서 다른 지도자를 만났다면 꽤나 훌륭한 위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성실하고 헌신적이며 공익적인 인간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최대한 그 비극을 완화시키려고 애썼다고 토로한다. 그 위치에서, 그 역할에서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거나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도 그저 휩쓸려 들어간 것뿐이라고, 그래, 다만 열심히 휩쓸려 들어간 것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주 전체와 같고 거대한 기계와도 같은 이 가차 없는 역사의 흐름 속으로 말이다.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역시. 아무런 악의 없이. 한 명의 보잘것없는 인간으로서. 모두가 희생자일 뿐. 이것은 어쩌면 진심이고 또 어쩌면 진실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과연 역사에 대한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는가. 평범한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아이히만은 이렇게 항변한다. 누군가 자신에게 유대인을 죽여야 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그는 결코 유대인을 죽이는 걸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이미 유대인들은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그렇게 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에게 그것을 거부하거나 막았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일까. 그는 그저 성공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고, 가족들과 유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그 역시도 나름 생존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뿐인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독일인이라는 것이다. 

     가해자의 사정과 입장을 살펴보는 건 분명 부적절한 일이다. 감상적인 이유로 그의 죄에 동감하거나 그의 죄를 경감해 줄 위험이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떤 연쇄살인마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볼 때면, 강간과 학대와 냉대로 피폐해진 그들의 인생을 짚어볼 때면, 과연 그들이 정말 가해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연 그들의 살인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과연 그들이 저지른 '악'은 그들에게서 시작된 것일까? 물론 모든 강간 피해자가, 모든 아동학대 피해자가, 모든 소외된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말을 내뱉는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왜냐하면 절대 고려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1차 대전에 패배한 이후의 독일인이 겪었던 정신적 충격과 사회적 압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반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 슬픔. 그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이며 현실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독일인이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거부하고 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모든 독일인이 그러지는 못했다. 그리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모든 독일인이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중 많은 사람들은 독일인이 아니었다면, 혹은 그 시대의 독일인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에 결코 동조하거나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 시대의 독일인으로 거기에 있어야만 했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들의 환경, 조건, 결핍, 욕망, 꿈, 의지, 혼란, 무지, 고통, 소망, 나약함, 비겁함, 그래, 그 비겁함을 '악'이라는 기준 하나로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는 건물 옥상에서 히틀러에게 대항하는 전단지를 뿌리고 고문당해 죽은 '조피 숄'이라는 여성을 아이히만 면전에 들이댄다. 그리고 왜 당신은 그 여자처럼 되지 못했느냐고  아이히만을 다그친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그 비난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는 그녀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조피 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에게 용감하고 비범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가. 정의로운 일인가. 아니, 무엇보다, 가능한 일인가.

    자,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분명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만행을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약탈하고, 감금하고, 학대하고, 가스실로 몰아넣고, 죽이고, 불태우고, 껍질을 벗기고, 비누로 만들었다. 분명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나 기쁨은 조금도 없이 오직 명령에 충실했던 애국자들. 그것이 그들의 변명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그저 오직 히틀러 하나만 처형하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걸까. 아니, 심지어 히틀러에게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자신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래, 니 입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툭툭 털고 아무렇지 않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아이히만의 사형 여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사형을 선택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결정'이 아이히만이 했다는 '동조'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선뜻 자신이 없다.  그리고 내 손으로 그의 사형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도  나는 그에게 일종의 공감과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나 역시 누구보다 나약하고 평범하며 비겁한 인간이고, 무엇보다 나는 결코 아이히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히만의 죄는 단죄할 수 있지만 결코 아이히만을 단죄할 수는 없다. 아이히만을 단죄할 수 있는 건 오직 아이히만뿐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법정에서 천국에 갔을지 지옥에 갔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아이히만은 그를 사형에 처하는 우리의 입장과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 아렌트의 대사가 인상적이라 기억해 두었기 때문에 여기에 적어 본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모든 색깔이 사라지지. 그걸 눈으로 막을 수는 없단다. 그러니 어디서 어둠이 시작되는지도 볼 수 없지." 




추신 - 아이히만은 말했다. "10명의 의인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했다해도 그 10명의 의인은 권력자가 되어 모든 권력자들과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인 '힘'이라고. 그것은 모든 사람을 압도하며, 결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으며, 결국 역사가 된다고. 개개인이 그것을 따르든 거부하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저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뿐. 혹시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국 아이히만이 옳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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