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개 가라사대 (5)

by 곡도




2부


경쾌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들려온다. 무대 위의 방은 깨끗하고 화사하다. 1부에서의 늑대가 세련된 차림으로 방 한가운데 서 있다. (남자라면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넥타이, 딱 붙는 조끼 차림에 구두를 신고, 여자라면 치마든 바지든 상관없이 그에 상응하는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다.)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저의 주인님의 집이지만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개]입니다. 아하, 이렇게 빼입고 있으니 개처럼 보이지 않는다구요? 뭐, 저희 주인님 취미가 저를 예쁘게 꾸미는 거거든요. 털을 염색하기도 하고, 파마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괴상망측한 레이스 치마를 입힐 때도 있지요. 오늘이 그 날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런, 그래도 제가 여전히 [개]처럼 생각되지 않는다구요? 흠, 이를 어쩐다. (조끼 안쪽을 뒤지더니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를 꺼내 머리에 쓴다.) 아, 그럼 이게 여러분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어때요? 이제 제가 [개]처럼 보이시나요? (관객들의 대답을 듣는다.) 네에, 좋아요. 좋습니다. 여러분께 제 주인님도 소개해드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주인님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 늘 바빠요. 보통 낮에는 집을 비우죠. 돈이라는 걸 벌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제게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예쁘게 미용도 해주고, 좋은 옷도 사줄 수 있다구요. 다른 건 모르지만 전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니까, 돈이란 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이 어떻게 맛있는 음식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만 원짜리 몇 장을 먹어봤는데 별로 맛이 없었거든요. 뭐, 인간들에게는 인간들만의 사정이 있는 거겠죠. 저는 이 방안에서 하루 종일 주인님을 기다립니다. 방이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괜찮아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작은 방 안에서도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방을 둘러보며) 어디보자, 햇빛이 조금씩 지나가구요, 시시각각 그림자가 달라져요. 바깥에서는 때때로 음악 소리나 고함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아, 혹시 파리라도 한 마리 집안에 들어오면 그 날은 축제나 다름없지요. 아쉽게도 자주 들어오지는 않아요. 창문마다 모기장이 단단히 쳐져 있거든요. (마치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듯이) 파리가 들어오면 나는 바로 죽이지 않고 한참동안 구경을 합니다. 거칠 것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그 자유로운 비상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의 포물선은 정말이지 흥미롭습니다. (손으로 허공에 크게 무한대 기호(∞) 모양을 그린다.) 어쩌면 파리에게는 이 작은 방이 거대한 세계일지도 모르죠. 그럼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작은 파리에게도 이 작은 방은 그저 작은 방인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울적해지구요. 그러다가 그 끝없는 비행의 기하학적인 궤도가 지루해지면 전 슬쩍 파리를 잡아봅니다. 하지만 한두 번 정도는 그냥 놓아줍니다. 파리는 소중하니까요. 그래도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잡아먹고 말지요. 역시나 그 위이이잉 하는 날갯짓 소리가 참 거슬리거든요. 맛이요? 맛은 뭐랄까, (눈을 치켜뜨고 입을 쩝쩝거리며) 김에 싸먹는 땅콩 맛 같다고 할까요? 파리가 죽고 나면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집니다. 그럼 저는 파리를 죽인 걸 후회하곤 합니다. 저에게 그렇게 큰 기쁨을 줬는데 왜 저는 결국 망쳐버리고 마는 걸까요. 가능하다면 파리를 제 애완동물로 키우고 싶어요. 물론 도망가지 못하게 날개는 다 떼어버려야죠. 매일 먹을 것도 주고, 발도 닦아주고, 실에 매어서 산책도 시켜주고, 예뻐해 주고 싶어요. 주인님이 제게 해주시는 것처럼요. 그럼 하루가 정말 잘 갈 텐데요. 아, 이 방에서는 하루가 너무나 길어요. 얼마나 긴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개의 하루는 인간의 하루하고는 다르죠. 한 나절이 마치 한 시절 같은 느낌입니다. 저녁이 되면 아침보다 좀 더 늙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꽤나 늙어버리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개의 방-101호]는 무대 중앙에 있다. [개의 방] 조금 뒤 왼쪽 2m 높이 위로 [개2의 방-202호]가, 그리고 더 뒤에 [개의 방] 오른쪽 3m 높이 위로 [개3의 방-303호]가 있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있던 [개2의 방]과 [개3의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개2와 개3 모두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다.


아, 잠시만요.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나네요. 이렇게 소리가 잘 들리는 건 드문 일이에요. 저들과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우리의 대화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죠.


개2 (짖는다.)


개3 (짖는다.)


개2 이봐. 이봐. 거기 누구 있어?


(주변을 둘러보며) 어, 나, 나 말이야? 누구지?


개2 나는 202호에 사는 [개]야.


개3 (짖는다.) 어이, 나도 있어. 나는 303호에 사는 [개]야.


아아, 그래, 반가워. 나는 101호에 사는 [개]야.


개/개2/개3 (짖는다.)


개2 주인님이 창문을 열어놓고 나가서 다행이야. 이렇게 이웃들과 얘기도 나눌 수 있고 말이야.


개3 맞아. 늘 있는 일은 아니지. 보통 창문이란 창문은 꼭꼭 닫아놓고 나가거든.


개2 하는 수 없지. 주인님들은 하루 종일 집을 비워야 하니까. 대체 어디서 무슨 재미를 보고 있는 건지.


개3 뭐든지 할 수 있겠지. 저 바깥에서는.


개2 자신들이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도.


개3 우리 주인님은 저녁 5시는 돼야 돌아올 거야.


개2 우리 주인님은 빨라야 저녁 6시야. 가끔은 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술이 떡이 돼서 네 발로 기어들어오지.


개3 아, 그건 좀 봐줘야 돼. 인간들도 늘 직립보행 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까.


개2 그건 그래. 허세로 척추를 겨우 버티고 있는 거잖아. 좀 편해지면 좋을 텐데.


개3 101호는 어때? 주인님은 언제 돌아오셔?


글쎄. (침묵)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개2 돌아오지 않는다고?


개3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상상해본 적 없어? 어쩌면 주인님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개2 세상에. 그런 끔찍한 얘기는 하지도 마.


개3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데? 여기 갇혀서 굶어죽고 마는 건가?


개2 누군가는 오겠지, 안 그래? 어쨌든 부동산도 정리해야 하고, 재산 문제도 있을 테니까.


개3 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개2 새로운 주인님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이왕이면 고구마를 많이 주는 주인님이면 좋겠는데.


새로운 주인님이라고?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을 걸. 거리로 쫓겨나기 십상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보신탕집으로 끌려갈지도 몰라.


개3 보신탕? 그럴 리가 없어. 난 혈통이 훌륭한 개야. 그런 식용 개들하고는 출신성분부터가 다르단 말이야.


혈통? 출신성분?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우리의 주인님이 바로 우리의 혈통이고 출신성분이야. 주인님 없는 개는 그저 식용 개와 다를 바가 없단 말이야. 아니 더 나빠. 가격이 더 낮거든.


개3 가격이 더 낮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인님은 나를 100만원도 넘게 주고 사왔어.


개2 멍청하긴. 식용개는 근수로 가격을 매기는 거야. 네 근수를 달아봤자 5만원도 채 되지 않을 걸.


개3 5만원 이라고? 내가 목에 걸고 있는 이 이름표만 해도 5만원이 넘는데.


어차피 이름표도, 그 이름표에 새겨진 이름도, 주인님 없이는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개2 그럼 주인님 없이는 우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개]지.


개2/개3 (따라하며) 그러니까 우리가 [개]야.


개/개2/개3 (짖는다.)


개2 하지만 난 걱정 없어. 주인님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개3 맞아. 내 주인님도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시지.


개2 물론 나도 반드시 주인님을 기다릴 테고 말이야.


개3 나도, 나도 반드시 주인님을 기다릴 거야. 언제까지나.


우리가 기다리기 때문에 주인님은 돌아오는 걸까. 주인님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는 걸까.


개2 그 둘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난 전혀 모르겠는데.


개3 결국 주인님과 내가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그 다음은?


개2 주인님은 또 내 곁을 떠나겠지.


개3 우리는 또 주인님을 기다려야 하고.


반드시, 반드시 말이지.


개2/개3 (짖는다.)


개2 하지만 난 걱정 없어. 주인님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개3 맞아. 내 주인님도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시지.


개2 물론 나도 반드시 주인님을 기다릴 테고 말이야.


개3 나도, 나도 반드시…….


그만, 그만해. 똑같은 얘기는.


개2 하지만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은데 뭘.


개3 난 주인님을 기다리고, 주인님은 내게 돌아오고.


개2 나는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어.


개3 주인님이 내게 바라는 것도 그것뿐이지.


개2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개3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개2 그렇게 하루가 가는 거야.


개3 그렇게 한평생이 가는 거지.


만약 주인님이 돌아왔을 때 우리가 없다면 어떨까?


개2 우리가 없다니?


개3 우리가 어떻게 없을 수 있지?


간단해. 여기서 탈출하는 거야.


개2 (놀라며) 탈출?


개3 (놀라며) 탈출이라고?


이 집을 나가는 거지.


개2 나간다니, 어디로?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개2 왜에?


자유로워질 테니까.


개3 자-유?


개2 주인님으로부터?


개3 주인님의 [개]인 내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이 작은 방으로부터.


개2 자유. 자유라. 자유 좋지. 그런데 자유가 정확히 무슨 뜻이지?


개3 아, 내가 알아. 우리 주인님이 책상 위에 붙여놓고 매일 읊조리는 말이야. [자유. 남에게 구속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기.]


개2 하,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얘기 같네.


개3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설이 아니라 장소가 필요해. 진짜 장소.


개2 맞아. 먹을 게 있고 안전이 있는 곳.


개3 자동차들, 신발들, 먼지와 음악소리가 우글거리는 저 길거리에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난 벌써 구역질이 나.


그럼 너희는 이 작은 방이 좋다는 거야?


개3 솔직히 말할까? (작은 목소리로) 이건 감옥이야.


개2 그래. 하지만 갑옷이기도 하지.


감옥이면서 갑옷이라고? 누가 가두고 누가 공격하는 건데?


개3 이런, 넌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하구나.


개2 이건 생존의 문제라는 거야.


생존?


개3 말하자면, 이 작은 방이 우리의 삶의 형태야.


개2 말하자면, 이 작은 방이 우리의 삶의 크기지.


그래, 맞아. (방을 둘러보며) 그게 바로 우리가 선택한 것이었어.


개3 그랬나?


개2 우리가?


아주 오래 전에.


개2/개3 아주 오래 전?


모두 잠시 침묵한다.


개2 에이,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하자. 난 자유 따위는 필요 없어. 원하지도 않는 자유가 과연 자유일까?


개3 옳은 말이야. 주인님을 기다리는 게 내 행복인데 말이야. 아, 주인님은 언제 오시려나. 우리 주인님은 대문을 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 이렇게 외치지. (호들갑을 떨며) 아이구, 우리 막둥아, 나 왔다. 아이구, 하루 종일 심심했지. 아이구, 심심했쪄요. 아이구. 어째스까. 우리 새끼. 아이구, 서러워. 서러웠지요, 그랬지요. 그래요, 우리 애기. 아이구. 아이구.


개3 내 주인님은 집에 돌아오면 이렇게 말해. 왈, 왈왈왈, 왈왈, 왈왈왈왈, 왈 왈 왈왈왈.


개2 그러니까, 집에 네 발로 기어들어올 때 말이야?


개3 아니, 맨 정신에도 그러던데.


왈, 왈왈왈, 왈왈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개3 내가 어떻게 알겠어. 주인님은 이렇게 개소리를 하면 내가 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나봐.


개2 거기 101호 주인님은 집에 돌아오면 뭐라고 해?


우리 주인님은 딱 한마디만 해.


개3 뭐라고 하는데?


사랑해.


개2 아, 그 말, 나도 알아. 우리 주인님은 말끝마다 해주는 걸. 밥 먹자, 사랑해. 목욕 하자, 사랑해. 이제 그만 자자, 사랑해.


개3 우리 주인님은 내가 아플 때만 해 줘. 아니면 자기가 아플 때나.


그런데 주인님이 날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개2 사랑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모르겠어.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아.


개3 다른 뜻이라니?


때때로 주인님은 그 말로 나를 중독 시키려는 것 같거든.


개2 중독?


주인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말이야.


개3 아, 그건 네 짐작이 맞는지도 몰라.


개2 주인님들은 모두가 좀 지독한데가 있지.


개3 우리를 자기 옆에 영원히 가둬두고 싶어 해.


개2 보이지 않는 올가미로 목을 묶어서 말이야.


개3 때로는 진짜 올가미를 쓰기도 하지.


개2 올가미 손잡이를 있는 힘껏 꽉 쥐고서.


개3 하지만 괜찮아. 나도 주인님을 사랑하니까.


개2 맞아. 나도 주인님을 사랑해.


(침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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