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경쾌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들려온다. 무대 위의 방은 깨끗하고 화사하다. 1부에서의 늑대가 세련된 차림으로 방 한가운데 서 있다. (남자라면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넥타이, 딱 붙는 조끼 차림에 구두를 신고, 여자라면 치마든 바지든 상관없이 그에 상응하는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다.)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저의 주인님의 집이지만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개]입니다. 아하, 이렇게 빼입고 있으니 개처럼 보이지 않는다구요? 뭐, 저희 주인님 취미가 저를 예쁘게 꾸미는 거거든요. 털을 염색하기도 하고, 파마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괴상망측한 레이스 치마를 입힐 때도 있지요. 오늘이 그 날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런, 그래도 제가 여전히 [개]처럼 생각되지 않는다구요? 흠, 이를 어쩐다. (조끼 안쪽을 뒤지더니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를 꺼내 머리에 쓴다.) 아, 그럼 이게 여러분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어때요? 이제 제가 [개]처럼 보이시나요? (관객들의 대답을 듣는다.) 네에, 좋아요. 좋습니다. 여러분께 제 주인님도 소개해드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주인님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 늘 바빠요. 보통 낮에는 집을 비우죠. 돈이라는 걸 벌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제게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예쁘게 미용도 해주고, 좋은 옷도 사줄 수 있다구요. 다른 건 모르지만 전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니까, 돈이란 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이 어떻게 맛있는 음식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만 원짜리 몇 장을 먹어봤는데 별로 맛이 없었거든요. 뭐, 인간들에게는 인간들만의 사정이 있는 거겠죠. 저는 이 방안에서 하루 종일 주인님을 기다립니다. 방이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괜찮아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작은 방 안에서도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방을 둘러보며) 어디보자, 햇빛이 조금씩 지나가구요, 시시각각 그림자가 달라져요. 바깥에서는 때때로 음악 소리나 고함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아, 혹시 파리라도 한 마리 집안에 들어오면 그 날은 축제나 다름없지요. 아쉽게도 자주 들어오지는 않아요. 창문마다 모기장이 단단히 쳐져 있거든요. (마치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듯이) 파리가 들어오면 나는 바로 죽이지 않고 한참동안 구경을 합니다. 거칠 것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그 자유로운 비상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의 포물선은 정말이지 흥미롭습니다. (손으로 허공에 크게 무한대 기호(∞) 모양을 그린다.) 어쩌면 파리에게는 이 작은 방이 거대한 세계일지도 모르죠. 그럼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작은 파리에게도 이 작은 방은 그저 작은 방인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울적해지구요. 그러다가 그 끝없는 비행의 기하학적인 궤도가 지루해지면 전 슬쩍 파리를 잡아봅니다. 하지만 한두 번 정도는 그냥 놓아줍니다. 파리는 소중하니까요. 그래도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잡아먹고 말지요. 역시나 그 위이이잉 하는 날갯짓 소리가 참 거슬리거든요. 맛이요? 맛은 뭐랄까, (눈을 치켜뜨고 입을 쩝쩝거리며) 김에 싸먹는 땅콩 맛 같다고 할까요? 파리가 죽고 나면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집니다. 그럼 저는 파리를 죽인 걸 후회하곤 합니다. 저에게 그렇게 큰 기쁨을 줬는데 왜 저는 결국 망쳐버리고 마는 걸까요. 가능하다면 파리를 제 애완동물로 키우고 싶어요. 물론 도망가지 못하게 날개는 다 떼어버려야죠. 매일 먹을 것도 주고, 발도 닦아주고, 실에 매어서 산책도 시켜주고, 예뻐해 주고 싶어요. 주인님이 제게 해주시는 것처럼요. 그럼 하루가 정말 잘 갈 텐데요. 아, 이 방에서는 하루가 너무나 길어요. 얼마나 긴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개의 하루는 인간의 하루하고는 다르죠. 한 나절이 마치 한 시절 같은 느낌입니다. 저녁이 되면 아침보다 좀 더 늙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꽤나 늙어버리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개의 방-101호]는 무대 중앙에 있다. [개의 방] 조금 뒤 왼쪽 2m 높이 위로 [개2의 방-202호]가, 그리고 더 뒤에 [개의 방] 오른쪽 3m 높이 위로 [개3의 방-303호]가 있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있던 [개2의 방]과 [개3의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개2와 개3 모두 강아지 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다.
개 아, 잠시만요.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나네요. 이렇게 소리가 잘 들리는 건 드문 일이에요. 저들과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우리의 대화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죠.
개2 (짖는다.)
개3 (짖는다.)
개2 이봐. 이봐. 거기 누구 있어?
개 (주변을 둘러보며) 어, 나, 나 말이야? 누구지?
개2 나는 202호에 사는 [개]야.
개3 (짖는다.) 어이, 나도 있어. 나는 303호에 사는 [개]야.
개 아아, 그래, 반가워. 나는 101호에 사는 [개]야.
개/개2/개3 (짖는다.)
개2 주인님이 창문을 열어놓고 나가서 다행이야. 이렇게 이웃들과 얘기도 나눌 수 있고 말이야.
개3 맞아. 늘 있는 일은 아니지. 보통 창문이란 창문은 꼭꼭 닫아놓고 나가거든.
개2 하는 수 없지. 주인님들은 하루 종일 집을 비워야 하니까. 대체 어디서 무슨 재미를 보고 있는 건지.
개3 뭐든지 할 수 있겠지. 저 바깥에서는.
개2 자신들이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도.
개3 우리 주인님은 저녁 5시는 돼야 돌아올 거야.
개2 우리 주인님은 빨라야 저녁 6시야. 가끔은 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술이 떡이 돼서 네 발로 기어들어오지.
개3 아, 그건 좀 봐줘야 돼. 인간들도 늘 직립보행 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까.
개2 그건 그래. 허세로 척추를 겨우 버티고 있는 거잖아. 좀 편해지면 좋을 텐데.
개3 101호는 어때? 주인님은 언제 돌아오셔?
개 글쎄. (침묵)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개2 돌아오지 않는다고?
개3 그럴 리가 있나.
개 그런 상상해본 적 없어? 어쩌면 주인님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개2 세상에. 그런 끔찍한 얘기는 하지도 마.
개3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데? 여기 갇혀서 굶어죽고 마는 건가?
개2 누군가는 오겠지, 안 그래? 어쨌든 부동산도 정리해야 하고, 재산 문제도 있을 테니까.
개3 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개2 새로운 주인님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이왕이면 고구마를 많이 주는 주인님이면 좋겠는데.
개 새로운 주인님이라고?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을 걸. 거리로 쫓겨나기 십상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보신탕집으로 끌려갈지도 몰라.
개3 보신탕? 그럴 리가 없어. 난 혈통이 훌륭한 개야. 그런 식용 개들하고는 출신성분부터가 다르단 말이야.
개 혈통? 출신성분?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우리의 주인님이 바로 우리의 혈통이고 출신성분이야. 주인님 없는 개는 그저 식용 개와 다를 바가 없단 말이야. 아니 더 나빠. 가격이 더 낮거든.
개3 가격이 더 낮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인님은 나를 100만원도 넘게 주고 사왔어.
개2 멍청하긴. 식용개는 근수로 가격을 매기는 거야. 네 근수를 달아봤자 5만원도 채 되지 않을 걸.
개3 5만원 이라고? 내가 목에 걸고 있는 이 이름표만 해도 5만원이 넘는데.
개 어차피 이름표도, 그 이름표에 새겨진 이름도, 주인님 없이는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개2 그럼 주인님 없이는 우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야?
개 그러니까 우리가 [개]지.
개2/개3 (따라하며) 그러니까 우리가 [개]야.
개/개2/개3 (짖는다.)
개2 하지만 난 걱정 없어. 주인님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개3 맞아. 내 주인님도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시지.
개2 물론 나도 반드시 주인님을 기다릴 테고 말이야.
개3 나도, 나도 반드시 주인님을 기다릴 거야. 언제까지나.
개 우리가 기다리기 때문에 주인님은 돌아오는 걸까. 주인님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는 걸까.
개2 그 둘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난 전혀 모르겠는데.
개3 결국 주인님과 내가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개 그럼 그 다음은?
개2 주인님은 또 내 곁을 떠나겠지.
개3 우리는 또 주인님을 기다려야 하고.
개 반드시, 반드시 말이지.
개2/개3 (짖는다.)
개2 하지만 난 걱정 없어. 주인님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개3 맞아. 내 주인님도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시지.
개2 물론 나도 반드시 주인님을 기다릴 테고 말이야.
개3 나도, 나도 반드시…….
개 그만, 그만해. 똑같은 얘기는.
개2 하지만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은데 뭘.
개3 난 주인님을 기다리고, 주인님은 내게 돌아오고.
개2 나는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어.
개3 주인님이 내게 바라는 것도 그것뿐이지.
개2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개3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개2 그렇게 하루가 가는 거야.
개3 그렇게 한평생이 가는 거지.
개 만약 주인님이 돌아왔을 때 우리가 없다면 어떨까?
개2 우리가 없다니?
개3 우리가 어떻게 없을 수 있지?
개 간단해. 여기서 탈출하는 거야.
개2 (놀라며) 탈출?
개3 (놀라며) 탈출이라고?
개 이 집을 나가는 거지.
개2 나간다니, 어디로?
개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개2 왜에?
개 자유로워질 테니까.
개3 자-유?
개2 주인님으로부터?
개3 주인님의 [개]인 내 자신으로부터?
개 그리고 이 작은 방으로부터.
개2 자유. 자유라. 자유 좋지. 그런데 자유가 정확히 무슨 뜻이지?
개3 아, 내가 알아. 우리 주인님이 책상 위에 붙여놓고 매일 읊조리는 말이야. [자유. 남에게 구속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기.]
개2 하,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얘기 같네.
개3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설이 아니라 장소가 필요해. 진짜 장소.
개2 맞아. 먹을 게 있고 안전이 있는 곳.
개3 자동차들, 신발들, 먼지와 음악소리가 우글거리는 저 길거리에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난 벌써 구역질이 나.
개 그럼 너희는 이 작은 방이 좋다는 거야?
개3 솔직히 말할까? (작은 목소리로) 이건 감옥이야.
개2 그래. 하지만 갑옷이기도 하지.
개 감옥이면서 갑옷이라고? 누가 가두고 누가 공격하는 건데?
개3 이런, 넌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하구나.
개2 이건 생존의 문제라는 거야.
개 생존?
개3 말하자면, 이 작은 방이 우리의 삶의 형태야.
개2 말하자면, 이 작은 방이 우리의 삶의 크기지.
개 그래, 맞아. (방을 둘러보며) 그게 바로 우리가 선택한 것이었어.
개3 그랬나?
개2 우리가?
개 아주 오래 전에.
개2/개3 아주 오래 전?
모두 잠시 침묵한다.
개2 에이,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하자. 난 자유 따위는 필요 없어. 원하지도 않는 자유가 과연 자유일까?
개3 옳은 말이야. 주인님을 기다리는 게 내 행복인데 말이야. 아, 주인님은 언제 오시려나. 우리 주인님은 대문을 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 이렇게 외치지. (호들갑을 떨며) 아이구, 우리 막둥아, 나 왔다. 아이구, 하루 종일 심심했지. 아이구, 심심했쪄요. 아이구. 어째스까. 우리 새끼. 아이구, 서러워. 서러웠지요, 그랬지요. 그래요, 우리 애기. 아이구. 아이구.
개3 내 주인님은 집에 돌아오면 이렇게 말해. 왈, 왈왈왈, 왈왈, 왈왈왈왈, 왈 왈 왈왈왈.
개2 그러니까, 집에 네 발로 기어들어올 때 말이야?
개3 아니, 맨 정신에도 그러던데.
개 왈, 왈왈왈, 왈왈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개3 내가 어떻게 알겠어. 주인님은 이렇게 개소리를 하면 내가 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나봐.
개2 거기 101호 주인님은 집에 돌아오면 뭐라고 해?
개 우리 주인님은 딱 한마디만 해.
개3 뭐라고 하는데?
개 사랑해.
개2 아, 그 말, 나도 알아. 우리 주인님은 말끝마다 해주는 걸. 밥 먹자, 사랑해. 목욕 하자, 사랑해. 이제 그만 자자, 사랑해.
개3 우리 주인님은 내가 아플 때만 해 줘. 아니면 자기가 아플 때나.
개 그런데 주인님이 날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개2 사랑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개 모르겠어.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아.
개3 다른 뜻이라니?
개 때때로 주인님은 그 말로 나를 중독 시키려는 것 같거든.
개2 중독?
개 주인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말이야.
개3 아, 그건 네 짐작이 맞는지도 몰라.
개2 주인님들은 모두가 좀 지독한데가 있지.
개3 우리를 자기 옆에 영원히 가둬두고 싶어 해.
개2 보이지 않는 올가미로 목을 묶어서 말이야.
개3 때로는 진짜 올가미를 쓰기도 하지.
개2 올가미 손잡이를 있는 힘껏 꽉 쥐고서.
개3 하지만 괜찮아. 나도 주인님을 사랑하니까.
개2 맞아. 나도 주인님을 사랑해.
개 (침묵)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