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개 가라사대 (6)

by 곡도






개3 101호, 너는 어때? 너도 주인님을 사랑하니?


주인님을 사랑해. 이 세상 누구도 나보다 더 주인님을 사랑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 사랑의 근원이 비굴함이나 심지어 비열함이 아닐까 걱정이 돼.


개2 비굴함?


개3 비열함?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일까?


개2 아아, 나 그거 알아. 스톡홀름 증후군을 말하는 거지?


개3 스토.... 뭐?


개2 텔레비전에서 봤어.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게 되는 거래.


개3 하지만 우리는 인질이 아니잖아. 우리 주인님도 인질범이 아니고.


개2 글쎄, 정말 그럴까?


개3 그럼 인질범이 인질을 사랑하게 되는 건 뭐라고 하지?


개2 그건 아마 리마 증후군일 거야.


개3 우와, 너 정말 똑똑하구나.


개2 우리 주인님이 이런 류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거든. 음, 이런 것도 있어. 어떤 박사가 말하길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스톡홀름 증후군이거나 리마 증후군의 일종이래.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연인 간의 사랑도, 휴머니즘 까지도 모두 그저 스톡홀름 증후군이거나 리마 증후군의 일종이라고?


개3 다른 건 몰라도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확실히 그렇지.


개2 휴머니즘도 꽤나 그렇고.


개3 그럼 연인사이의 사랑은?


개2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니, 아니야. 사랑에는 단지 증후군 이상의 뭔가가 더 있을 거야.


개3 아하, 넌 사랑에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구나.


개2 사랑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모순과 결핍을, 아니 사랑 때문에 더 분명해지는 모순과 결핍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싶어 하네.


개3 이게 다가 아니야. 이게 끝이 아니야.


개2 분명 무언가가 더 있어, 분명 더 큰 의미가 있어, 하면서.


난 주인님을 사랑해.


개3 (짖는다.)


개2 사실 우리는 주인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아니라고?


개2 우린 그냥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고 있는 것뿐이야.


흉내?


개3 개의 본능이지.


하지만, 하지만 주인님은 나를 사랑해.


개2 비밀 하나 알려줄까? 인간들은 결코 개를 사랑한 적이 없어.


뭐?


개2 인간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해. 그저 그 사랑을 다른 상대에게 흉내 내고 있는 것뿐이지.


잠시 침묵.


개3 차암, 이런 얘기는 그만 하자.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들먹이는 건 우리에게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기 때문이야.


개2 그건 그래. 심심할 때 쥐어짜내는 생각은 언제나 신통치 않기 마련이지. 혼자 있을 때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진짜 자기 생각이야.


개3 사실 난 말이야 혼자 있을 때는 상상을 하곤 해.


어떤 상상 말이야?


개3 갑부 주인을 만나서 금수저 강아지로 사는 상상이지. 에어컨과 난방기를 갖춘 내 전용 개집에는 넓은 잔디마당과 풀장이 딸려있는 거야. 난 유명 디자이너가 나만을 위해 만들어준 명품 옷을 입지. 아침으로는 해물 리조또를 먹고 저녁으로는 안심 스테이크를 먹어. 강아지 전용 와인까지 곁들여서 말이지. 최고급 샴푸와 향수로 거품 목욕을 한 뒤, 부드러운 빗질로 털에 윤을 낸 다음, 금으로 만든 목걸이를 매고 주인과 거리를 산책할 때면 모두들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겠지. 나는 최대한 발꿈치와 코를 높이 쳐들고 천천히 걸어갈 거야.


개2 이야, 그거 멋진데.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개도 자본주의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지. 우리가 이제까지 인간에게 바쳐온 헌신과 봉사를 고려한다면 말이야. 에, 사실은 나도 가끔씩 상상하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개3 그게 뭔데?


개2 좀 쑥스럽긴 하지만, 한 번 들어볼래? 에, 그러니까 끝없이 광활한 하얀 눈밭에서 말이야, 환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말이지, 개썰매를 몰아보는 거야.


개썰매?


개3 개들이 끄는 썰매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개썰매를 끌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직접 몰아보고 싶다고?


개2 뭐, 누구나 판타지는 있는 거잖아?


개3 하지만, 개가 개가 끄는 개썰매를 몰다니. 우스꽝스럽지 않아? 뭔가 자아분열 같은 느낌이잖아. 차라리 인간이 끄는 썰매를 모는 꿈은 어때? 나름 풍자적이랄까, 시사적이기도 하고.


개2 말도 안 돼.


개3 왜?


개2 그건 폐륜이잖아. 비도덕적이고 천박한 상상이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진다고.


개3 아아, 그렇지. 그래, 미안해. 내가 좀 심했네.


그저 상상인데 뭐 어때?


개2 상상에도 옳고 그른 게 있는 거야.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도덕적 기준이 없는데.


개3 우리에게는 도덕적 기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류의 기준도 없어. 이건 인간들의 세상이니까.


개2 그러니까 인간이 바로 우리의 기준이야. 그리고 그건 늘 옳지. 물론 인간들은 불완전하거나 불온하거나 심지어 사악할 수도 있고, 그들의 기원조차 불분명하지만, 우린 그들이 옳다고, 결국에는 옳다고, 언제나 옳다고 믿어야만 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존재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될 거야.


개3 맞아, 인간이 없었다면 개도 없었겠지.


개2 우린 지금까지도 늑대였을 걸.


개3 아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늑대?


개2 늑대는 길들일 수가 없데.


개3 길들이려고 하면 죽어버린데.


개2 어리석긴.


개3 고집스러워.


혹시 지금이라도 다시 늑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개2 늑대로 돌아간다고?


개3 아까는 탈출 운운 하더니 이제는 늑대로 돌아가겠다고? 세상에.


개2 넌 만족을 모르는 구나.


개3 넌 감사함을 몰라.


개2 그저 네 자신이 싫은 것뿐이야.


개3 네 자신에게서 도망가고 싶은 것뿐이라고.


개2 막상 늑대가 되어 봤자 또 다른 무언가로 도망가고 싶어지겠지.


개3 또 다시 개가 되고 싶어질지도 몰라.


개2/개3 (짖는다.)


개2 게다가 네 이름이 [늑대]라고 생각해 봐. 네 엄마 이름도 [늑대], 아빠 이름도 [늑대], 형제자매들 이름도 [늑대], 친구들 이름도 [늑대], 모든 늑대들의 이름이 다 [늑대]라고 생각해 보라고.


개3 휴,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조차 나지 않을 걸.


오히려 홀가분하지 않을까? 모두가 똑같은 무게를 동등하게 나누어 가지니까 말이야.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강조하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잖아. 반면에 우리에게는 누군가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혼자만 짊어져야 하는 자신만의 이름이 있지. 이름은 마치 길고 뾰족한 못처럼 나를 나 자신에게 단단하게 못박아버려. 그럼 나는 그 이름 외에는, 내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는 거야.


개2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뭐, 그래, 비슷하지.


개3 아니, 그건 교만한 생각이야. 우리가 못 박혀 있는 곳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주인님이야. 내 주인님이 바로 나의 십자가란 말이야.


개2 하지만 주인님도 자신만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나?


개3 아, 그럼 십자가 위에 십자가가, 그리고 그 위에 또 십자가가, 그리고 또 그 위에 십자가가……. (계속한다.)


마치 서커스 같네.


개3 .....십자가 위에 십자가가, 그리고 그 위에 또 십자가가, 그리고 또 그 위에 십자가가…… 앗, 주인니임, 주인님이 오셨다.


개2 그 십자가의 가장 위에, 개가 있지.


개3 (아이처럼 칭얼대며) 주인님-. 주인님-. 힝, 보고 싶었쪄요. 하루 종일 너무너무 심심했쪄요. 가끔 서럽기도 했쪄요. 그러다가 잠이 들곤 했어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지구상에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동물이 또 있을까요? 나는 가장 행복한 동물일까요, 아니면 가장 불행한 동물일까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이제 이렇게 주인님이 왔으니까요. 괜찮아요. 주인님만 있으면 다 괜찮아요. (부드럽게 짖는다.)


303호의 불이 꺼진다.


개2 303호 주인님이 온 걸 보니 벌써 5시가 되었나 보네. 우리 주인님도 빨리 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결국에는 오겠지. 집으로, 내게로 말이야. 자, 나도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아침에 주인님이 깜빡 잊고 식탁 위에 놓아 둔 케첩이나 온 몸에 바르고 있으려고. 그럼 주인님은 화를 내겠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막 사진을 찍어대는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나를 씻겨 주겠지. 목욕은 싫지만 뭐 견뎌야 하는 일이니까. 보통은 주인님도 같이 목욕을 하는데, 나는 주인님의 엉덩이 사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곤 해. 우리 개들이 서로에게 하듯이 말이야. 말하자면 애정을 담아 서로의 엉덩이에 안부를 묻는 거지. 그럼 주인님은 부끄러워하지만, 그것도 내심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자아, 그럼 이만 안녕. (짖는다.)


202호의 불이 꺼진다.

정적. 개가 무대 앞으로 나와 관객들을 바라본다.


잠시 후면 해가 지겠네요. 하늘은 옅은 보랏빛과 남빛으로 물들고 서쪽 구름 끝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모든 것이 잠시 더 소란해졌다가 해가 지면 마침내 잠잠해지겠죠. 아직은 온 세상이 활기로 가득합니다. 묵직한 장바구니를 손에 든 사람들과, 늦기 전에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들, 저녁 약속으로 발걸음이 가벼운 젊은 남녀들. 산책하는 개들도 보이네요. 물론 줄에 묶여 있긴 하지만요. 난 주인님과 함께 산책을 나간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주인님은 더 이상 산책을 나가지 않아요. 그냥 이 방안에서 나와 함께 단 둘이 있는 게 제일 좋다고 합니다. 나도 크게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집니다. 거짓말을 했지만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받으면 억울해지는 소년처럼, 혼자 있고 싶지만 막상 혼자가 되면 서러워지는 소녀처럼, 나는 내가 개라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또 한편 지겨워집니다. 혹시 주인님도 때로는 제 주인님이라는 사실이 지겨워질까요? (침묵) 아, 벌써 하늘에 달이 떴네요. 초승달이에요. 꼭 개가 흔드는 하얀 꼬리 같아 보입니다. 저는 지구가 주인님이고 달이 지구의 개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면서 밤하늘을 너즈막히 밝혀주지요. 만약 달이 없었다면 지구의 밤이란 참 적막했을 거예요. 달 덕분에 모든 생명이 단잠에 빠지고 꿈속에서도 안심하고 눈을 뜰 수 있지요. 하지만 황폐한 모래와 돌로 뒤덮인 달에게 초록빛 지구란 어떤 의미일까요. 지구 주위를 끝없이 돌고 있으면서도 지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저 광대한 은하수를 향해 마음껏 날아갈 수도 없는 달은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요.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등 뒤에 그 모든 그림자를 숨기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개들은 달을 향해 그렇게 짖어대나 봅니다. 오직 개만이 달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네? 저도 달을 향해 짖냐구요? 에이, 천만해요. 저는 그런 구닥다리 전통 같은 건 따르지 않습니다. 저는 도시의 개니까요. 도시는 더 이상 달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아무도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죠. 하늘은 이제 너무나 멀고 또 희미합니다. (다시 관객들을 바라보며) 대신에 주인님은 가끔 저에게 텔레비전을 틀어주곤 합니다. 그럼 저는 신이 나지요. 텔레비전이 바깥세상보다 더 흥미진진하거든요. 시간도 더 빨리 가구요. 저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봅니다. 세상에는 참 덜떨어진 개들이 많더군요.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망각한 개들이죠. 그런데 제 흥미를 끄는 건 그런 덜떨어진 개들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주인님들이 사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부자 주인님, 병든 주인님, 유식한 주인님, 소심한 주인님, 뚱뚱한 주인님, 혼자 사는 주인님, 여자 주인님, 남자 주인님, 노인 주인님, 아이 주인님 등등등, 다양한 주인님들의 다양한 면면들은 각기 다른 듯 하지만 하나같이 비슷합니다. 뭐가 비슷하냐구요? 음, 말하자면, 참 인간적이에요. 인간들은 자신들이 개와 함께 할 때 가장 인간적이 된다는 걸 알고 있나요? 인간들이 개를 키우는 건 자신이 인간이라는 걸 확신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나요? 개를 인간들의 친구라고 부르는 건 개를 인격화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인격화 시켰기 때문이라는 걸, 정말 인간들은 알고 있을까요? (침묵)


무대가 점점 어두워진다.


마침내 해가 집니다. 오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갑니다. 나는 아침보다 좀 더 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분명 이 세상도 저 만큼이나 늙었을 겁니다. 주인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기다립니다. 제가 제일 잘 하는 일이고 또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요. 평생을 기다려 왔으니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어요.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저를 품에 꼭 안고 [사랑해]라고 말해주겠죠. 저는 아직도 이 말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알아듣는 척 합니다. 그럼 주인님이 기뻐하니까요. 그럼 나도 기쁘지요.


무대가 어두워진다. 암전. 박수치는 관객들이 있다면 박수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린다. 정적. 그 때 어둠 속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여러 번 울리더니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난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경찰2 저기요. 문 좀 열어 보세요.


경찰3 101호. 문 여세요.


경찰2 경찰입니다. 안에 누구 없어요?


경찰3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문 열어 보세요.


초인종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 힘차게 울린다.


경찰2 아무도 없나 본데.


경찰3 그러게 말이야. 집에 불도 꺼져 있고.


경찰2 할 수 없지. 문을 따고 들어가야겠어.


경찰3 그래, 그렇게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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