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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30. 2023

벌집의 정령





El Espiritu De La Colmena 벌집의 정령 (1973)






언니. 


언니는 내게 거짓말을 했지.


내가 이 한없는 세상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때


모두 각자의 좁은 방 안에서 침묵할 때


바람 소리인지 날갯짓 소리인지 헷갈릴 때


언니는 내게 거짓말을 했지. 


다정하게 속삭였지.


사람들은 괴물을 죽이지 않고


괴물은 소녀를 죽이지 않고


그래서 언니는 죽지 않는다고.


난 믿었어. 그래서


캄캄한 밤에도 곤히 잠들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 난 알아.


사람들은 괴물을 죽이고, 괴물은 소녀를 죽이고,


언니도 죽고 없다는 걸.


이제 괴물도, 소녀도, 언니도


옷이나 신발을 다 벗어던지고


모두 같은 이름이라는 걸.


언젠가는 나도 같은 이름이 되겠지.


그리고 모든 이름을 잊겠지.


언니도 내 이름을 잊었을까.


그러니까


나는 매일 밤마다 창문을 열고 인사할 거야.


괴물에게, 소녀에게, 언니에게


바람에게


날갯짓 소리에게


안녕, 나는 '아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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