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Halo (1)

by 곡도




등장인물


노인

게이1

게이2

게이3

사장

딴따라



* 극에 나오는 5곡의 노래 중, 가장 처음에 나오는 [날개]와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Halo]를 제외한 나머지 노래는 변경하도록 한다.



무대는 어둡다. 정적.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노래 소리가 들린다. (무반주로 노래만 들린다.)



[날개] -


우린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슬펐지.

우린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함께 보낸 날들은 너무 행복해서 슬펐지.

우린 차가운 바람에 아픈 날개를 서로 숨기고

약속도 다짐도 없이 시간이 멈추기만 바랬어.

우린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함께 보낸 날들은 너무 행복해서 슬펐지.

우린 서툰 날갯짓에 지친 어깨를 서로 기대고

깨지 않는 꿈속에서 영원히 꿈꾸기만 바랬어.

우린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슬펐지.



한 노인이 노래에 이끌리듯이 무대에 등장한다. 마르고 왜소한 노인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연로하다. 분장이 아닌 실제 작고 연로한 배우가 연기하도록 한다. 노인은 마치 노래의 진원지를 찾으려는 듯 어두운 무대 위를 천천히 헤맨다. 그러다 무대 오른쪽 편에 서서 가만히 왼쪽 어둠 속을 바라본다. 무대가 조금 밝아지며 무대 왼쪽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하고 있는 가수가 보인다. 가수는 전체적으로 하얀색 느낌이 나는 정장을 입고 있다. 노인은 그대로 꼼짝 않고 서서 가수가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노래가 끝나자 노인은 옆에 있던 의자에 앉는다. 노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무대 전체가 밝아지며 분위기가 바뀐다. 가수는 [날개]를 피아노로 경쾌하게 연주한다. 이곳은 젊은 분위기의 술집이다. 무대 뒤로 칵테일바가 있고, 무대 여기저기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다. 칵테일바 뒤에서는 사장이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칵테일바 앞에 놓인 의자에는 게이2와 게이3이 나란히 앉아서 가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향해 수군거리며 웃고 있다. 사장이 완성된 칵테일을 유리잔에 담아 게이2와 게이3에게 준다. 그 때 게이1이 아까 가수가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온다.


게이1 (사장을 향해) 사장님, 저 왔어요.


사장 어, 그래. 오랜만이네.


게이2 야, 잘 있었어?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들어?


게이1 아아, 그 동안 좀 바빴어.


게이3 얘기 들었어. 애인이랑 헤어졌다면서?


게이1 애인은 무슨.


게이2 헤어진 게 아니라 아주 시원하게 차버렸다던데. 왜 그런 거야?


게이1 진짜 애인처럼 굴려고 하잖아.


사장 딱 진짜 애인처럼 보이던데.


게이1 에이, 그냥 잠깐 어울렸던 것뿐이에요.


게이2 대체 그 '잠깐 어울렸던 사람'과 '애인'의 차이는 뭐야?


게이1 뭐, 말하자면 프로도와 골룸의 차이랄까?


사장 무슨 말이야?


게이1 프로도는 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반지를 소유하지 않기 위해 모험을 떠난 거고 골룸은 가질 수도 없는 반지를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뒤를 쫓았지.


모두들 아아.


사장 오늘도 깊은 깨달음을 주네.


게이3 괜히 맞장구쳐주지 마요. 진짜인 줄 아니까.


게이2 너 같은 놈 때문에 게이들이 지조 없고 헤프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게이3 맞아. 나처럼 이렇게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게이도 있는데 말이야.


게이2와 게이3이 키스한다. 사장이 게이1에게 술을 따라 준다.


게이1 (게이2와 게이3이 키스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얘들은 사귄지 얼마나 됐죠?


사장 글쎄. 한 5년 됐나?


게이1 벌써 5년씩이나요? 애새끼를 낳을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오래 사귀었데.


게이2 혹시 알아? 결혼하면 진짜 애새끼도 생길지.


게이1 어이구야, 딸이 아빠를 닮으면 큰일이라는 데 시꺼먼 아빠가 둘씩이나? 절대 딸은 낳지 마라, 응?


게이2 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게이1 뭐어? 출산 말이야?


게이2 아니, 결혼 말이야.


게이1 결-혼? 설마, 농담이지?


게이3 미안하지만 진짜야. 자, 여기 청첩장.


게이3이 주머니에서 청첩장을 꺼내 게이1과 사장에게 준다.


사장 야,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게이1 참 나, 결혼이라니. 거기다 이렇게 꽃무늬가 그려진 청첩장까지. 흉내 한 번 제대로 내셨네.


게이2 흉내라니?


게이1 이게 흉내가 아니면 뭐야? 설마 누구누구처럼 둘이 하얀색 양복까지 똑같이 맞춰 입으려는 건 아니겠지?


게이3 음, 사실 생각중인데?


게이1 (진저리를 치며) 아유, 제발 그런 유치한 짓거리는 그만 둬. 어차피 법적인 효력도 없는 결혼 따위. 아니, 아니지. 쇼를 하려면 아예 제대로 보여주던가. 하얀 면사포도 쓰고, 꽃다발도 들고, 눈물도 좀 흘려주고 말이야. 주례도 필요할 텐데, 아, 그래, 홍석천씨한테 한 번 부탁해보지 그래? 한국에서 제일 저명한 게이잖아. 정서법적인 공신력이 있지.


게이3 뭘 그렇게 비꼬고 그래?


게이1 내가 비꼬는 거라고? 천만해. 비꼬고 있는 건 너희들이야. 아주 비비 꼬였지. 겨우 제도권 밖으로 빠져나와 놓고 좀 살만해지니까 다시 그 제도권 안으로 기어들어가겠다고?


사장 에이, 기어들어가는 건 아니지. 당당하게 들어가는 거야. 개선장군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게이1 백의종군이 아니구요?


게이2 아이구야, 그만 좀 해. 이건 전쟁이 아냐.


게이1 이건 전쟁이야. 그리고 너흰 항복을 하려는 거야.


게이2 휴전을 하려는 거지.


사장 글쎄, 나는 오히려 선전포고로 보이는데?


게이3 다들 그만해. 우리는 그냥 작고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뿐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무슨 대단한 게이 퍼레이드를 하려는 게 아니란 말이야.


게이1 천만해. 게이들이 하는 건 모두 다 퍼레이드야. 먹는 것도, 걸어 다니는 것도, 숨 쉬는 것도, 똥 싸는 것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다 퍼레이드라고. 우린 투명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가 되어야 해.


게이2 아니, 그렇게 살 순 없어. 우리도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 권리가 있어.


게이1 보통 사람? 평범? 네가 말하는 '보통 사람'은 바로 이성애자들이야. '평범'이란 바로 그들의 질서지. 우린 보통사람인 평범한 게이가 될 수는 없어. 말 자체가 되지 않는 다고. 그럼 처음부터 게이가 되지 말았어야지. 우린 모든 걸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만 해. 그런데 너희는 손쉽게 그들의 것을 베끼려고 하는 구나.


게이3 뭐-어, 정 그렇다면, 오마주라고 해두자.


게이1 택도 없는 소리. 차라리 이건 패러디가 되어야 해. 패러디는 코미디가 되고, 코메디는 폭로가 되고, 폭로는 고발이 되고, 고발은 행진이 되지. 자, 딴따라 오빠, 그 지긋지긋한 결혼행진곡 좀 쳐줘요.


딴따라가 결혼행진곡을 피아노로 친다. 게이1이 커다란 냅킨을 머리에 쓰고 새침하게 모델처럼 사람들 앞을 걸어 다닌다.


게이1 자, 여러분, 절 보세요. 전 완전히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랍니다. 그러니 완전히 정상적인 보통 결혼식을 할 거예요. 청첩장도 있고, 꽃도 있고, 주례도 있고, 하객도 있고, 피로연도 있죠. 단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신랑신부가 아니라 신랑신랑이라는 사실 뿐이죠. 그렇지만 그건 아주 작은 문제일 뿐이잖아요? 결혼식만 완전히 정상적이라면 말이에요.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게이1 아냐, 차라리 전통혼례를 올리는 게 좋겠어. 둘 다 푸른색 사모관대를 하고 맞절을 하는 거야. 그럼 사람들이 외치겠지. 붉은 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신부는 어디에 있죠? 파란색과 빨간색, 수탉과 암탉, 남자와 여자, 이렇게 한 쌍이 바로 혼례의 기본인데 말이에요? 자, 아직도 모르겠어? 너희는 인간사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예식을 치르겠다고 하면서 그 식의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은 지키지 않겠고 하는 거야. 그럼 그건 결혼식이 아니야. 왜냐하면 그건 결혼식이 아니니까. 그런데 우린 그저 작고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뿐이라고? 정말 이거야 말로 대단한 코미디 아냐? (웃는다.)


게이3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해. 면사포를 쓰든, 사모관대를 하든, 광대 모자를 뒤집어쓰고 딸랑이를 흔들어대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우리 결혼식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박수나 열심히 치면 돼.


게이1 어쩌지, 난 웃음을 참지 못할 것 같은데.


게이2 웃기만 해 봐. 너한테 부케를 던져버릴 테니까. 넌 받을 수밖에 없을 걸.


게이3 이야, 그거야 말로 정말 대단한 코미디가 되겠는데?


게이1 너희 정말 이 결혼식을 꼭 해야겠니?


게이1이 진저리를 치며 손을 내졌다가 딴따라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게이1 아니, 저기, 저 할아버지는 누구야? 여기서 뭐하시는 거래?


게이2 모르겠어. 아까부터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딴따라 노래를 듣고 있어.


게이1 딴따라 아버지라도 되나? 게이바에서 일하는 아들을 잡으러 온 거야?


게이3 (웃으며) 아버지는 아닌 것 같은데. 저 눈빛을 봐.


게이1 설마, 혹시, 딴따라한테 반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 이런 변태영감탱이 같으니라고.


게이2 에이, 사람한테 함부로 변태라고 하면 안 되지. 특히 함부로 변태라고 불리는 우리들은 말이야.


게이3 게다가 할아버지가 변태 짓을 한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냥 저렇게 앉아만 있을 뿐이잖아.


사장 뭐, 딴따라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 있는 것만 빼면 말이지. (웃는다.)


게이1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저 나이에 게이라니, 변태지 뭐야.


게이3 무슨 소리야. 게이도 늙기 마련이야.


게이1 아니, 게이는 늙지 않아. 단지 사라질 뿐이지. 뭐든지 사라질 때를 놓치면 추해지는 거야.


게이2 세상에, 넌 정말 누구 편인지 모르겠구나.


게이1 난 단지 공정할 뿐이야. 이성애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까.


게이3 그럼 사람이 늙으면 무성애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게이1 아니, 사람이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거야.


게이2 그게 무슨 소리야.


게이3 진짜 너무 심하잖아.


사장 그만 해. 할아버지가 딱히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노래나 듣고 계시는데 뭐.


게이1 (노인을 가리키며) 에이, 좀 솔직해져 봐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혀? 조금도?


사장 뭐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게이1 조금 신경 쓰인다구요? 난 엄청 신경 쓰이는데. 완전 호호 할아버지잖아. 저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누가 달려가서 부축해 줘야 될 걸요? 여기가 무슨 양로원도 아니고 이러다간 손님들도 다 떨어져 나갈 거야.


사장 이야, 네가 내 사업을 그렇게까지 걱정해 주는 지는 미처 몰랐네.


게이3 얜 그저 저 할아버지가 꼴 보기 싫은 것뿐이에요.


게이1 당연히 꼴 보기 싫지. 특히 여기서는 말이야. 뜨겁게 피가 끓어올라도 시원치 않을 판에 갑자기 관절 마디마디가 다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몸살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만사가 귀찮고, 그냥 집에 가서 뜨듯한 전기장판에 등이나 지지면서 귤이나 까먹고 싶어진다니까. 아, 씨발, 늙는다는 건 어쩌면 전염병인지도 몰라. 에이. 에잇.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몸을 흔든다.)


사장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여기에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게이1 보세요. 그런 식으로 물렁하게 하다가는 우리나라에 있는 노인게이들이, 아니, 한 때 게이였던 노인들이, 아니 아니, 그냥 노인들이 다 이리로 몰려들어올걸요? 그리고는 연금이니 노인수당이니 틀니니 전립선 같은 얘기들이나 떠들어대겠지. 야, 그것 참 섹시하겠네. 아주 술맛 나겠어.


사장 뭐, 솔직히 네 얘기가 아예 틀린 건 아냐. 장사에 도움이 될 건 없지.


게이2 그럼 네가 한 번 나서 보지 그래?


게이1 뭐? 내가?


게이3 그래, 가서 얘기를 좀 나눠 봐. 그리고 여긴 안오시는 게 좋겠다고 설득해 봐.


게이2 단 정중하게.


사장 그래, 그래주면 나도 고맙겠다. 저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저 할아버지에 대해 계속 불평을 늘어놓는 너를 내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거든.


게이1 (잠시 망설이다가) 뭐, 못할 것도 없지. 못할 것도 없어요. 대신 사장님 오늘 나한테 한 턱 단단히 쏴야 돼요.






(계속)



이전 07화[희곡] 개 가라사대 (7) -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