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1이 건들거리며 노인에게 다가가 슬슬 노인 주변을 맴돈다. 노인은 게이1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딴따라를 바라보고 있다.
게이1 저기, 저기요. 안녕하세요.
노인 (놀라며) 아 저, 저 말인가요?
게이1 에, 노래를 좋아하시나봐요. 아까부터 엄청 집중해서 듣고 계시던데.
노인 네, 정말 아름답죠?
게이1 노래가요? 아니면 가수가요?
노인 글쎄요. 모르겠어요. 나한테는 그 둘이 똑같아 보이는데.
게이1 하하, 꼭 사춘기 소녀 같은 말씀을 하시네.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노인 그러니까, 80이 훌쩍 넘었지요.
게이1 80살이요? 와, 사람이 80년이나 살 수 있다는 게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네요.
노인 맞아요. 80년은 정말 긴 시간이죠. 이제 마치 죽음에게조차 잊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웃음) 그런데, 저기, 뭣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에요.
게이1 아유, 말 놓으셔도 되요. 저희 할아버지보다도 연배가 높으신 것 같은데.
노인 아, 그래도 될까? 그럼, 그러지.
게이1 그렇다고 바로 놓으세요?
노인 난 이제 그런 배려들이 당연한 나이가 되었거든.
게이1 그건 좋은 점이네요. 그런데 뭘 묻고 싶다고 하셨죠?
노인 (딴따라를 가리키며) 저 가수 말이야, 이름이 뭐지?
게이1 아, 가수요? 우리도 본명은 몰라요. 그냥 여기서는 딴따라라고 부르죠.
노인 딴따라라니. 저런 훌륭한 가수에게는 너무 값싼 별명인데.
게이1 뭐, 그렇다고 슈퍼스타도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여기는 가끔 오세요?
노인 아냐. 오늘이 처음이야.
게이1 아 네, 저기, 그런데,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오신 거예요?
노인 어?
게이1 그러니까, 그게, 그런 거, 있잖아요, 말하자면, 예를 들면, 왜 여기는 여자들이 한 명도 없을까 라던가…….
노인 아아, 그럼, 알고 있지. 여기가 그 게이바라는 곳이잖아? 남자들만 오는.
게이1 예, 맞아요. 맞긴 한데, 그러니까 게이가 뭔지는 아시는 거죠?
노인 (웃으며) 설마 모르고 왔을까봐?
게이1 아, 아신다는 거죠. 에, 그럼 어르신께서는 그, 게이라는 말씀이세요?
노인 그게…….
게이1 그러니까, 제 말은, 왕년에 말이에요.
게이2와 게이3이 항의의 신호를 보낸다.
게이1 뭐, 물론, 아직, 지금도, 어느 정도까지는, 게이일 수도 있겠죠. 뭐든지 흔적은 남기 마련이니까.
노인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실은 그걸 알아보려고 여기에 온 거야.
게이1 알아보러 왔다구요? 그럼 여태껏 본인이 게이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았다는 말씀이에요?
노인 그래. 그게 그렇게 됐네.
게이1 아니,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건 알아서 뭐하시게요?
노인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건 중요한 일이잖아. 특히 죽을 날이 가까워 올수록 더 그렇지.
게이1 하지만 이제까지 그딴 거 모르고도 잘만 살아오셨잖아요. 무려 80년 동안이나 말이에요.
노인 그래, 잘 살아왔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게이1 나 참, 질풍노도의 사춘기도 아니고 이제 와서 무슨 자아를 찾겠다고 그러세요.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뭐하냐구요.
노인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앞을 보면 뭐가 있겠나. 아무 것도 없어. 죽음 밖에는. 그러니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거지.
게이1 에이, 죽긴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직, 당분간은, 그러니까 한동안은, 꽤나, 제법, 정정하시잖아요.
노인 (말없이 자신을 두 손을 내려다본다.)
게이1 결혼은 하셨어요?
노인 했지. 정확하게 56년 전에 말이야.
게이1 아아니, 참. 결혼까지 하신 분이 왜 이러실까. 요새 뉴스에서 노년의 위기다 뭐다 말이 많던데, 그런 거예요? 할머니가 지겨워지신 거예요? 뭐어, 하긴 50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죠. 여자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질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게이인가보다 그렇게 착각하시면 큰일 나요. 자아, 어서 그만 할머니한테 돌아가세요.
노인 집사람은 죽었어.
게이1 네?
노인 세 달 전에. 풍 때문에 1년 반을 누워 있다가 갑자기 심장 쇼크가 와서. 난 임종도 지키지 못했어.
게이1 아아, 네에.
노인 집사람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 좋은 편이었지. 나는 평생 집사람에게만 충실했어. 한 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었어.
게이1 그렇게 금슬이 좋으셨는데 왜 본인이 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노인 단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평생 집사람에게만 충실했으니까.
게이1 아아, 아니, 뭐,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수도 있는데…….
노인 아내 장례를 마치고 세 달 동안 혼자 빈 집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보니까, 결국 다음은 내 차례겠구나,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보니까, 문득 내가 진짜 게이인지 아닌지 죽기 전에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게이1 문득이요?
노인 실은 언제나 마음 한켠에 그런 의심이 있었지. 평생 열어보지 않은 방에 쌓아놓은 먼지투성이 상자처럼.
게이1 아하, 그럼 여기가 바로 그 평생 열어보지 않은 방인 셈이군요. 저기 딴따라가 그 먼지투성이 상자구요?
노인 가르쳐 줘.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
게이1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노인 게이들은 척 보면 서로 알아본다던데?
게이1 (양 손을 머리위로 쫙 펴서 흔들며) 아, ‘게이다’라는 거요? 오래된 도시 전설 중 하나죠. 택도 없어요.
노인 이거 참, 병원에서 간단하게 피 검사로 알아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게이1 그럼 수혈 받을 때 너무 복잡해지지 않겠어요? 일반 사람들은 게이들의 피를 몸에 넣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혈액형이 대체 몇 가지가 되는 거야. (손가락으로 꼽아보며) A헤테로형, A게이형, A레즈형, A바이형.......
노인 (두 손으로 머리를 쥐며) 좀 더, 좀 더 열심히 생각해 봐야 돼. 좀 더.
게이1 에이, 그건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거예요. 그건 솔직히 감정도 아니죠. 사랑이니 뭐니 거창하게들 포장해대지만 결국에는 욕정일 뿐이거든요. 오직 몸이 증명하는 거죠.
게이2와 게이3이 항의의 신호를 보낸다.
노인 단지 몸이 증명하는 거라고? 그럼 대체 사랑은 뭐지?
게이1 그건 부차적이고도 사소한 거예요. 일종의 부록인데 없어도 그만이죠. 아니, 이성애자들은 허구한 날 매매춘이니 원나잇이니 즐길 데로 즐기면서 왜 사랑은 동성애자들에게 와서 찾는데요? 마치 우리가 진실한 사랑의 수호자라도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사실 우리도 만만치 않게 문란한데.
노인 하지만 사랑에는 단순한 욕구 이상의 그 어떤 다정함이 있잖아. 유대감이랄까, 교감이랄까, 따듯함.
게이1 하하, 육체적 욕망 없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값을 후하게 쳐줘봤자 고작 우정에 불과할 뿐이지. 섹스는 성기가 아니라 뇌가 하는 거라지만, 뇌도 고깃덩어리라는 걸 잊으면 안 되죠.
노인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고깃덩어리. 나는 사람을 고깃덩어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게이1 그러니까 본인이 게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거예요.
노인 내 자신을 고깃덩어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게이1 아뇨,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게이1이 노인 앞에 가까이 다가선다.
게이1 자, 본인이 게이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는 거죠? 가르쳐드릴까요?
게이1이 노인의 무릎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집어넣으며 놀린다.
게이1 이게 서느냐 안 서느냐, 바로 그게 할아버지가 찾는 정답이에요.
노인 (당황하며) 글쎄, 나, 난 잘 모르겠는데.
게이1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이건 산고양이와 죽은 고양이 문제처럼 간단한 거예요. 서든가 안서든가 둘 중 하나죠. 51퍼센트만 서든가 17퍼센트만 서든가 99퍼센트만 서든가 하는 건 없어요.
노인 하지만 그 고양이가 80년 넘게 살아야 한다면 삶과 죽음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거야.
게이1 아니 대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게 언제에요? 그건 기억나세요? 누구하고든 말이에요. 아아, 평생 할머니한테만 충실했다고 했으니 마지막으로 한 것도 할머니하고 겠네. 그게 언제죠?
노인 (한참을 생각하더니) 너무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라. 음, 적어도 20년은 된 것 같은데.
게이1 아이고 세상에나. 20년이라구요? 그럼 20년 동안이나 섹스를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20년 동안이나 섹스를 하지 않고 사는 기분이란 대체 어떤 거죠?
노인 하지만 자네는 40년 동안 한 사람하고만 섹스를 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잖아.
게이1 이제 알겠네요. 20년 동안 섹스를 하기 싫어지는 기분인가요?
노인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게이1 아아, 부정하지 않아도 되요. 짐작이 가고도 남으니까. 그럴 만하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게이2와 게이3 들으라는 듯이) 결혼은 정말이지 끔찍한 제도니까요. 평생 한 사람 하고만 섹스를 해야 한다니, 비자연적인데다가 비인간적이에요. 심지어 비도덕적이기까지 하죠. 결국은 육체도 정신도 만족시키지 못할 거예요. 지극히 실용적인 필요와 희생이 모래처럼 주변에 쌓여가고, 결국 욕망도 바짝 말라서 박제가 되어버리고 말걸요. 무슨 기념품처럼. 무슨 트로피처럼.
노인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좋은 점도 있어. 두 사람의 추억도 같이 박제되거든. 무슨 기념품처럼. 무슨 트로피처럼.
게이1 그래요. 어느 순간부터는 오직 그 기념품과 트로피를 꺼내 보는 낙으로 사는 거죠. 녹이 슬 새라 매일 퉤퉤 침을 뱉어가며 광을 내면서. 아우,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네요. (크게 숨 쉬는 시늉을 한다.)
노인 다행히 노인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공기가 필요하지 않아.
게이1 그건 결혼이 폐를 쪼그라들게 만들어서 그런 거라구요. 결혼은 모든 걸 쪼그라들게 만들거든요. 모든 걸요. (장난스럽게 하체를 위로 들어 올린다.)
노인 (웃는다.) 그래, 그런지도 모르지.
게이1 말해보세요. 섹스 없이 지냈던 그 20년 동안 정말 아무한테도 끌린 적이 없었어요? 아무한테두요?
노인 끌린 적?
게이1 에이, 정확히 말하자면 꼴린 적이 없었냐구요.
노인 아, 글쎄. (침묵)
그 때 사장이 딴따라에게 말한다.
사장 오늘 따라 손님도 없고 가게가 너무 조용하네. 딴따라, 노래를 좀 불러줘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