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Halo (4)

by 곡도




노인은 춤을 추고 있는 게이2와 게이3을 바라본다. 딴따라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 김광석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이는 마당의 키 작은 나무들

빗물이 되어 다가온 시간이 굽이쳐 나의 곁을 떠나면

빗물에 꽃씨 하나 흘러가듯 마음에 서린 설움도 떠나

지친 회색 그늘에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파도처럼 노래를 불렀지만 가슴은 비어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유리처럼 굳어 잠겨 있는 시간보다 진한 아픔을 느껴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이는 마당의 키 작은 나무들

빗물이 되어 다가온 시간이 굽이쳐 나의 곁을 떠나면

빗물에 꽃씨 하나 흘러가듯 마음에 서린 설움도 떠나


노래와 피아노 소리가 멈춘 뒤에도 게이2와 게이3은 계속 춤을 춘다. 노인이 입을 연다.


노인 그 남자는 내 직장 상사였어.


게이1 네?


노인 부장님이었지. 나 보다 세 살 많은.


게이1 휴우, 이제야 제대로 된 얘기가 나오나 보네.


노인 그 때 나는 30대 중반이었어. 세상이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은 시절이었지.


게이1 둘 다 미혼이었어요?


노인 나는 유부남이었어. 일찌감치 결혼했으니까. 부장님은 미혼이었어.


게이1 이야, 간질간질 하네요.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어요?


노인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어. 그냥 흔하디흔한 30대 후반의 아저씨 같은.


게이1 에이, 30대 후반이 무슨 아저씨에요.


노인 그 때는 그랬어. 30대에 들어서면 아저씨였지. 이미 세상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게이1 그래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노인 그냥, 부장님이 나를 많이 도와줬어.


게이1 뭘 어떻게 도와줬는데요?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노인 내가 하는 업무를 살펴주고, 일하는 요령도 가르쳐주고,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고, 가끔 커피도 사주고, 회식자리에서 챙겨주고, 야근할 때는…….


게이1 그게 뭐에요. 로맨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냥 평범하고 지루한 샐러리맨들의 직장 생활이잖아요.


노인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가끔 술을 마셨어.


게이1 단 둘이?


노인 단 둘이.


게이2와 게이3이 춤추기를 멈추더니 무대 앞쪽 테이블에 앉는다.


게이3 술 좀 더 마시자. 안주도 먹을까?


게이2 좋아. 과일안주로 하자.


게이3이 사장에게 술을 가지러 간다.


노인 부장님은 먼저 퇴근해서는 한강 공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소주와 안주를 앞에 잔뜩 쌓아놓고서.

게이3이 사장에게서 술과 안주를 받아가지고 온다.


노인 내가 오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 어린애처럼. 그 모습에 난 매번 웃음이 터지곤 했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오던 게이3이 게이2에게 장난스러운 몸짓을 해 보인다. 게이2가 소리 내어 웃는다.


게이3 자아, 여기 나왔습니다.


게이2 와, 완전 맛있겠는데?


게이2와 게이3은 테이블에 앉아 다정하게 술을 마시며 안주를 먹는다.


노인 지금도 눈에 선해. 한강 둔치에서 바라보던 빛나는 도시의 야경. 새까만 하늘에 어중간히 떠있던 새하얀 구름. 멀리 당산철교 위를 지나가던 2호선 전철 소리. 조금 눅눅했던 강바람을 따라 풍겨오던 비릿한 민물냄새. 그리고 혀끝을 찌르는 소주의 독한 맛. 마치 그 모든 게 생전 처음인 것처럼.


게이2와 게이3은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마치 무슨 볼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한가롭게 관객들을 이리저리 바라본다.


노인 저 두 사람, 정말 좋아 보여.


게이1 맞아요. 정말 그래요.


게이1이 게이2와 게이3에게 다가간다.


게이1 부장님은 게이였어요?


노인 모르겠어. 어쩌면 부장님도 확신할 수 없었는지 모르지. 나처럼.


게이1 아, 그건 좋지 않은데.


노인 어째서?


게이1 불확실과 불확실이 만났으니 잘 될리 없죠. 그나마 확실했던 것까지 뒤죽박죽되어 버렸을 걸요.


게이2 오늘 참 좋은 밤이야.


게이3 그래, 모든 게 참 평화롭네.


게이2 이곳에만 오면 모든 걱정이 사라져.


게이3 모든 게 선명해지지.


노인 그곳에 가면 좋았어. 모든 게 평화로웠어. 걱정도 사라지고, 모든 게 선명해졌지.


게이1 그건 그곳이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노인 현실이 아니라니? 한강 공원이?


게이1 마치 이 술집처럼요. 보세요. 여기가 현실처럼 보이세요? (웃는다.)


노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노인 (관객들을 가리키며) 현실이 아니라면 이게 다 뭐겠어?


게이1 이곳은 망망대해 한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에요. 또는 무균질의 실험실이죠. 아니면 지구 밖으로 날아가는 진공의 우주선이거나.


게이1이 웃음을 터트린다. 게이2와 게이3도 서로 귓속말을 하면서 웃음을 터트린다.


노인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은, 현실이잖아.


게이1 현실이요? (웃으며) 그 나이가 되도록 본인이 게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이?


노인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 (게이2와 게이3을 가리키며) 여기 다른 게이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들.


게이1 글쎄요. 게이가 아닌 남자들도 이곳에서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죠. 흔한 일이에요.


노인 그럼 자신이 게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지?


게이1 솔직히 말할까요? 알 수 없어요. 누구도 백퍼센트 확신할 수 없죠. 결국에는 의지가 중요해요.


노인 그럼 자신의 의지로 게이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자신의 의지로 게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다 선택의 문제라고?


게이1 음, 글쎄요. 선택의 문제를 넘어서는 의지도 있는 거예요.


노인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도통 말장난 같아. 그럼 성정체성은, 대체 그건 뭐지?


게이1 (진저리를 치며) 아이구, 또 그 놈의 성정체성. 정말 거창하고도 지긋지긋한 단어에요, 그렇죠? 영혼이 있다고 믿었던 고리타분한 과거 시대의 유산이죠. 영혼에게도 떡하니 성기가 달려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유물론자들. 자기 안에 무언가 변하지 않는 단단한 본질이라도 있는 것처럼 유세를 떨고 싶어 하는 관념론자들. 그런 모순된 집요함이 상황을 더 조잡하게 만들 뿐인데 말이에요. 그냥 간단하게 취향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취향이야 말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혼종이자 중립국이죠. 만약 인간이 자유롭다면 그건 오직 취향에 관한 얘기일 뿐이에요. 우리는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어요.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남장여자든, 여장남자든, 트렌스젠더든, 시스젠더든, 바이너리젠더든, 논바이너리젠더든, MTF든, FTM이든, 트렌스페미닌이든, 트렌스메스큘린이든, 에이젠더든, 젠더리스든, 그레이젠더든, 데미젠더든, 안드로진이든, 뉴트로이스든, 바이젠더든, 트라이젠더든, 젠더플루이드든, 젠더플럭스든, 옴니젠더든, 멀티젠더든, 젠더퀴어든, 젠더논컨포밍이든, 젠더베리언트든, 젠더뉴트럴이든, 사디스트든, 마조히스트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노인이든, 어린애든, 짐승이든, 죽은 사람의 시체든…….


사장, 게이2, 게이3이 일제히 돌아보며 저지한다.


사장, 게이2, 게이3 워워워.


사장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관객들을 둘러보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게이2 모든 이성애자들이 널 경멸할 걸.


게이3 모든 동성애자들이 널 증오할 거야.


게이1 그러라지, 뭐. 내 말은, 모든 게, 다, 개인의 취향 문제라는 겁니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다른 것만큼이나 동성애자와 동성애자도 서로 다르다는 말이에요. 우린 그저 모두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뿐이죠. 오롯이 혼자서 말입니다.


사장 (혀를 차며) 그래 널 보니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알겠다.


게이1 대체 취향이라는 게 뭐겠어요? 가볍게 즐기고, 좀 몰두도 해보고, 죽네 사네 하다가도 또 변하기도 하고 그런 거지. 심각할 거 없다니까요. 충성할 필요 없어요. 자랑하거나 선언할 필요는 더더욱이나 없다구요. 그런데 요새는 침대까지 공적인 무대로 만들고 관객들을 끌어 모아야 직성이 풀리지. 솔직히 때로는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은밀한 취향도 필요한 건데 말이야. 그게 바로 또 들쩍한 묘미거든. 하지만 이제 취향은 취향을 넘어 주장이 되고, 주장은 주장을 넘어 신념이 되고, 신념은 신념을 넘어 이념이 되고, 이념은 이념을 넘어 종교가 되고, 종교는 종교를 넘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 줄 알겠어요? 게이들이 점점 늙어가고 있는 거예요. 꼰대가 되어 가는 거야. 죽을 때가 된 거지. 이것 봐. 이렇게 연로하신 분까지 혹시 자신이 게이가 아닐까 고민할 정도로 동성애는 대중화가 되었어.


사장 어쩔 수 없잖아. 우리는 그 취향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게이1 (고개를 저으며)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어요. 너무 멀리.


게이3 원래 50을 얻기 위해선 100까지 나아가야 해.


게이1 아니, 100, 200, 300, 더 더 더 나아가고 싶어 하지.


게이2 나아가야지. 평등해질 때까지.


게이1 평등을 원하는 게 아니야. 정복하고 싶은 거지. 자격지심이 갑자기 교만으로 변해버린 거야.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어진 거지. 뭐, 좋아.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보다 우월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모든 이성애자들을 정복한 다음에는, 더 이상 정복할 이성애자들이 남아있지 않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결국에는 스스로 이성애자가 되고 싶어질 거야. 그래야 자신이 정말 완전하다고 느낄 테니까. 그리고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지도 모르지.


사장 평등해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야?


게이3 아니면, 평등해지려는 노력이 나쁘다는 거야?


게이2 넌 마치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는 것 같구나.


게이1 아니, 난 모두가 실패하기를 원해.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 자신을 누구라고 믿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이 말이야.


게이2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거야.


게이1 우리는 어차피 죽어야 하는 걸.


게이3 하지만 죽기를 바랄 수는 없어.


게이1 (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모두 그걸 바라고 있어.


노인 저기, 난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게이1 (정색하며) 그러니까 제 말은 할아버지는 그 때 부장님하고 호텔로 갔어야 했다는 거예요.


사장, 게이2, 게이3 아아, 그건 맞는 말이야.


노인 호텔이라고?


게이1 뭐, 모텔도 좋구요. 그 시절에 여관밖에 없었다고 하면 싸구려 여관이라도 좋아. 어쨌든 확인해 봤어야죠. 둘이 떡을 쳤어야 한다구요. 취향은 직접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안에 넣고 혀로 맛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니까요.


노인 (잠시 침묵) 실은 갔었어.


게이1 어디를요?


노인 여관 말이야.


게이1 정말이에요?


노인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둘 다 취해있었거든. 그래서 부장님이 좀 쉬었다가자고 해서…….


게이1 (웃으며) 캬, 정말 고전적이야. 클래식해. 무슨 도시 전설 같아. 뭐, 좋아요. 그래서요?


노인 그곳은 막다른 골목 가장 안쪽에 있는 싸구려 여관이었어. 방을 비추는 노란색 조명은 침침하고, 온통 붉은 색 벽지에, 바닥에는 격자무늬의 회색 카펫이 깔려있었지. 창문 전체를 가리고 있던 보라색 커튼 사이로는 앞 건물의 번쩍 거리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보이고…….


게이1 아 참, 그런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둬요. 추억에 잠기지 말라구요. 자, 보세요. 방에 침대가 있었죠?


노인 있었어.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침대가.


게이1 거기서 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죠.


노인 우리는 침대에 앉았어.


게이1 나란히?


노인 그래, 나란히.


게이1 그 다음에는요?


노인 옷을 벗었지.


게이1 과감하시네. 그리고는요.


노인 서로를 마주 봤어.


게이2와 게이3이 서로 마주본다.


게이1 그래서요?


노인 한참을 마주 보고 있었어.


게이1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노인 글쎄, 그냥, 그냥, 무슨 일이, 무슨 일이든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피할 수 없을 만큼, 변명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일이.


게이1 중요한 일.


노인 내 인생 전체를 바꿀.


게이1 인생 전체를.


노인 단 한 번이라도.


게이1 단 한 번.


노인 난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어.


게이1 좋아요. 나쁘지 않은데요. 그리고는요?


노인 부장님의 숨소리가 들렸어. 숨결이 느껴졌지. 내 얼굴 가까이에. 점점 더. 점점.


게이2와 게이3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게이1 키스했어요?


게이2와 게이3의 입술이 거의 닿을 듯 말 듯하다.


게이1 했어요?


노인 (큰 소리로) 난, 난 집사람을 사랑해요.


게이1, 게이2, 게이3, 사장까지 모두들 하던 동작을 멈추고 노인을 바라본다. 잠시 침묵.


노인 내가 그렇게 말했어.


게이1 아니, 왜요?


노인 모르겠어.


게이2와 게이3이 소리 내어 웃는다. 사장은 헛기침을 한다. 게이1은 화가 치솟는다.


게이1 이런 씨발, 비겁하게.


노인 모르겠어.


게이1 겁에 질려서 오히려 상대방을 모욕하고.


노인 모르겠어.


게이1 뻔뻔하게 자신만 발을 쏙 빼다니.


노인 난 정말 모르겠어.


게이1 그리고는 이제 와서 자신이 게이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구요? 할아버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노인 난, 그저 나도 모르게…….


게이1 만약 평생 게이로 살았어도 자신이 혹시 이성애자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고 했겠지.


노인 아니, 나는....


게이1 여관 침대에서 여자 옷을 다 벗겨 놓고서 그 면전에다 대고 난 남자를 사랑해요,라고 했을 걸.


노인 (침묵)


사장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죠?


노인 부장님은, 그대로 모텔을 나갔어. 한 마디도 없이. 그리고 다음날 바로 회사를 그만 뒀지. 그 뒤로 다시는 부장님을 만나지 못했어.


게이2 (게이3에게) 부장님은 게이였을까?


게이3 글쎄. (게이2에게) 부장님은 지금도 게이일까?


게이1 글쎄.


사장 그래서, 여기 어르신은 게이인 거야 아닌 거야?


게이1 참 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자기가 게이라는 걸 필사적으로 암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는 걸 필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에잇,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는 이제 그만 해요. 어차피 제자리를 돌고 도는 얘기일 뿐이야. 난 질렸어. (노인에게) 아시겠어요? 난 이제 질렸다구요. 본인이 게이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직접 결정하도록 하세요.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려고 하지 말고. 난 이제 이런 시답지 않은 얘기는 그만 두고 기분 전환이나 해야겠어요. (딴따라에게) 딴따라, 노래 한 곡 부탁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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