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켜자 화성 암반수 생수 광고가 끝나고 9시 뉴스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무지개 빛깔의 9시 저녁 뉴스 로고가 몇 초간 번쩍이더니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타났다. 아나운서는 빨간색 정장에 빨간색 모자를 쓰고 그 어느 때보다 사뭇 비장한 표정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시 저녁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1시간만 있으면 어제 예고되었던, 행사인지, 시위인지, 테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일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이미 여러분 모두 이 문제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그간 사태의 진행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AI와 인간 협의체인 최고 재판소의 최종 판결에 따라 우리 사회는 자살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며 가장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데 뜻을 모으고 안락사 허용 범위를 점차 확대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말 그대로 누구라도 안락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사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자는 자살의 이유를 설명할 의무조차 없지요. 그러니까 허가제인 것이 아니라 신고제인 것입니다. 그 어떤 기관이나 단체도 안락사 신청자에 대한 조사나 검열이나 규제를 하지 못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물론이고 가족조차도 자살을 말리거나 결심을 철회하도록 회유하는 것은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철저히 금지되어 있구요. 아시다시피 자살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24시간 운영 중인 안락사 센터에 가서 본인 확인만 하면 그날로 바로 안락사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1시간이면 안락사에서 화장까지 곧바로 이루어지도록 자동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요. 하지만 모든 자살자가 안락사 센터를 이용하는 건 아닙니다. 전체 자살자들 중 10% 정도의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자살을 더 선호하죠. 그들은 안락사 센터에서 자살하는 게 번잡하고 요란하고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전히 자살에 대한 일종의 국가 통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살에 대한 개인의 주체성과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국가에 대한 의존성을 높임으로써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거지요. 뭐, 언제 어디서나 사회를 불신하는 고독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어쨌든 자살자가 자연사를 앞지른 지는 이미 까마득히 오래되었고, 현재는 인구의 30% 정도가 매년 자살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50세 이상의 사람들의 70%가 자살하고 있고, 10세 이하의 아이들의 자살도 흔한 일이 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4살짜리 아이가 안락사 센터를 이용한 최연소 자살자의 기록을 갖고 있죠. 인구 소실이야 잉큐베이터 출산을 통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습니다만, 어쨌든 주목할만한 유의미한 수치에 도달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시류에 대해 찬성하는 건 아닙니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 제도의 원리주의적인 극단성과 국가의 무책임함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살이 지나치게 과열되고 있으며 국가가 최소한의 관리마저 방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오늘날 다른 모든 쟁점에 있어서 원만하게 합의에 도달한 우파와 좌파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슈가 바로 이 안락사 문제입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낙태 문제로 우파와 좌파가 치열하게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이를 출산한 후에라도 탯줄을 자르기 전이라면 죽여도 살인이 아닌 낙태로 본다는 데 두 진영이 합의하면서 원만한 해결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로는 오직 이 안락사 이슈만을 두고 두 진영이 오랫동안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 왔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안락사 관리 정책'을 공약으로 내 걸었던 정권이 집권에 성공하면서 안락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불거진 것입니다. 이번 정권이 발표한 안락사 수정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10세 이하 아동에게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 그러나 10세 이하 아동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죠.
둘째, 임신한 여성의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 낙태를 한 후에 안락사를 받으라는 것인데, 이용자의 편의를 무시한 비효율적인 탁상공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셋째, 안락사 결정 후 3일 간 재고의 시간을 갖는다. - 국가에게는 주권자인 개인의 자살 결정을 지연시킬 만한 아무런 법적 도덕적 권리도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지요.
정부의 입장이 충격적이리 만큼 급진적이긴 합니다. 처음부터 많은 우려가 있었고 역시나 현장에서는 강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항의와 소요와 폭력 사태가 끊이질 않았죠. 하지만 정부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급기야 한 달 전부터 안락사 지원자들은 안락사 센터의 이용을 전면 거부하고 있으며 '자살 연대'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공개적인 행동을 예고했습니다. 바로 오늘 밤 10시에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전면적인 의사 표명을 하겠다는 것이죠. 그들이 어떤 방식을 택할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 당국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벌써 9시 40분이 되었군요. 그럼 이만 중앙로 현장으로 마이크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현장에 있는 리포터 나와주세요.]
스튜디오를 비추던 화면은 200-300층의 초호화 빌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중앙로 현장으로 바뀌었다. 카메라는 번쩍번쩍 빛나는 불빛과 광고판으로 번화한 중앙로를 성층권에서부터 당겨서 잡다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가교 위에 서 있는 리포터 앞에서 멈추었다.
[네, 저는 지금 중앙로 현장에 나와있습니다. 이제 '자살 연대'가 예고한 시간이 20분 정도 남은 가운데 중앙로는 긴장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시위의 참가자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시위를 할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서 당국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현재 이들의 시위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중앙로를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당국에서도 손을 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며 그저 교통정리와 안전사고 방지에만 힘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10분 전 '자살 연대'는 '자살 자유 권리 장전'을 온라인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첫째, 실존적 인간으로서 자살할 자유와 권리는 다른 모든 자유와 권리를 앞서는 첫 번째 기본권이다.
둘째, 나이, 계급, 인종, 젠더, 종교 혹은 그 밖의 조건들로 인해 안락사의 자유를 침해받거나 차별받지 않는다.
셋째, 국가는 국민의 자살권을 보장해야 하며 더 나아가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안락사를 지원할 마땅한 의무가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은 현재 정부가 내세운 수정안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아, 여러분, 지금 바로 10시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중앙로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요? 아직까지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습니다만, 아, 잠시만요. 혹시 들리시나요? 어떤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들려오는데요. 그리고, 글쎄요, 아니, 여러분, 여러분, 저기 보세요. 공중에서 무언가가 떨어집니다.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 아니, 셀 수 없이 많이, 아, 저건, 사람, 사람들이에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사람들이,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보이시죠? 세상에, 마치 온 세상에 검은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노인들, 어린 아이들도 보입니다. 두개골과 뼈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로 이곳은 마치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 같습니다. 완전히 아비규환의 상황입니다. 새까만 시체 위로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붉은 피 위로 피가 넘쳐흐릅니다. 죽음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것만 같습니다. 빌딩들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쌓이고 쌓인 시체들이 자신들의 무게로 인해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눈앞에 펼쳐진 충격과 공포로 인해 구경하던 시민들 중 일부가 충동적으로 자살에 합류하는 사태까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던 경찰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구별이 무의미할 지경이에요. 아아, 여러분, 방금 온라인에 '자살 연대'의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제가,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잘 보셨습니까. 우리 자살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무엇을 하지 않았었는지 말입니다. 오늘 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제한이나 관리를 받지 않는 자살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을 때까지 매일 밤 공개적으로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물론 정부는 우리를 막으려 하겠지만 헛된 시도라는 걸 미리 말씀드리죠. 중앙로를 폐쇄하면 다른 길에서, 다른 길을 모두 폐쇄하면 각자 자신의 집 앞에서라도 우리는 이 일을 해치울 테니까요. 자, 이제부터 모두들 똑똑히 보세요. 이제 자살은 안락사 센터 안에서가 아닌 일상에서, 생활 구석구석에서, 바로 모두의 눈앞에서 공공연하게 만연할 테니까요. 삶이 우리의 자살을 감싸주지 않겠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삶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생각입니다. 대놓고 우리의 선택을 전시하고 선전할 생각이에요. 자살을 전도하고 신도들을 모집하겠습니다. 지금도 많은 지원자들과 대기자들이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으며,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지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끝까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살을 계속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리포터는 문득 말을 멈추고 어딘가 먼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별안간 가교 아래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에 있는 아나운서를 비추었다. 아나운서는 빨간색 모자를 침착하게 고쳐 쓰고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속보입니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정부가 '안락사 관리 정책'을 전면 백지화 하겠다고 방금 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부의 '안락사 관리 정책'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동안 안락사에 문제를 제기해 왔던 유력 인사들도 안락사의 필요와 정당성을 무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이번 싸움은 '자살 연대'의 완전한 승리로 돌아갔으며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제한받지 않는 안락사의 자유와 권리는 이제 우리 민주주의의 확고한 기초이자 기조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파와 좌파를 구분해 주는 마지막 의제가 사라짐으로써 우파와 좌파의 대립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했던 공허하고 끝없는 반목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완전한 합의의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은 자유와 인권의 이정표를 바로 세운 인류 혁명의 날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어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안락사 센터는 내일부터 다시 문을 열고 정상 운행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안락사 센터는 내일부터 24시간 정상 운행됩니다. 이용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니 안락사를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하시기 바랍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