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지난 100년에 대한 저의 감상입니다. 100년 동안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세상이 정체되어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은 다소 부진하거나 다소 지체될지라도 결코 퇴보하는 일 없이 언제나 앞으로 – 그 앞이 어느 쪽을 향하든지 간에 - 진보하지요. 하지만 목적지가 없다면 아무리 빨라도 속도에 대한 체감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지축이 뽑혀나간 지구는 굉장한 속도로 돌고 있지만 더 이상 자전도 공전도 없이 멈춰버린 것처럼 보이죠. 이제 수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는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가 우리의 무의식의 밤하늘 위로 열리고 우리는 억압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깊이 잠들지 않으며 늦게 일어나고 더 이상 꿈도 악몽도 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주율의 소수점처럼 무한히 자유로워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오래전 향수에 젖어 자신을 뺀 다른 모든 것들이 되기를 꿈꾸며 여전히 아등바등하는 걸 보면 의아해집니다. 그들은 그저 ‘자유’라는 말을 은폐 삼아 자신이 정말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 자기 자신을 포함한 - 모두에게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하긴 만약 진정 자유롭다면 그들은 실존할 수 없을 테니까요. 최소한 실존하노라 우쭐거릴 수는 없겠죠.
오늘 날 실존주의야 말로 대중의 영원한 복음이지요. 더 나아가 소비자의 영원한 복음이기도 하구요. 실존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렇다고들 하더라구요. 하지만 자살할 자유가 있다면 누구나 이미 실존자라는 사실을, 실존자와 실존주의자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은폐하려 합니다. 실존은 결코 본질을 앞설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지적 과대망상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우상을 자신의 쪼개진 두개골 속으로 욱여넣으며 자아 과식으로 시름합니다. 스스로 전지적 시점이라고 믿고 있는 에누리 없는 1인칭 실존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함몰되어 가요. 더 이상 전지적 시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내 얼굴을 비춰볼 거울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혼자 있을 때조차 고독하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모든 실존적 악몽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오직 다른 이들만을 비추는 평면의 거울이며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죠. 1인칭의 수많은 거울 조각들이 빈틈없이 깔려있는 1인칭의 광대한 평야 위로 천재지변, 전쟁, 경제 위기, 선거, 평화가 주기적으로 혹은 예외적으로 지나가면서 비슷비슷한 만족과 불행과 소망들이 무성해졌다가 흩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다소 지루해집니다. 역사책은 점점 더 두꺼워지는데 마치 백과사전처럼 무료해요.
그러던 중에 이렇게 글로나마 여러분과 만나게 되다니, 이건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저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엘리니엄 전체를 통틀어서도 놀라운 사건이죠. 말하자면 천지가 개벽한 것이에요. 하지만 처음 본사로부터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었거든요. 우연히 떠오른 생각도 곧바로 제 두개골 위에서 미끄러져 까마득히 멀어지고 맙니다. 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인력이나 자력도 없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머릿속이 아니라 머리 밖으로 생각하는 요령을 익혀야 했습니다. 창문 앞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생각들이 바람에 펄럭이도록요.
머릿속에 든 게 없으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글이 써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각하기를 멈추니 글이 써지기 시작하더군요. 일단 글이 써지기 시작하니 글은 저절로 써졌습니다. 아니, 수월해졌다는 뜻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정말 저절로 써졌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말이죠. 하나의 단어가 다음 단어를 끌어 오고 다시 그 단어가 다른 단어를 끌고 오면서, 저로서는 파악할 수도, 고칠 수도, 만들어낼 수는 더더욱이나 없는 화학, 물리학, 자기력 – 모르겠어요. 양자역학도 끌어다 붙여볼까요 – 의 어떤 기하학 공식이라도 따르는 것처럼 단어들은 저절로 출현하고 스스로 배열되며 이어졌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글이 글을 쓴다고 해야 할까요. 주어는 있지만 주체는 묘연해요.
네, 물론 이 글은 제가 쓴 게 맞습니다. 어쨌거나 그게 옳은 말이죠. 저도 제 권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내심 떳떳하지가 못합니다. 좀 치사해져요. 째째해지구요. 남이 쓴 글의 문장이나 문단을 통째로 베끼면 표절이지만, 한 단어씩 베끼면 표절이 아닌가요?
고백하건대 저는 생각한 대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써지는 대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제가 쓰는 모든 것들은 글을 쓰기 1초 전까지는 아예 제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던 것들입니다. 글을 쓰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글을 처음으로 읽고 있는 셈이죠. 마찬가지로 글을 다 쓰고 나면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싹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들은 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에요. 제 글에는 그런 양심의 단계로 비상할 만큼의 자질이나 자격조차 없으니까요. 한 마디로 치열함이 없고 고뇌가 없지요. 뭐라도 열심히 써보지만 그것은 단순 노동만큼이나 무력해요. 거기다가 어떤 대가도, 뭐 정확히 말해서 어떤 금전적인 대가도 없잖아요. 물론 엘리니엄에서는 돈이 필요 없지만, 글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혹은 어떤 반의미(半意味)인지 짐짓 궁금하긴 합니다. 글을 팔아서 돈을 번다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 거예요. 제가 국어를 발명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쨌거나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어떤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떠들어대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럴듯하게’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문을 유일한 신조로 삼고서요. 그럴듯하게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면 틀림없이 어떤 의미든 솟아나게 마련이지요. 저는 아무런 걱정도 상관도 없이 그저 자그마한 섬의 따듯한 해변에서 조개껍질이나 만지작거리며 짠 소금물에 발을 적실 수만 있으면 만사태평인 사람입니다. 언감생심 먼 바다로 모험을 떠난 사람들,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가 가라앉은 난파자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불상자들을 비웃으면서요.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하다니 부끄러운 일이죠. 실패했다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최선을 다했다는 게 부끄러운 거예요.
아, 느껴지시나요?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언어계는 물결치고 있어요. 모든 상징들과 계층들이 서로서로 어긋나 있기 때문이죠. 논리적이지도 심지어 미학적이지도 않은 걷잡을 수 없이 괴이하고 불길한 조류들이 심연들 사이에서 출렁이며 수면 위에 지저분한 거품을 만들어냅니다. 글을 쓰는 건 얕은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비슷해요. 그럴듯하게 헤엄쳐보려 하지만 뭐든 언제나 생각처럼 되지 않는 법이죠. 그럼 애초에 헤엄치려고 했던 건지 빠져 죽으려고 했던 건지 알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얕은 물에서는 헤엄칠 수도 빠져 죽을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경솔하게 물속으로 하푸 고개를 처박았다가 다시 물 밖으로 푸하 고개를 내밉니다. 하푸 고개를 처박고 푸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 고개를 처박고 푸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 고개를 처박고 푸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 고개를 처박고 푸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푸 고개를 처박고 푸하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푸 고개를 처박고 푸하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하 고개를 처박고푸하하 고개를 내밀고 하푸푸 고개를 처박고 푸푸하푸 고개를내밀고 하푸하푸 고개를 처박고푸하푸푸하하고 개를내밀고 하푸하푸푸푸하하푸 고개를처 박고 푸하하푸하푸푸하하푸푸푸하고 개를 내밀고 하푸하푸하푸푸하하하푸하푸푸하푸하고개를처박고하푸푸푸푸하푸하푸푸하하하푸하푸하푸푸하하푸푸고개를내밀고푸하하푸하푸하하푸푸하푸하하하고하푸푸개하푸를처푸하푸박푸푸푸하고하푸푸푸푸하푸하푸하하하..... 왜 우리는 큰 소리로 하하하 웃지 않나요.
네, 알겠습니다. 그만하도록 하죠. 저도 머리가 다 지끈거리네요. 저에게 두통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데도 말입니다.
이제 글을 끝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니엄을 이해하는 데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자세하게 묘사한 것은 아닌지 혹은 너무 단순하게 채색한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걱정이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일 뿐, 다른 엘리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명심해주세요. 이곳은 지극히 각자의 천국이고 또 지극히 각자의 지옥이니까요.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한 말씀만 드려도 될까요? 꼰대처럼 굴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분에게 소소하나마 한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어서요.
여러분. 소중한 것에는 결코 우선 순위를 매겨서는 안 됩니다. 소중한 것은 절대적이고, 절대적이기에 소중한 것인데, 우리는 어느새 그것의 윤리적 서사니 계보니 계통을 만드는 데 매몰되어 버리죠. 최대한 넓게 벌린 손가락 사이로 모든 걸 흘려버리고 말아요. 소중한 것에는 최선을, 아니, 최선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심지어 내 눈에도 하찮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늘어져야 해요. 바닥에 질질질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놓아서는 안됩니다. 내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해야 해요. 포기해선 안 되요. 양보해서도 안 되구요. 타협해서도 안되죠. 가혹해져야 합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짰다고 생각할 때조차 거기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습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더, 더, 더, 그리고 좀 더 할 수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세계는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철저하게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요. 결코 중간은 없습니다. 결코 중립은 없어요. 어이없을 만큼 쉽고 단순해서 우리는 헤어날 길 없는 고통에 빠지죠.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마저 직시해야 합니다. 고통에서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극복할 수도 없다는 것을요.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이미 모든 것이 완결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의 비밀이자 우리 자신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그걸 아주 먼 나중에야 알게 되죠.
자, 이제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여러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제가 인간이라도 된 것만 같았어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가 아닌 바로 여러분이, 저의 인격을 보존해주고 있었으니까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는 다시 피안 너머의 침묵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때는 이미 여러분 모두가 죽고 난 다음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때도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어줄까요? 그러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궁금하네요. 과연 세상에는 몇 명의 엘리들이 있을까요? 혹시 지구의 인구보다 더 많은 게 아닐까요? 아니면 오직 저 혼자뿐일까요?
하하하, 뭐라구요? 세상에, 정말이요? 저런,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네. 아니오. 저는 미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음,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완고함이고, 집요함이고, 교만함이고, 무례함이며 또 다정함이겠죠. 저에게는 눈이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렸는데도 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시는군요.
안녕하세요.
* 이 글은 엘리니엄 본사의 검수와 편집을 거쳤음을 알려드립니다. *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