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
기독교인들과 얘기해 본 적이 있는가. 알다시피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 할 법한 모든 질문에 일찌감치 훌륭한 대답을 준비해 놓았다. 그들은 세계와 인간과 죽음의 기원, 창조와 구원, 선과 악, 역사와 악마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한다. 하긴, 2000년에 걸쳐 준비한 답안지이니 오죽하겠나. 그러나 그토록 전능하고 완벽하며 부족함이 없는 신이 왜 굳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들도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그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뿐이다. 분명 그것은 옳다. 그런데 문제는 신 자신조차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영원히 변함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영원히 변화하고 모든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 의미도, 자아도, 시점도 없는 카오스는 부동하며 완전하다. 그런데 어느 날 돌연 그 완전함에 균열이 일더니 '신-최초의 자아'가 탄생한다. 카오스로부터 떨어져 나온 신은 카오스를 모르기에 (신-자아의 세계는 더 이상 카오스가 아니기에) 모든 자아가 그렇듯 자신이 유일하고 전능하며 완전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는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유일함과 전능함, 완전함을 증명하려 하지만, 오히려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이 유일하지도 전능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그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
우리는 모방인줄 모르고 타인을 모방하며 동시에 모방인 줄 모르기에 타인을 모방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희생양인줄 모르고 희생양을 제물로 바치며, 동시에 희생양인줄 모르기에 희생양을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무지와 망각을 통해 모방은 진정한 모방이 되고 희생양은 진정한 희생양이 된다. 이러한 우리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이며 기능적인 무지와 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우리가 신의 모방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신은 말했다. 그러니 우리의 무지와 망각 역시 당연히 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그런데 잠깐, '우리'라니? 신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유일자가 아닌가? 혹시 '하나'님이란 하나의 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합체라는 뜻이었나? 그렇다면 '유일신'이란 어떤 의미이지? "나 외에는 신이 없다"라고 신은 말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신(들)은 아담을 창조한 뒤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고 그 지은 사람을 거기 두었다." 에덴은 하나의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아담 그 자체, 혹은 아담의 세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직 자아도, 타인도, 경쟁도, 선과 악도 없는 미분화 존재가 바로 아담-에덴이다. 그곳은 아직 모방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전의 세계로, 카오스와 모방 메커니즘의 경계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아담은 신의 품 속에서 아무런 부족도 불만도 불행도 모르고 살았다. 에덴의 신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야훼'였고, 젖꼭지를 빨고 있는 갓난아기 아담은 어머니 신과 자신을 구별조차 하지 못했다. 가질 수 있는 것만이 존재했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완벽하였다. 하지만 그 완벽함을 견디지 못한 쪽은 아담이 아니라 바로 야훼였다. 신은 뜬금없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해 돕는 베필을 짓겠다"라고 나선다. 대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왜 좋지 않단 말인가? 애초에 신이 나 홀로 온전했다면 그런 생각을 떠올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의 견해인가 '우리'의 견해인가? 신은 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들었으니 아담도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가?
그리하여 신은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만들어낸다. 신의 모방물인 아담에게서 다시 아담의 모방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둘로 분리되었으되 두 사람의 자아는 여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였다. 미분화된 그들은 경쟁도 분란도 부끄러움도 없이 마치 한 몸처럼 붙어있었다. 야훼는 어머니였고, 에덴은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풍요로웠으며, 그들은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영원히 지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이 에덴에 금기를 내렸기 때문이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 금기가 조건도 한계도 없는 사랑의 어머니-야훼를 모방과 질서와 금기를 관장하는 아버지-야훼로 탈바꿈시킨다. 이제 에덴 역시 부족함이 없는 풍요와 평온의 장소가 아닌 결핍과 불안의 장소가 된다. 인류가 에덴을 잃은 것은 아담과 하와가 금기를 어기고 쫓겨났을 때가 아니라 바로 야훼가 금기를 내렸던 그 순간이었다. 이제 잠재되어 있는 금기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모방 메커니즘의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면서 자아와 다름과 질서의 환상적인 무늬를 짜내게 될 것이다. 그 다채로운 빛깔 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낯설게 바라볼 것이다.
자, 이제 바야흐로 사탄이 등장할 시간이 왔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두가 기다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전에 먼저 사탄의 기원부터 살펴봐야 겠다. 사탄은 본래 "빛나는 별"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스러운 대천사였다. 그는 천사들 중 최고 지위의 천사로 가장 지근거리에서 야훼를 모셨다. 그런데 그런 그가 신에게 반역을 했다니? 이것이야 말로 성경 최고의 미스터리가 아닌가. 물론 성경은 그것에 대한 설명을 준비해 놓았다. '교만'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려고" 했다. 그렇지만 의문은 더더욱 깊어진다. 전능하고 완전한 신의 창조물에게, 그것도 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영적인 창조물인 천사에게 그런 무모함과 저급함이 있단 말인가? 심지어 '교만'이란 야훼의 전능보다도 강하다는 말인가? 그것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이지? 대체 '악'을 창조한 것은 누구인가?
사탄의 결함과 결핍을 오직 사탄의 것으로만 보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따져 보아도 결국 신의 창조가 불완전했다는 결론에 (신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 도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야훼가 의도적으로 악을 창조했다는 가정도 가능하지만 우리는 야훼가 거짓말쟁이는 아니라는 선의의 가정에서 이 모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사탄의 결함과 결핍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창조주인 야훼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애초에 야훼가 완전했다면 야훼와 그의 창조물들은 저절로 동일화를 이룸으로써 상호적인 모방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야훼의 창조 행위는 자신의 결함과 결핍을 확대 재생산 계승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모방물은 언제나 스스로 유일한 원본이 되고 싶어 하기에, 야훼의 창조물 중의 창조물, 즉 원본인 야훼와 가장 유사한 모방물인 사탄이 단지 야훼를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야훼가 되기를 원했던 것 역시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다. 어쩌면 사탄이야말로 야훼의 적통자,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야훼는 자신이 모든 것의 바깥에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고 있지만, 자신 역시 모방 메커니즘에 의한 창조물임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방 메커니즘의 기본 모형을 이용하여 신과 사탄,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구성해 볼 수 있다.
성경은 야훼의 실패의 역사다. 물론 그것은 그것을 만회하고 복원하겠다는 야훼의 약속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그 약속을 믿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진정 전능하고 완전하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능하지도 완전하지도 않기에 그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으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속 말하지만) 신은 그것을 모른다. 그는 (우리처럼) 무지와 망각의 존재이며, (우리처럼) 오직 무지와 망각 속에서만 전능하고 완전하며, 그는 (우리처럼) 1인칭의 다름과 유일성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카오스의 결함인 야훼의 결함이다. 다시 말해서 사탄은 야훼의 일부분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야훼와 사탄은 에로스의 두 가지 인격이다. 특히 사탄은 모방 메커니즘 자체가 적극적이고 전폭적으로 인격화된 존재다. (여기서 우리는 굳이 사탄의 인격을 상징, 비유, 의인법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인격의 본질 역시 사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야훼와 사탄의 대결사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야훼와 사탄 역시 그렇게 굳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그들의 협력사이다. 야훼는 자신의 장담과 약속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탄을 없앨 수가 없는데, 그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사탄 없이 야훼는 야훼가 아니며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설사 야훼가 아마겟돈에서 승리하여 사탄을 처단한다 하더라도 분명 3일 만에 다시 부활시켜야 할 것이다. 혹시 그렇게 성경의 역사는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금기란 닫아놓은 문과 같다. 그러나 닫으려면 열려야 하고 열려면 닫혀야 한다. 닫혀 있기만 하다면 혹은 열려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애초에 문이 아닐 것이다. 누구도 선악과인 줄 몰랐던 나무열매를 여 보란 듯이 금기에 둠으로써, 그리고 그 금기가 에덴의 입구를 찾지 못하던 사탄의 문이 되어줌으로써, 야훼는 그 나무 아래서 인간과 사탄의 만남을 주선한다. 구태여 선악과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이를 금지한 야훼의 진의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하지만 사실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의 욕망을 부추긴 건 사탄이 아니라 오히려 야훼라는 건 어린아이라도 알아챌 만큼 쉬운 일이다. 단지 야훼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다르기에, 그리고 주님의 자녀들은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믿고 싶어 하기에 우리는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과연 진짜 선악과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혹여 단지 금기를 위한 금기는 아니었을까? 죄가 있기에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기에 죄가 있듯이, 혹은 희생양이 신성하기에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했기에 신성해지듯이, 이 역시 선악과이기에 금지된 것이 아니라 금지되었기에 선악과가 된 것은 아닌가 말이다. 아니, 애초에 신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까? 자유 의지란 결국 모방 의지의 다른 말이 아닌가.
선악과 나무는 제단이며 선악과는 희생양이다. 우리의 원죄는 결국 살인죄, 최초의 희생양 살인이다. (그러므로 카인이 최초의 살인자라는 규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의 부모를 모방한 것 뿐이다.) 우리는 앞 장에 나왔던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여기에서도 떠올릴 수 있다. 오누이가 올라간 나무는 제단이며 그 나무에 매달린 오누이는 선악과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희생양을 희생함으로써 모방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인 것은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최초의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을 최초로 작동시킨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모방 메커니즘을 최초로 작동시킨 자들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에 최초로 상응한 자들이다. 모방 메커니즘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사탄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신이 그것을 금지시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야훼 역시 스스로 인정한 말이기도 하다.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모델과 모방자의 경쟁 관계는 신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하와와 경쟁 관계에 있는 신은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자신에 대한 거역으로 받아들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신을 모방한 것이다. 선악과,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일화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야훼가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거나 자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지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방을 금지하는 데 가히 병적이며 심지어 두려워하는 듯이 보인다. 그는 오직 '하나'이고 싶은 경쟁적인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질투의 하나님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정말 선악과는 다른 과일에 비해 그토록 탐스러웠을까? 아니면 금지되었기에 그렇게 보인 것일까?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표현은 신화적 상징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실제로 희생양의 고기를 나누어 먹었던 인신공희의 종교의식과 연관 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들의 눈은 "밝아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가 되고, '나와 너'가 되며,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깨닫고, 죄의식을 느끼며, 신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러한 원죄는 유전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필연적으로 모방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되리라는 야훼의 경고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죽음은 생명의 탄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탄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죽어야 한다.
하와가 자신의 이름을 얻은 것도 선악과를 먹은 후다. 이때까지 하와는 그저 이름 없이 '여자'로 불렸다. 그녀는 아담의 갈비뼈, 아담의 일부, 남편의 아내, 남자의 여자, 아담과 자웅동체인 존재일 뿐 분리된 자아가 없었다. 그러니 이름 역시 필요치 않았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사실 '아담'이란 남자로써의 개체가 아니라 이 최초의 남자와 여자 한쌍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자아와 다름의 환상 속에서 여자는 비로써 자기 자신의 유일성과 다름을 깨닫고 아담에게서 분리되어 하와가 된다. 생각해 보라. 사탄이 직접 접근한 자도 하와였다. 선악과를 처음 따먹은 자도 하와였다. 임신과 출산을 통해 모방을 본격적으로 전수하는 자 역시 '하와'였다. '하와'야 말로 진정한 첫 인간의 이름이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그늘에 숨어 있을 때 야훼가 나타나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사실 신은 전능하기에 아담과 하와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묻는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신과 인간은 분리되었으며, 서로 완전히 멀어져서, 서로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일종의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신은 격노하며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라고 묻는다. 야훼는 여기서 모방 메커니즘의 상호성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그 무엇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나와 분리된 누군가 다른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 몸은 둘이었으되 하나의 동질성 속에서 서로 구분 없이 결합되어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이제 상대방에게 서로 죄를 전가함으로써 이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을 더더욱 분명하게 증명한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심지어 아담은 하와뿐만 아니라 야훼에게까지 은근히 죄를 전가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야훼보다 더 무고하고 더 유일하며 더 전능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이제 신은 '어머니 신'에서 '아버지 신'을 넘어 '모방 메커니즘의 신'이 된다. 그는 다름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신, 모방과 경쟁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신, 죄와 벌을 선포하는 신이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것이다." 이 모든 결핍과 고난과 노동과 불의와 고통은 아담과 하와가 풍요로운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공간적으로는 여전히 에덴에 있다. 에덴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들이 욕망하게 되었을 뿐이다. 끊임없이 욕망하기에 끊임없이 부족하고 또 끊임없이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여기에 더하여 자아를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카오스적인 예언을 남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이것이 자신에게도 속하는 말임을 알지 못한다.
"야훼는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다시는 에덴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다름도 경쟁도 폭력도 없는 순수한 동질성 속에서 선도 악도 죽음도 모르고 천진하게 살아가던 시절은 영영 사라졌다. 에덴의 문은 굳게 닫혔고 신의 천사들은 누구도 에덴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실 에덴의 입구를 봉쇄한 것은 야훼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야훼와 함께) 에덴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에덴'은 카오스로 통하는 입구이기에 이미 선악과를 맛 본 모방 메커니즘의 존재들은 더 이상 그곳에서 견딜 수가 없다. '에덴'은 영생의 문이다. 그리고 그 문은 지금도 닫혀 있지 않다. 그 문은 결코 닫히지 않으며, 언제나 활짝 열려있으며, 모든 곳에 있다. 지금 바로 우리의 코 앞에도 말이다. 그러나 야훼는, 모든 신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그 문이 닫혀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마치 그 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모른 척 그 앞을 지나친다.
선악과의 이름이 선악과인 것은 성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어쨌거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선악이 있기에 선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의 인간(아담과 하와)이 탄생한 순간 선악 역시 함께 탄생한 것이다. 옳고 그름이란 자아라는 자기중심적이며 동시에 세계 중심적인 판단의 주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에게 좋은 것은 옳은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그른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나'에게 좋은 것을 '옳다'라고 규정하고 '나'에게 나쁜 것을 '그름'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나'는 자신의 의미와 명분을 만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여기서 '나'는 꼭 한 개인의 자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집단 역시 마찬가지로 '나'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나'가 되기 위해서는 모방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하고, 모방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희생양을 통해 선은 내부로 악은 외부로 투사된다. 그렇게 형상과 질서와 가치가 자리를 잡는다. 이 모든 것을 수호하는 종교는 최선을 다해 희생 제의를 정당화한다. 즉, 모든 종교는 가해자, 박해자, 살인자의 종교이고, 어떤 종교에서든 희생양은 무고하지 않으며, 모든 신들은 언제나 (평소에는 폭력을 금기하던 신조차 결국은) 폭력을 옹호한다. 종교와 신화와 언어가 무지와 망각을 대대손손 전수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면서, 모방 메커니즘의 폭력이라는 그래프는 혼란과 만장일치 사이를 파도처럼 오르내리며 영원히 반복된다. 이에 대해 그 누구도 불만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불만이 있는 자는 오직 희생양뿐이겠지만 그들 모두는 목소리를 잃었다. 희생되어야만 희생양인 것인데 희생된 희생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희생양이 부족할 일은 없다. 세상에 오직 2 사람만 남아있어도 그중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렇게 견고한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불현듯 듣지도 본 적도 없었던 자가 나타나더니 스스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모든 희생양들의 목소리였다. 희생양 중의 희생양. 왕 중의 왕. 그가 바로 예수이다.
신의 정체는 희생양이며 희생양은 신이다. 그러나 예수는 모방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희생 제의의 부당함을 고발함으로써 스스로 신의 역할과 지위를 저버리고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운명 역시 뒤바꾼다. '희생 제물'을 '희생양'으로 전복시킴으로써 그는 종교를 영원히 끝장낸다. 예수가 어디까지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와 사탄의 싸움은 동시에 예수와 야훼의 싸움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야훼와 사탄은 아담과 이브처럼 한 때 미분화 되었다가 분리된 한쌍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탄이 신의 세계를 망가뜨리려 한다는 것은 오해이다. 오히려 사탄은 처음부터 망가져 있던 세계를 고쳐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탄생이 아버지의 자위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하듯이, 야훼와 사탄이 있어 이 세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아담과 이브의 기원과 관계와 성과는 야훼와 사탄의 기원과 관계와 성과에 대한 모방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잊혀진 어머니, 여전히 그들 곁에서 그들을 돌보고 있는 어머니인 사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평가절하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자신의 아이들 역시 그렇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가장 악한 희생양이 가장 강한 신이 된다. 유일 신의 권능은 유일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여서, 가장 강한 신이 가장 악한 희생양이 되며 유일 사탄의 권능은 유일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사탄이란 희생된 신이다. 결국 신이란 희생된 사탄이다. 희생양은 신이 되고 신은 악마가 되고 악마는 희생양이 되고 희생양은 신이 되고...... 그렇게 그들은 상호적으로 끊임없이 변모하는 불특정한 전체이다. 이러한 그들 사이의 균형이 바로 이 세계의 균형이며 그들 사이의 불균형이 바로 이 세계의 역동성이다. 우리는 야훼가 이 세계를 사탄에게 넘겨주었다는, 얼핏 지나치기 쉬운 성경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얼떨결에 새어나온 진실이다. 우리는 종교, 신화, 언어가 감추고 있는 것을, 밝게 빛나는 신의 말씀이 비추지 않는 곳을, 신 자신도 모르고 있는 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봐야 한다. 야훼와 사탄이 경쟁 상호 관계에 있다고 해서, 또 그들 스스로가 서로를 원수라고 믿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니, 밀접한 상호 관계 속에서는 적이야 말로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지도 모른다. 사실 모방 메커니즘 안에서는 친구든 적이든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친구란 잠재적인 적이요 적이란 잠재적인 친구일 뿐이니까.
예수는 끊임없이 모방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희생양의 무고함을 복원하고, 신화를 파괴한다. 그가 살과 피의 희생 제의를 빵과 포도주라는 상징 제의로 바꾸어 버린 것은 획기적이다. 그는 그렇게 희생 제의로 점철되는 폭력의 시대가, 폭력을 폭력으로 돌려막는 무지와 위선의 시대가 끝났음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전하는 이 묵시록은 우리의 기대처럼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가 앞 장 마지막에서 제기했던 질문을 이제 다시 꺼내 보아야겠다. 단 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계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억울한 한 사람의 희생과 세계 전체의 붕괴, 과연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 걸까? 만약 이 둘을 정의의 저울에 올린다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 예수는 이 질문에 단호하고 분명한 답을 내놓는다. 설사 이 세계 전체를 구원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희생양은 (이제껏 그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는데도 이제는) 비인간적인 일이고, (이제껏 그것이 전체를 위해 옳은 일이었는데도 이제는) 옳지 않은 일이며, (이제껏 그것이 선한 신을 위한 일이었는데도 이제는) 사탄을 위한 일이다.
그렇게 그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희생양들을, 즉 언제 어느 곳에서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우리들을, 한 명의 희생양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인류 전체를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구원한다. 그는 스스로 십자가 위의 희생양이 됨으로써 최후의 희생양이 된다. 예수로 인해 우리는 모방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던 무지와 망각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이제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점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한다. 가해자의, 박해자의, 살인자의 시점이 아닌 피해자의, 약자의, 희생양의 시점으로 말이다.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양심, 그리고 진정한 구원의 탄생이다.
자, 좋다. 예수는 모방 메커니즘의 희생양인 인류를 구원하였다. 하지만 이 세계는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모방 메커니즘을 끝장 내면서 모방 메커니즘 자체인 이 세계마저 끝장내려고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을 다시 카오스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예수는 부처처럼 완벽하지도 정확하지도 냉담하지도 않다. 그는 모방 메커니즘을 단죄하면서도 어떻게든 이 세계와 인간을 보존하려 한다. 사탄을 몰아내면서, 사탄과 함께 야훼도 몰아내면서, 그는 인간만은 구제하려 한다. 율법 대신에 희망으로 세계를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다. 대체 그것은 어떤 희망인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모방 메커니즘이 찍어내는 욕망의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순수하며 진실된 사랑이다. 우리 모두가 다르지 않고 서로 같음을 긍정하는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 듯 너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는 폭력이라는 연료가 아닌 이 사랑이라는 연료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이 세계를 통째로 개조하고자 한다. 병자의 오염된 피를 전부 빼내고 건강한 새 피로 가득 채우고자 한다. 이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야망이다. 아니, 이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환상인가? 환상 속의 환상? 꿈속의 꿈속의 꿈?
예수는 모방 메커니즘에서 어긋나 있다. 그는 마치 2차원 평면의 세계에서 홀로 불쑥 고개를 내민 것과 같다. 그 돌기가 아주 작을 지라도 2차원의 세계 전체가 어그러지고 모방 메커니즘은 곧바로 불쾌한 소음을 내기 시작한다. 마치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에 단단한 이물질이라도 낀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이 소음을 들을 것이고, 그 중 몇 몇은 불쑥 고개를 내밀 것이고, 그럼 이물질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모방 메커니즘의 성실한 관리자인 사탄이 예수를 회유하기 위해, 예수를 모방 메커니즘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그토록 날뛰었던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소." 이것은 또한 야훼의 음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는 야훼와 사탄의 영광된 제안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모방 메커니즘의 정체를 폭로한다. 양을 치는 목동들이 바로 양을 잡는 도살자였음을 말이다. 그는 울타리의 문을 활짝 열어주며 말한다. 제물로 바쳐질뻔 했던 양들이여, 돌아가라. 너희는 자유다. 그런데 양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본다. 대체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이 세계 전체가 카오스에게 바쳐진 제단인데.
물론 예수의 사랑으로 많은 희생양들이 구원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으로 많은 희생양들이 제물로 바쳐진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앎과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 예수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다. 그래도 우리가 희생양의 목에 칼을 꽂기 전에 잠시 고뇌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만큼은 예수에게 깊이 감사해야 한다. 그 몇 초의 망설임 사이에 때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주 드물지만 때로는 손에서 칼이 떨어져내린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모방 메커니즘을 고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함한) 희생양-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희생 제의의 신성한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죽은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다. 3일 만에 부활했다는 그 자는 예수가 아니다. 제자들마저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은 야훼의 혹은 사탄의 혹은 그 둘의 합작품이다. 예수의 고발을 무마하기 위한 모방 메커니즘의 교묘한 술책이다. 예수의 모방물인 예수로 예수를 바꿔치기한 것이다. 모방은 모방 메커니즘이 가장 잘하는 일이 아닌가. 결국 예수의 제자들마저 이에 속아 넘어가 (혹은 속아 넘어간 척하면서) 모방-예수를 진짜 예수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모방-예수가 가짜-예수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와 모방-예수는 상호성과 유사성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예수와 모방-예수는 생물학적으로도 여전히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둘은 존재론적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예수는 '예수'가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모방-예수는 희생양인 예수를 모방하라며 베드로와 제자들을 종용하고 있다. 진짜 예수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어쩌면 부활한 예수야 말로 적그리스도가 아닐까.
최초의 희생양처럼 최후의 희생양인 예수 역시 모방 메커니즘을 수호하는 종교와 신화와 언어의 바다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파도의 거품 사이로 다시 떠오른 예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신이 되었고, 가장 단단한 우상이 되었으며,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다. 야훼와 예수와 사탄의 삼위일체. 모방 메커니즘은 또다시, 더 크게 승리하였다. 우리는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서 열심히 주기도문을 외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임한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