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성스러움 (2)

르네 지라르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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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폭력과 성스러움



옛날 옛적 깊은 산속에 어머니와 오누이가 오순도순 살았다. 가난한 살림 탓에 어머니는 매일 고개를 넘어 마을 장에 나가 떡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떡을 팔러 나가면서 낯선 사람에게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하곤 했다. 어느 날, 장터에서 팔다 남은 떡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는 첫 번째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어머니를 위협했다.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떡을 하나 던져주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두 번째 고개, 세 번째 고개에서도 호랑이는 계속 나타나 떡을 달라고 졸랐다. 결국 떡이 모두 떨어지자 호랑이는 어머니의 팔, 다리, 몸통을 하나씩 요구하더니 결국 어머니를 잡아먹고 말았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옷가지를 주워 입고 변장을 한 뒤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옷을 알아보고 얼른 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자세히 보니 변장한 호랑이임을 눈치채고는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가 마당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는 오누이를 찾아 마당을 뒤지다가 나무 아래 있던 우물에 비친 오누이를 발견했다. 호랑이는 우물 속의 오누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우물물이 흐려질 뿐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이 그림자임을 눈치챈 호랑이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있던 오누이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어떻게 올라갔니?" 호랑이가 묻자 오빠가 "손발에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지"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호랑이는 부엌에서 참기름을 가져와 발에 바르고 나무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그만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다. 그걸 본 동생이 웃음을 터트리며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 쉽게 올라올 수 있는데"라고 말해버렸다. 호랑이는 재빨리 마당에서 도끼를 가져와 나무를 찍으며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나무 위로 도망치던 오누이는 결국 나무 꼭대기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빌었다. "하늘님, 저희를 구해주시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새 동아줄이 내려와 오누이는 그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를 본 호랑이도 같은 소원을 빌었지만 썩은 동아줄이 내려오는 바람에 그만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호랑이의 피가 배어 수수밭의 수수가 붉게 변했으며, 오누이는 하늘 높이 올라가 동생은 달이 되고 오빠는 해가 되었다. 그러나 동생이 밤을 무서워하자 오빠가 대신 달님이 되고 동생은 해님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민담을 모방 메커니즘을 통해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어머니'는 기존의 사회 혹은 기존의 질서를, '오누이'는 희생양을, '호랑이'는 모방 경쟁으로 인해 과열된 폭력을, '떡'은 욕망의 대상을 비유한다고 해보자. 어머니와 오누이는 가족으로, 즉 모방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다. 그들은 '오순도순' 살고 있지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이 가족에게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결핍, 불안, 불균형, 위기를 암시한다. 또한 혼자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는 마을로 내려가 떡을 팔아야 하는데, 이것 또한 이 가족이 처한 삶의 각박함, 물자의 부족, 생존의 위협, 가족간의 분리, 경쟁 관계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미처 다 팔지 못한 떡을 이고서, 분명 실망과 피로와 분노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오던 바로 그 길에서 호랑이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숲 속 깊숙한 어둠 너머에서 태어나 남몰래 점점 몸집을 키우던 폭력은 이제 식인 욕구를 지닌 잔혹한 호랑이가 되어 어머니 앞을 불쑥 가로막는다. 통제를 벗어난 폭력이 공포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처음에 호랑이는 떡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떡을 주면 어머니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장담을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정말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랑이가 결국 떡으로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호랑이가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처음부터 확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순순히 떡을 건넨다. 이 떡으로 호랑이의 식욕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호랑이가 떡을 먹는 동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파국을 조금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호랑이는 (떡이 아닌) 어머니를 쫓아와서 떡을 하나씩 뺏어 먹더니 결국 떡을 모두 먹어버리고 만다. 식욕은 더 강해졌지만 더 이상 욕망할 대상이 없어진 (식욕이 더 강해졌기 때문에 욕망할 대상이 없어졌다거나, 욕망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에 식욕이 더 강해졌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호랑이는 결국 그 폭력적인 본성을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물론 애초부터 (호랑이 자신 역시 몰랐을지라도) 호랑이가 진짜 원했던 것은 어머니였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호랑이는 어머니를 위협해서 팔, 다리, 몸통을 차례대로 요구한다. 어머니는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는 헛된 희망으로 호랑이의 과격한 요구를 들어주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히려 인육을 향한 욕망만 더 커진 호랑이에게 어머니는 결국 잡아먹히고 만다. 가족을 지켜주던 어머니, 즉 기존의 사회 질서가 폭력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를 잡아먹고도 폭력적 욕망이 진정되지 않은 호랑이는 오누이마저 잡아먹기 위해 (만약 '오누이-희생양'이 없었다면 호랑이는 고개 아래 마을로 내려가 마을 사람 전체를 도륙했을 것이다) 죽은 어머니의 옷을 차려입고 오누이를 찾아 나선다. '호랑이'가 모방을 통해 '어머니'가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 자신이 바로 '호랑이'가 된 것은 아닐까? 혹은 처음부터 호랑이야 말로 어머니였었나?

처음에 오누이는 '호랑이-폭력'이 '어머니-기존 질서'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곧 어머니처럼 보이는 그것이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호랑이-폭력'이며 이미 '어머니-기존 질서'는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호랑이로부터 도망친다. 그렇게 이야기는 파국적인 폭력에 대응하는 '제의'의 과정으로 넘어간다. 아이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는데, 서낭당이나 솟대 같은 고래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이것이 일종의 신성한 '제단'이라는 사실은 확연하다. 여기서 또 한 번 모방 메커니즘이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등장하는 데 그것이 바로 '우물'이다. 호랑이는 나무 밑에 있던 우물물에 비친 아이들의 그림자를 보고는 아이들이 우물 속에 숨어 있다고 착각하고 손을 뻗는다. 하지만 물이 출렁이면서 그림자가 사라져 버리자 호랑이는 어리둥절한다. 어쩌면 물 위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이 호랑이 자신의 얼굴은 아니었을까? 모방에서 다시 모방으로 넘어가는 상호성과 자아의 모호함이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결국 나무 위의 아이들을 발견한 호랑이가 질문과 답변을 통한 일종의 '통과 의례'를 거쳐 나무 위로 올라가면서 이 '희생 제의'는 절정에 달한다. 아슬아슬하게 나무 끝까지 올라간 아이들은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감, 즉 제물로 바쳐진다. 아이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소임을 다 한 '호랑이-폭력'('호랑이-폭력-제사장, 혹은 호랑이-폭력-어머니'라고 칭해도 무방한)이 소멸하자 곡식들이 붉게 익어 땅이 풍요로워지고,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된 아이들은 해와 달이 되어 천지의 질서를 회복한다. 이렇듯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모방 메커니즘 속에서 희생 제의의 역할과 작동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모방 메커니즘 속에서 타인과의 동질성을 부정하고, 즉각적인 욕구를 지연시키고, 자아를 형성하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욕망 경쟁을 통해 세계를 확장한다. 그러나 모방이 점점 과열되기 시작하면 모방의 속도가 빨라지고, 주체들이 천편일률적이 되면서 경쟁이 격화되고, 폭력이 만연하여 유연하던 모방 메커니즘 전체가 경직된다. 모방 메커니즘이 폭력을 흡수하고 조절할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폭력만이 폭력만을 모방하며 통제를 벗어난 모방 메커니즘은 집단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게 된다. 이렇게 폭주하는 폭력의 연쇄를 멈추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특단의 조치, 초인적인 힘,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최후의 성스러운 안전장치, 그것이 바로 '희생 제의'다.

'희생 제의'는 간단히 말해서 집단 전체를 파국에 빠트릴 수 있는 모방 메커니즘의 과열된 폭력을 '희생양'에게 모두 전가함으로써 폭력의 위험을 해소하는 정화 작용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앞 장에서 '모방'의 뉘앙스에 대해 주의를 요했듯이 '희생양'이라는 단어의 사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희생양'의 본래의 뜻은 '제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단어는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누명을 쓰고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등을 억울하게 빼앗긴 사람이나 동물'을 뜻하게 되었다. 이제 이 단어는 애초의 지시적 역할을 잃어버리고 가치 판단에 물들어 의미 자체가 변형된 것이다. 그러니까, '희생 제의는 통제력을 상실한 폭력을 희생양에게 전가함으로써 폭력의 위험을 해소한다'라는 문장은 가치 판단에 따른 해석, 나아가 윤리적 판결을 이미 자신 안에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즉 '희생양'에게는 죄가 없다. 죄가 없기 때문에 '희생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것은, '희생양'을 바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생 제물'이 '희생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선택한 제물의 정당성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희생 제물'이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은 애초에 '희생 제물'로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고, '희생 제물'이 없으니 세계를 구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진짜 죄가 있는 정당한 제물을 바치면 되지 않느냐고? 아니, 이 세상에는 '희생양'이 아닌 '희생 제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제물은 '희생양'이다. 이것이 희생 제의의 딜레마이며 모방 메커니즘의 부조리이다.

폭력은 합일이나 조화를 방해하고 파괴하는 힘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제로 합일과 조화를 이루려는 힘이다. 희생 제의 역시 비인격적인 폭력을 인격적인 폭력으로, 비인격적인 합일을 인격적인 합일로 바꾸는 일이다. 간단히 말해서 더 커다란 폭력을 더 작은 폭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전체를 집어삼키며 무차별적으로 증폭되는 폭력을 오직 한 사람, '희생양'에게만 집중하면서 말이다. 그럼 '희생양'이라는 이 기발한 착상은 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 기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화를 추적해야 한다. 신화는 태초에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였고 또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를 구원했음을 증거하고 보존하고 전수하는 매체다. 신은 누구인가? 이것은 오래된 질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질문을 고쳐야 한다. 누가 신이 되는가?

아직 신이 탄생하기 전, 아직 세계가 탄생하기 전, 아직 인간이 탄생하기 전, 거기에는 어떤 전(前) 인간적인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 번째 뇌, 모방 능력을 통해 그 잔혹한 세상에서 아슬아슬하지만 꿋꿋이 살아남아 번성하고 있었다. (어쩌면 임계치를 넘어간 인구의 증가가 빅뱅과 같은 천지개벽의 결정적인 발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방 능력을 통해 지능을 키우고, 생활을 개선하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욕구를 충족했다. 그러면서 동질성의 망각이자 부정인 상호성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어렴풋한 자아가 이미 카오스를 진동시켜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 자체인 에로스가 기지개를 켜며 잠재된 모방 메커니즘의 압력을 서서히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방 능력은 쉽사리 모방 메커니즘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마른 모래처럼 흩어져 있으면서 스르르 뭉쳐지다가도 스르르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불쏘시개와 부싯돌이 뒤섞여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것은 불쏘시개도 부싯돌도 아니었다. 이제 불만 당기면 되는데 대체 누가 그 불을 당길 수 있을까?

그러던 태초의 어느 날, 두 쪽으로 갈라진 우주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번개가 내리 꽂혀 천상과 지상이 연결되고 멀쩡한 나무에 불이 붙듯, 초현실적인 기적이 일어났다. 최초의 희생양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그를 푸루샤, 반고, 이미르 등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반고, 인도의 푸루샤, 북유럽의 이미르는 모두 죽거나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사체에서 세계를 창조해 낸 신들이다. 예를 들어 '푸루샤'는 신과 인간의 중간 존재로써 태초의 인간이며 원초적인 인간이다. 그는 희생 제물이 되어 몸이 산산히 조각나는데, 조각난 푸루샤의 입에서는 브라만이, 팔에서는 크샤트리아가, 허벅지에서는 바이샤가, 발에서는 수드라가 나와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질서가 만들어졌으며, 눈은 태양, 심장은 달, 머리는 하늘, 다리는 땅, 배꼽은 중간 공간이 되는 등 우주적 세계를 형성했다.) 최초의 희생양이 희생되는 순간, 카오스가 금기 너머로 썰물처럼 물러가고, 부정한 것들이 정화되고, 혼란이 잠재워지고, 맑게 열린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천지를 환하게 비추었다. 희생양의 붉은 피가 사방으로 흘러넘쳐 마른 모래를 적시고 단단하게 뭉쳐져서 다름과 의미의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고, 희생양과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탄생한 최초의 인간들이 단단한 대지를 두 발로 딛고 일어나 완전한 세계를 찬양하며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질서와 평화와 인류를 창조한 그 최초의 희생양을 '신'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모방 메커니즘의 탄생이다. 다시 말해 태초에는 빛도 말씀도 신도 아닌 '희생양'이 있었다. 최초의 희생양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모르기에 그것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빅뱅의 초점이다. 어쨌든 최초의 희생양이 희생되는 순간 모든 긴장과 혼란과 폭력이 희생양에게 전가되면서 나머지 이들은 만장일치의 폭발적인 열광 속에서 완전한 합일을 이룬다. '우리'라는 토대 위에 인간성, 자아, 환상, 질서가 지붕을 떠받드는 기둥처럼 세워지고, 신과 인간의 세계가 건축되는 동시에 분리되고, 꼬리가 연결되어있는 선과 악이 각각 똬리를 튼다. 모방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치열한 모방 경쟁 게임의 선수이자 승리자이자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모방하고, 암시하고, 욕망하고, 선택하고, 헌신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며, 살인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방 메커니즘 자체를 가치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모방 메커니즘의 1인칭 시점에서 벗어나 3인칭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옳고 그름 자체가,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우리의 자아와 인격 자체가 모방 메커니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모방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해체하기 위해 도전했고 아마도 그중에서 부처가 가장 근본적으로 접근했는지도 모르지만, 글쎄, 아무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과연 누가 진심으로 해탈을 원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기적적으로 그리고 압도적으로 출발한 모방 메커니즘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최초의 희생양이라는 그 최초의 동력이 영원히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동력이 그렇듯 이 역시도 고갈된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것 같았던 모방 메커니즘이 점점 통제력을 상실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 제의를 통해 이 세계를 구축한 '다름'의 환상은 점점 단단히 고착되더니 합일을 가로막고 폭력을 증폭시켜 오히려 세계의 견고함을 약화시킨다. 금기 너머로 영원히 물러간 줄 알았던 카오스가 역류하고, 부정한 것들이 창궐하고, 혼란이 만연해지고, 하늘이 땅으로 가라앉고, 어둠이 천지를 뒤덮는다. 결국 이대로 가면 모방 메커니즘은 자학적인 폭력으로 인해 붕괴되어 파멸을 맞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하, 우리에게는 태초에 이 세계를 탄생시켰던 '신'이라는 신성한 모델이 있지 않나. 신의 '최초의 희생 제의'를 되풀이 함으로써 세계를, 모방 메커니즘을 다시 한번 부활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모방 메커니즘의 AS 서비스,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는 태초의 신성한 희생 제의를 후세에도 계속 인위적이고 체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수하기 위한 기억, 언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종교와 함께 기억, 언어, 이야기가 탄생하는 데, 이 역시 횡적이고 구조적인 언어 표현일 뿐, 종교, 기억, 언어, 이야기는 선후나 인과 관계로 엮인 것이 아닌 하나의 동일한 체계이다. 종교의 역할은 희생 제의에 정당성과 신빙성을 부여하고 몰입감을 높임으로써 희생 제의의 가치를 후세에까지 공고히 하는 것이다. 신화는 기본적으로 모방으로 인한 같음의 폭력 및 허무를 방지하고 통제하는 매뉴얼 같은 것이기에 다름의 환상, 자아의 환상, 질서의 환상, 에로스의 환상을 지지하고 강조하고 고정한다. 신들의 변신 이야기도 여기서 유래하는 데 (많은 경우 그것은 솟구쳐 오르는 에로스의 성적인 힘으로 표현된다) 태초의 신들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혹은 다양한 종류의 존재들을 생산함으로써 같음-카오스에 저항하고 다름-질서의 환상을 성취한다. 하지만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본질이 카오스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기에 그 부풀린 환상 속 가장 깊은 곳에 그 진실을 감추어 놓았다. 그 진실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실은 환상 전체를 내부에서부터 밝혀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 드러냄과 숨김. 드러내기 위해 숨기고, 숨기기 위해 드러내는 것, 이것이 신화의 본질이자 언어의 본질이다.

태초의 희생 제의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희생 제의의 핵심인 희생양이 있어야 한다. 이 희생양은 세계의 혼란과 위기에 책임이 있는 부정한 자(혹은 그의 대응물)이다. 희생 제의의 정화 과정을 통해 병을 가져온 자가 병을 치유하고, 범죄를 저지른 자가 범죄를 막으며, 타락한 자가 성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명분 뒤에 감추어진 진짜 핵심은 병이니 죄니 타락이 아니라 바로 '다름'이다. '희생양'은, 모방 폭력과 자아 과잉 속에서 갈가리 (그러나 같은 모양으로) 찢겨나가기 시작한 구성원들의 단일한 정체성을 재구축하고 만장일치를 유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른' 자여야 한다. 서로 악착같이 싸우던 사람들이 공동의 적 앞에서 일치단결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또 하나의 조건이 아니라 '다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희생양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은 아닐 만큼 충분히 '같은 자'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완전한 외부인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인간조차 아니기에 희생양이 될 자격도 권리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희생양은 내부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다르지만 외부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같은 자가 될 것이다. 아직 편견이 없고 일면 공정한 고대의 사고 체계에서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상은 지위고하를 막론하는 데, 그것은 최고 권력자인 왕이 희생 제의의 정기적인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긴, 왕이야 말로 우리와 가장 같으며 또한 가장 다른 자가 아닌가.

희생양은 - 정확히 말하자면 - 폭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에 가속도를 붙여 단번에 임계점을 넘김으로써 일종의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것이다. 단번에 임계점을 넘길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가장 악독한 희생양이 가장 완전한 만장일치를 가져오며 가장 확실한 평화를 이룩해 낸다. 죄의 원흉이 희생되는 순간 (마치 사정(射精)하듯) 합일에 도달한 나머지 구성원들의 죄는 사하여진다. 이제 정화된 세상에서 아기처럼 무고해진 사람들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것이다. 물론 희생양이 재앙과 혼란의 진짜 범인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 제의에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희생양이 페스트의 원인이거나 페스트를 직접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페스트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전염되어 나가는 사회의 해체를 막고 그것을 재건하는 힘이 희생양에게 있는 것이다. 즉 치료제는 아닐지라도 해결책은 된다. 만약 병균 페스트로 인해 사회 전체에 촉발된 양상과 과정 전체를 모두 '페스트'라고 지칭한다면, 정말로 희생양이 페스트를 없앤다고 단언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화 속의 '괴물' 역시도 희생양이다. 페스트에 책임이 있기에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기에 페스트에 책임이 생긴 것처럼, 괴물이기에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기에 괴물이 된 것이다. 즉 '괴물'은 모방 메커니즘의 구성원들 눈에 비친 희생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을 처단하는 영웅은 전사이기보다는 사제에 가깝다. 그리고 다시 희생양이 필요해지면 (우리와 같지만 동시에 너무나 다른) 영웅은 자신이 괴물이 되어 그 제단에 바쳐진다. (그 흔적은 '오이디푸스' 신화에 남아있다.) 영웅은 자신이 괴물을 퇴치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그 자리를 계승한 것이다. 이것이 신화 속에서 많은 영웅들의 최후가 비극으로 마감되는 이유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영웅들에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괴물들처럼) 괴물이 되어 비참하게 죽은 영웅들이 하늘로 올라가 신성한 신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모든 괴물이 사라졌을 때 신 또한 사라졌다.

이렇듯 모방 메커니즘은 희생양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일 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바꿈으로써 완성된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없이는 일 인에 대한 만 인의 투쟁 역시 불가능하며, 일 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없이는 세계의 탄생과 유지 역시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위기 없이는 합일이 불가능하고, 합일 없이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을 꼬리를 삼키면서 성장하는 신성한 뱀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희생양의 생산적인 기능에 좀 더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희생 제의는 단지 폭력에 대한 방어이자 해소라는 수동적인 역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사회가 단번에 만장일치를 이루며 다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과 동력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이며 심지어 진취적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폭력이란 필수적이며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건설적인 것이다. 마치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처럼, 혹은 양(陽)과 음(陰)처럼, 모방 메커니즘은 폭력을 생산하고 부추기며 그렇게 증폭된 폭력으로 다시 폭력을 억누르고 해소하고 도약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일종의 자가 동력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엔진을 단 자동차는 시동을 켠 채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잠깐, 그런데 정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혹은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여정에 올바른 목적지가 있나? 혹시 깎아지른 절벽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신화들은 이 질문에 대해 각자 다른 답들을, 혹은 다른 뉘앙스들을 내놓는다. 희생 제의에 의한 모방 메커니즘의 시작을 진보로 혹은 퇴보로 자평하면서 말이다. 극단적으로는 타락으로까지 여기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그러하다.) 우리 역시 이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판단을 해볼 수 있다. 과연 모방 메커니즘으로의 전환이 진보일까 퇴보일까? 많은 사람들이 모방 메커니즘 이전 세계를 파라다이스로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는 경쟁도, 권력도, 계급도, 소유도, 거래도, 도덕도, 전쟁도, 죽음도, 정의와 불의도, 신성함과 금기도 없었다. 그곳에서 전(前) 인간적 존재들은 오직 생존 욕구에만 집중하면서 일면 한가하게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며 칭송하지만 정작 그곳에 살았던 이들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다. 아마도 그들은 다소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평화 역시 일종의 동물적인 혹은 야만적인 평화라고 말이다. 그러나 모방 메커니즘 속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과연 '진보'란 '인간'인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창안한 조작된 신화일까? 반대로 '퇴보'란 성숙한 주체로서 의지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어렵고 두려워서 유아기로 회기하고 싶어 하는 퇴행적 신화일까?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희생양'이라는, 이미 윤리적 가치 판결이 내려진 이 개념에 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희생양이 세계 전체의 폭력과 혼란에 대해 무고한 것은 맞지만, 반드시 아무런 죄가 없는 자인 건 아니라는 점이다. '희생양'은 실제로 살인자, 반역자, 매국노, 강간범, 사기꾼 등등일 수 있다. 다만 그 죄 (아무리 극악할지라도) 그가 '희생양'으로 선정된 진짜 이유는 아니며, 본질적으로 우리 중 그 누구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희생양'이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분명하기 그지없는 이 개념이 실제 현실 현장에서는 철학적 혼란을 야기한다. 죄인과 희생양, 처벌과 희생 제의의 경계를 모방 메커니즘 안에서 정확히 꿰뚫어 보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회색지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모방 메커니즘의 치밀한 모방-상호적인 연쇄망 속에서 구성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어떤 죄를 특정 개인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한 개인이 지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다. 범죄는 한 악독한 인간의 반사회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집단 전체의 결함과 결핍의 결과적 산물이 아닐까? 그리하여 극악한 범죄자를 포함한 모든 범죄자는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 이미) 사실상 희생양이며, 이성적 사법시스템마저도 일종의 종교적 희생 제의가 아닐까?

그런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죄가 있든 무고하든) 단 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계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억울한 한 사람의 희생과 세계 전체의 붕괴, 과연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 걸까? 만약 이 둘을 정의의 저울에 올린다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깊게 다루어질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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