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
오래전 르네 지라르의 책들을 참 흥미롭게 읽었다. 그의 발상의 전환, 집요함, 추상적인 이론을 구조화시키는 능력, 글솜씨 등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나의 가설에 너무 많은 것을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사실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영감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다. 언젠가는 그의 책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르네 지라르의 책들과 더불어 그가 책에서 인용했던 다른 책들도 함께 두루 읽었다. 나는 그중에서 6권을 내 책장에 넣었다. 6권 모두 '모방 이론'을 주장하거나 그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책들이어서 한꺼번에 묶어서 감상평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니 책도 여러 권이고 작가도 여러 명인 데다가 내용도 방대해서 한 편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 끝에 5가지 주제로 분류해서 올려보려고 한다. 각각 주제의 제목은 책 제목에서 따오기는 했지만 책들의 주장이 모두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각 책에 한정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니다.
1. 세 번째 뇌
2. 폭력과 성스러움
3. 희생양
4. 욕망의 탄생
5. 성스러움과 폭력
일단 글을 시작하기 전에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은 내 글이 저 책들의 충실한 요약본이나 해설, 혹은 평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저자들의 이론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정리하면서 저자들과는 다른 단어를 선택하고, 다르게 대상을 구분하고, 의미를 변형했으며,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저자들과 내 생각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버렸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내 개인적인 이해 부족과 게으름, 무책임도 한몫했겠지만, 어쨌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내가 굳이 내 글을 자의적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혹여나 내 글로 인해 저 책들이 오해를 살까봐 걱정이 되어서다. 물론 내 글의 대부분은 저 책들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0.01%의 오염이 전체를 혼탁하게 하고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약 200만 년 전, 지구에 빙하기가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기후가 건조해지고 온도가 낮아지면서 사바나 지역의 열대 밀림은 점차 초원이 되었다.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지고 수풀로 가득한 평야가 펼쳐졌다. 나무 위에서 살던 생물들에게는 혹독하고도 불리한 환경이었다.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들 역시 에덴동산처럼 늘 과실이 풍부하고 안전이 보장되었던 나무에서 내려와 지상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생존 능력이 있는가. 그들은 덩치가 크지도, 힘이 세지도, 날카로운 이빨이나 손톱이 있지도, 독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거의 맨몸으로 천적들이 우글거리는 이 약육강식의 가혹한 초원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그것을 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들에게는 단 한 가지 결정적인 능력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방'이다.
구석기인들의 동굴 벽화가 발견되었을 때, 그 그림의 목적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순수한 예술 활동이라는 설, 사냥의 성공을 바라는 주술이라는 설, 사냥 연습용이라는 설, 통과의례를 위한 성소 실내 장식이었다는 설 등등. 그중 사냥의 성공을 바라는 주술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들의 주식이 아닌, 심지어 전혀 먹지 않는 동물들까지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을 의심받아 왔다. 그렇다면 혹시 그들은 그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방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자신들보다 뛰어나보이는 경이로운 동물들의 육체와 영혼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연장선 상에서 특정 동물을 자신의 조상이나 가족으로 믿고 섬겼던 토테미즘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각 부족은 특정 동물을 모델로 삼고 그 특성을 모방함으로써 그 동물과 같아졌는데, 그러한 모방관계는 혈연관계만큼이나 밀접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많은 토템 신화들이 토템 동물과 인간의 혈연관계를 강조하는 것도 '모방'과 '혈연'이 존재론적으로 상응함을 보여준다.) 어쩌면 모방이야말로 모든 의인화의 기원이며 우리가 인간에게만큼이나 동물들에게 공감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실 핏줄로 묶여있다고 표현되는 '가족', '혈연', '민족'이란 엄밀히 말해서 '계보' '같음' '공유'를 뜻하며, 실질적으로 이것은 유전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상호모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개체는 출생이 아닌 모방을 통해 집단의 일원이 된다. 인식론적으로는 결정적이지만 지극히 추상적인 혈연보다는 모방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근본적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류학의 '모방 이론'은 비교적 최근에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 이제껏 과학자들은 우리의 뇌를 '사고의 뇌'와 '감정의 뇌'로 구분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심리와 활동이 설명되지 않았는데 특히 인간 특유의 상호적 관계에서 그러했다. 그러다가 1990대 이후에 '거울신경체계'가 발견되었다. '거울 뉴런'은 타인을 모방하는 신경으로써 첫 번째 뇌와 두 번째 뇌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개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세 번째 뇌'라고 특정해서 명명할 수 있다.
생후 1개월 밖에 안 된 아기들도 상대의 얼굴 표정을 모방한다는 것은 이미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상대방이 혀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 아기들은 상대방의 의도도 모르면서, 혀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심지어 혀가 입 안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떤 근육을 써야 혀가 앞으로 나오는지도 모르면서, 다시 말해 의식에 앞서서 자동적으로 그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은 선척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본질적으로 모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방'이라는 단어의 뉘앙스에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반드시 의식이나 의지나 의도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언가를 인지하고 나서 의식적으로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지하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모방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인지했기에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방했기에 인지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실제로 그 행동을 따라 하지 않더라도) 즉각 상대와 같은 뇌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같은 동작이라도 기계를 상대로는 거울 뉴런이 반응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체의 심연을 뛰어넘는 공감과 상호성은 우리의 육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나 신경학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좀 과장되게 말해서 두 개의 육체가 하나의 뇌를 (엄밀히 말하면 '세 번째 뇌'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상호 관계 속에서 세계는 연결되고 확장되며, '집단 지성'이라는 말의 실질적인 의미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누가 누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모방 메커니즘 안에서 모방 메커니즘의 일부분으로써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의 놀라운 점은, 그러니까 위대한 점은, 단지 겉모습이나 특징을 베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도, 목적, 존재 방식,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취한다는 것이다. 돌이 된 아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른들의 웃는 얼굴이나 찡그린 표정을 통해 그 의미를 모방하고 습득한다. 즉 상대방이 웃거나 찡그릴 때 아기는 그저 웃거나 찡그린 얼굴을 흉내 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웃는 것은 좋은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찡그린 것은 나쁜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이해한다. 이것은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상호 능력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가치와 의미의 모방을 통해 아기는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또 (필연적으로) 세계와 어긋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결코 세계를 직접 이해하거나 세계와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세계, 다시 말해 대상은, 모방 메커니즘을 통해 모방된 것이다.
다음은 모방 메커니즘의 기본 구조이다.
(이것은 위아래가 있는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며 요소들끼리 위치를 바꾸어도 무방하다)
이것이 모방 메커니즘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모형이다. 그러나 이 각각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모방하는 '나'와 영감을 주는 '모델'은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방자이자 모델인 것이다. 나아가 이 모형들의 수많은 연결 속에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모델'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세계는 이 기본 모형이 벌집처럼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연결망이다. 이 모방 메커니즘은 의식과 시간과 공간을 관통한다. 다시 말하면 모방 메커니즘 안에서 인간적 의식과 시간과 공간이 구축되며, 그것은 처음도, 마지막도, 시작도, 끝도 없고, 위도, 아래도, 안도, 바깥도, 중심도, 변방도 없이 전체로써 존재하는 균질의 세계다. 어떤 차이도 실재하지 않는 동일성의 세계. 누군가는 '자연'이라고, 누군가는 '우주'라고, 누군가는 '수학'이나 '기하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것은 '카오스'다. 영원히 변함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다시 말하면 영원히 변화하고 모든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 이 카오스야 말로 우리 세계의 막연한 참모습이다. 아마도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일 테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우리의 세계는 카오스가 아니다. 카오스가 우리의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한다. 바로 에너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카오스에 에너지가 부재한다고 한 표현은 실상은 사실을 완전히 전도한 것이다. 카오스는 완전하기에 그 어떤 것도 부재하지 않으며 부재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올바로 정정하자면 카오스에 에너지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 카오스의 완전함이 부재하는 것이다. 이 에너지야말로 완전함의 손상 그 자체이면서 또한 완전함을 다시 회복하려는 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힘은 완전함에서 점점 멀어지며 파괴적이 될 수도 있고, 완전함을 다시 성취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 힘을 '에로스'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건조하게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호성이다. (상호성이란 단절과 불균형을 기반으로 한다.)
'카오스'란 모방 메커니즘이 아직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모방 메커니즘의 추상적인 구조는 있지만 실질적인 형상도 현상도 없는, '나'와 '모델'과 '대상'이 미분화되어 있는, 어떤 차이도 신도 인간도 없는 동일성의 세계다. 그런데 돌연 카오스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 실현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가능성들 중 하나가 다른 모든 가능성들의 힘을 끌어 모은 일종의 반란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그저 무작위적인 우연의 산물이거나 카오스 자체의 생리 활동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이윽고 카오스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 틈으로 에너지가 솟구쳐 오른다. 새로운 세계가, 최초의 신이 출연하는 것이다. 마치 빅뱅처럼. 마치 천지 창조처럼. 마치 출산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인간', 혹은 '인간성'의 탄생. 그것이 잠잠한 카오스에 불을 당긴다. 세계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도 그 불타오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 자신 역시 불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카오스는 결코 불타오르지 않는다. 카오스는 부동하고 완전하기에 무너져 내리지도 균형을 잃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카오스는 조금의 흠집도 미동도 없이 여전히 그대로다. 그럼 대체 모든 것을 태우고 있는 이 맹렬한 불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환상'이다. '자아'라는 환상. '로고스'라는 환상. '차이'라는 환상. 그것이 바로 이 현실적인 세계의 비현실적인 실체이다.
'자아'는 홀로 우주의 중심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면서 우주 전체에 열기를 전달하고 세상만물의 운행을 주관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 즉 자아의 환상이다. 그런데 '자아'는 결코 홀로 탄생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홀로 탄생할 수 없다. 그것이 아마도 태초 신화에서 최초의 신이나 최초의 인간이 쌍둥이이거나, 형제이거나, 부부인 이유일 것이다.
'자아'는 처음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 간에, 아직 미분화되지 않은 개체들 간의 모방을 통해 발생한다. 유의할 것은 인지가 모방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듯 자아가 모방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자 주체적인 두 자아가 만나 서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 모방을 통해 미분화되지 않은 개체들이 비로소 분화되어 두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란 두 주체들 사이에 연결된 끈의 매듭 같은 것으로 그것은 내면적인 것만큼이나 외면적이며, 타인과의 공동의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유물인 셈이다. 그런데도 자아가 생긴 주체는 자신이 스스로 생겨났으며 자신과 상대방은 다르다는 차이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아의 공동 창조자이자 상호 공유자인 상대방과의 연관성과 동질성을 부정하면서 자아를 소유하고 나아가 독점하려 한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자아의 자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시작이요 욕망의 시작이며 또한 경쟁의 시작이다.
이러한 환상이 가능한 것은 자신이 모방 메커니즘의 산물이자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은 앎-깨달음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졌으며, 더 정학히 말하면 알지 못하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알 수 없으며, 알아서도 안된다. 모방 메커니즘이 자신이 모방 메커니즘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모방 메커니즘은 작동을 멈추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배우들이 자신들이 배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자신들의 삶이 연기라는 사실을 모른 채,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는 드라마와 같다. 만약 그들이 이곳은 무대이고 자신은 배우이며 삶은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살아가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무지 속에서 고유한 자아가 있기에 고유한 욕망이 있으며, 고유한 욕망이란 고유한 자아의 고유한 존재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욕망의 주체인 자아야 말로 존재의 주체라고, 마치 유일무이한 신처럼 신성한 주체성과 자율성을 겸비한 존재의 주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에게 자발적이거나 주체적이거나 본질적인 욕망이란 단 하나도 없다. (욕구 외에) 우리의 모든 욕망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방된 것이다. 모방이야 말로 오히려 자율성과 차별성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임에도, 상대방과의 경쟁에 사로잡힌 우리는 모방으로 탄생한 자신이 오히려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혼자 차지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누구보다도 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기 위해 경쟁한다.
이러한 '모방', '자아', '욕망', '경쟁'의 상호 관계는 독립된 각각의 개념들이 연계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의 전체로 존재하고 있는 '모방 메커니즘'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설명하기 위해 구분된 언어 표현에 불과하다. 이들 사이의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는 불명확하며, 서로가 서로의 근거이자 결과이자 특성이 된다. '폭력'에 대해서도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뉘앙스를 단어로부터 분리할 필요가 있다. '사랑'과 폭력'이 반대말이라고 믿는 것은 인간적인 혹은 현실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된 환상에 불과하다. '사랑'의 상호성을 파괴하는 것, 혹은 파괴된 것이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폭력' 모두가 상호적인 것이다. 카오스로 되돌아가려는 힘인 '에로스'는 인간에게 '사랑'의 모습일 수도 있고 '폭력'의 모습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색깔의 차이일 뿐으로, 에너지 차원에서 측정하면 같은 숫자로 표시될 수도 있다. (만약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이란 '폭력'이고 '폭력'이란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또 지나치게 문학적이 될까.)
우리는 결코 이성이나 언어로는 모방 메커니즘을 분명하게 파악하거나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나 언어야 말로 (우리처럼) 모방 메커니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소나마라도 모방 메커니즘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이성이나 감성이 아닌 종교적이고 원초적인 예감과 직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에게 그것은 이미 오래 전 도태된 기능인지도 모른다.
다시 모방 메커니즘의 기본 구조로 돌아가 보자. 모방 메커니즘 기본 모형에서 요소들 간의 관계까지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나-모델-대상'의 관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나'와 '모델'이다. '나'와 '모델'의 상호성을 통해 '대상'이 등장한다. 세계, 즉 '대상'은 동인이라기보다는 '나'와 '모델'의 관계 자체 대한 모방물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싸구려 합금으로 만든 트로피와 같은 환상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토록 원하는 것은 그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모델'과의 경쟁 속에서 '내' 자신의 승리를 보장받고 또 증거 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토록 원했던 것을 막상 손에 넣고서도 전혀 만족하지 못하며, 심지어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방 메커니즘에서 '대상'이라는 자리는 삼각형의 한 축으로서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텅 비어있다.
'내'가 모방하는 '모델', 다른 말로 하자면 '나'에게 영감을 주는 이 '모델'은 보통 나에게는 그 정체가 가려져 있다. (우리가 자신의 '모델'을 모델로써 인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우리가 모델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가 진짜 '모델'인 것도 아니다.) '나'에게 4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와 4가지 방식으로 상호 관계를 맺는다. '모델', '경쟁자', '장애물', '금지'가 그것이다.
'모델'은 '나'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방해도 되지 않는 이상적인 모방 상대이다. '모델'과 '나'의 관계는 마치 자애로운 부모님과 순종적인 자식, 또는 헌신적인 스승과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 사이와 같다. 이들은 선의와 믿음으로 이어져 있어서 '나'는 '모델'이 욕망하는 '대상'을 탐하지 않으며 자아의 소유권이나 선행권을 두고 '모델'과 경쟁하지 않는다. (혹은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선의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모델과 '나' 사이에 자아나 대상을 두고 경쟁이 일어나면 모델은 '경쟁자'가 된다. 모델을 모방하는 '내'가 모델의 욕망까지 모방함으로써, 그러니까 모델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원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신비한 환각적 망각 속에서 그것이 원래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라고 믿게되면서, '나'와 '모델'은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이렇게 계승된(모방된) 가치와 목적의식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 '나'의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나 스승을 뛰어넘기 위해 스스로 더 노력하는 야심 찬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경쟁은 시기, 증오, 폭력으로 번지기 쉽다.
'장애물'은 모델이 자신에 대한 '나'의 경쟁을 가로막고 '나'의 욕망 추구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때, 혹은 '내'가 그렇다고 믿을 때 형성된다. 만약 '내'가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친구가 '나'에게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에게 품고 있는 친구의 욕망까지 '내'가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그녀가 친구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대상')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친구는 같은 여자를 두고 '경쟁자'가 되는데, 만약 그 여자가 '나'의 사랑에 응하지 않거나 응하더라도 현재 남편과의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경쟁 기회가 박탈된 '나'에게 친구 즉 모델은 '장애물'이 된다. 경쟁할 수 없는 이 '장애물' 앞에서 '나'는 내 (모방된) 욕망을 포기하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금지'는 자신에 대한 '나'의 모방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모델을 뜻한다. 보통 모델과 '나' 사이의 힘, 권력, 권위의 차이가 확연하게 큰 경우로, 모델은 '나'에게 모방의 여지를 아예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한없이 순종하거나 한없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델'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 네 가지 구분을 더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다루기 위해 이것을 다시 '관계-역할'로 재조직하여 6가지로 세분화시켜 볼 수 있다.
첫 번째 줄에 있는 '모델-모델'과 '금지-금지'는 인간 세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관계로서, 이론적으로 완전한 신의 두 가지 속성과 같다. '모델-모델'은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허락하고 한없이 베푸는 자애로운 모델인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어머니-신'이고, '금지-금지'는 '나'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며 그에 대한 어떤 이견이나 거역도 가능하지 않은 금기의 모델, (역시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버지-신'이다. 상호적이기에는 양쪽 모두 '모델'의 힘이 너무나 절대적이기 때문에 애초에 '나'라는 자아가 분화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어머니, 절대적인 아버지의 품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자궁 안의 태아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줄에 있는 '모델-경쟁자'와 '장애물-금지'가 소위 실제 우리 세계가 보여주는 일반적인 관계 양상이다. '모델-경쟁자'는 '내'가 모방하는 '모델'이 동시에 '나'의 '경쟁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모델을 모방하면서 또한 모델과 경쟁하여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모방 메커니즘의 (세속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측면이자 개인과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반대로 '장애물-금지'는 '나'와의 상호성을 거부함으로써 '장애물'이 된 모델이 '나'를 억압하는 것이다. 모델이 모델이 되는 것조차 거부함으로써 거기에는 어떤 생산적인 모방 관계도 가능하지 않으며 강압적인 통제나 갈등이 고조된다.
세 번째 줄에 있는 '모델-장애물'과 '경쟁자-금지'는 관계와 역할의 부조리가 너무 커서 '나'를 병적인 상태로 몰아넣는다. '모델-장애물'은 모방을 통해 상호 관계를 맺게 된 모델이 자신과의 경쟁을 차단되는 것이다. '나'는 모델을 모방하면서 모델과 같은 것을 욕망하게 되었지만 경쟁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주장할 수 없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경쟁자-금지' 역시 마찬가지 결과에 도달하는데, '나'는 '나'와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경쟁을 금지하는 '경쟁자'의 강압 앞에서 그만 좌절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두 경우 모두 모델의 부당하고 모순적인 거부로 인해 '나'의 자아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며, 손상되고 자폐적인 '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버리거나 대상이나 모델 주변에서 끊임없이 맴돌아야 한다. 그로 인해 생긴 무력감, 실망, 수치심, 분노, 죄책감, 불안 등이 외부에서 적당한 상대를 찾거나 극복될 수 없기에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나'의 내면을 병들게 한다. 모방 메커니즘의 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억압과 폭력성이 높아질 때 그 집단에는 내면이 병든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것이 또한 집단 전체의 긴장을 한층 더 높이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쯤에서 모방 메커니즘으로 인한 병적인 양상을 신경증과 정신병으로 구분하여 잠깐 들여다보고 지나가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모방 메커니즘 모형은 변하지 않는 기본형으로서 이 형식이 제대로 유지될 때 주체의 심리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설사 그 안에서 폭력이 난무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건 바로 우리의 망각이다. 이 메커니즘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는 망각,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우리의 무지야 말로 이 메커니즘을 유지시키는 건강함이다. 이 건강함 속에서만이 사회적 차원의 '정화와 복원'(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희생 제의') 뿐만 아니라 개인 차원의 정화와 복원 역시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망각이라는 환상에 틈이 생겨 - 위에서 말했듯 자아의 본질적인 손상으로 인해 - 이 진리를 어렴풋이나마 엿보게 되면 '나'는 병적이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이 병드는 것은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망각은 건강함이며, 깨달음은 병이다. (물론 그것은 어설픈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정확하게 깨닫게 되면 모방 메커니즘은 그 즉시 작동을 멈출 것이다. 인간들은 해탈하고, 세계와 우리 자신을 활활 태우던 불길은 꺼지고, 우주는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카오스는 언제나 그랬듯 침묵 속에 잠겨있을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에 대한 '나'의 앎이 완전하지 않을 때 모방 메커니즘은 훼손된 채로 계속 작동하게 된다. 그럼 정화와 복원(희생 제의) 역시 왜곡될 수 밖에 없는데 개인적 차원에서 왜곡된 정화와 복원이 바로 신경증과 정신병이다.
신경증 환자의 경우 자신에게는 경쟁 관계에 있는 모델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 모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틀렸지만, 자신의 모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옳다. 결국 환자에 의해 부정되고 거부된 '모델'의 자리는 텅 비게 되는데 여전히 모방 메커니즘은 실제 하며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모델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환자는 비어 있는 '모델'의 자리를 자기 자신, 자신의 육체로 채운 뒤 자신의 육체를 타자화하여 그것과 경쟁하게 된다. 그래서 모델과의 경쟁이 격화되면 환자는 신체 통증, 발작,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정신병 환자는 자신에게 모방 모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자신은 그 모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틀리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에게는 모델이 있으며 더 나아가 그 모델이 누구인지까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환상 속의 타자를 모델의 위치에 놓고서 자아나 대상을 두고 모델과 경쟁을 벌이게 된다. 예를 들면 자신이야말로 진짜 예수라는 식이다. 신경증 환자의 경우에는 경쟁 관계의 모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인지시키고 올바른 모델을 찾도록 도와주면 비교적 쉽게 치료될 수도 있지만, 정신병 환자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경쟁 관계의 모델이 있다는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이미 자신이 선택한 모델이 끼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치료가 더 어려울 수 있다.
모방 시스템의 산물이자 일부이자 동력인 자아가 자신이 모방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원본을 뛰어넘어 스스로 원본이 되기 위해 자신이 모방한 모델과 벌이는 이 치열한 경쟁이 단지 유치하고 치졸한 싸움인 건 아니다. 자아에게 이것은 사실상 살고 죽는 문제, 생존이 걸린 문제다. 내가 상대보다 더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원본이 되고자 벌이는 자아들의 이 가혹한 경쟁 방식이란 것이 실상은 상대를 더욱더 모방하는 일이다. 부조리하고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모방으로 존재하게 된 자아가 더 존재하려면 더 모방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더욱 꽉 부둥켜안는데, 이러한 몸부림이야말로 존재자가 되려고 하는 존재의 운명이며, 다시 그 존재자를 버리고 카오스가 되고자 하는 에로스의 의지이며, 우주를 영원히 작동시키는 원초적인 힘이다. 이 힘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고 세계를 세계로 만들었다. 이것은 또한 연대와 문명을 일으키는 위대한 힘이면서 또한 갈등과 폭력,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불길한 힘이기도 하다. 이 모방 메커니즘은 개인과 세계, 내면과 외면, 상상계와 상징계, 속세와 종교를 모두 아우른다.
마지막으로 이 논의 내내 소외되어 있었던 '대상'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모방자는 대상을 향한 모델의 욕망까지 모방하면서 그 대상을 똑같이 욕망하게 되고, 그 대상을 혼자만 독점하기 위해 모델과 경쟁한다. 실상 그들은 대상을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기 위해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대상은 핑계일 뿐 그들은 경쟁을 위한 경쟁에 몰두해 있는 것이다. 앞서서 언급했듯이 그래서 대상의 자리는 언제나 텅 비어있으며 그 무엇이든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상이란 늘 부차적일 뿐 실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이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상은 경쟁하고 있는 주체와 모델 사이에서 서로 마주 보려는 그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빼앗아 그들을 분리시키는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다. '나-모델-대상'의 삼각형 면적이 넓을수록, 그리고 이 삼각형들의 연결 관계로 이루어진 전체 구조가 넓고,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그 사회는 더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쟁이 격화되기 시작하면 (사실 경쟁이란 본래 반드시 필연적으로 점점 격화되기 마련인데) '나'와 '모델'은 점차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대상을 밀쳐내고 서로에게 직접 달려들게 된다. 그들은 바짝 서로의 멱살을 잡고서 상대방만을 바라보고, 더 서로를 모방하고, 더 많은 차이들이 사라지고, 그들의 경쟁 역시 더더욱 치열해진다. 그리하여 결국 폭력만이 폭력만을 모방하면서 터질 듯이 팽배해진 모방 메커니즘은 통제를 벗어나 사회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지를 밟고 서서 진리와 파괴의 신성한 춤을 추면서 우주 전체를 카오스로 되돌리는 시바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이 가열된 폭력의 연쇄를 멈추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 초인적인 힘,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것이 '희생 제의'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