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쿠스 솔루스

레몽 루셀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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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쿠스 솔루스 ] 레몽 루셀




만약 미래의 언젠가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언젠가), AI에게 '사과'라는 단어를 주고 '사과'에 대한 소설을 쓰라고 하면 AI는 철학, 역사, 신화,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미학, 문학, 종교, 수학, 화학, 물리학 등등 모든 것을 끌어 모아 '사과'에 대한 소설을, 그것도 단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끝도 없이 계속해서 '사과'에 대한 소설을 써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단 하나의 점이 빅뱅을 통해 셀 수 없이 수많은 별이 된 것처럼 말이다. '사과'가 주인공인 소설, '사과' 씨에 대한 소설, '사과' 파이에 관한 소설, '사과' 농장에 대한 소설, '사과'를 좋아한 소녀에 대한 소설,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은 노인에 대한 소설, '사과'라는 단어가 들어간 '애플망고'에 대한 소설, '사과'에 대한 소설을 쓰는 작가에 대한 소설, '사과'의 식이섬유에 관한 소설, '사과'의 유전자 배열에 관한 소설, 사과(沙果)가 사과(謝過)하는 소설, 쓰디쓴 사과(沙果)로 시작해서 쓰디쓴 사과(謝過)로 끝나는 소설, 심지어 '사과'라는 단어가 아예 들어가지 않는 '사과'에 대한 소설도 가능할 것이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마저도 쏟아져 들어오는 이 '사과'에 대한 소설책들을 더 이상 수용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AI는 이 모든 소설을 단 한 권의 책 안에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레몽 루셀이 글을 쓰는 방식이다. 빅뱅으로 우주를 만들고 다시 우주로 블랙홀을 만드는 연금술 같은 일. 사실 글쓰기를 연금술이라고 부르는 건 다분히 고루하고 진부한 은유다. 그러나 레몽 루셀의 경우에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알파벳으로 연금술을 하고 있다. 그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그것은 납으로 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생소하고 신기한 도전이다. 그래서 그의 연금술이 성공적이냐고? 그것은 안일하고 순진한 질문이다. 연금술은 성공하지 않는다. 성공하면 그것은 더 이상 연금술이 아니다. 성공한 연금술은 연금술이 아니라 '화학' '물리학' '문학' '미술' '역사' '심리학' '기호학' 등등이 된다. 성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성공하지 않기 위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연금술이다. (연금술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과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연금술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주체의 그 무엇보다 모호한 행위다. 연금술은 현실 안에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 안에서 현실을 꿈꾼다. 그리하여 그것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 의미에서 레몽 루셀은 연금술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그는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대지가 둥둥 떠있는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려 했던 모험가다. 그리고 그는 그 바다에서 필연적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다. 홀로 외롭게 죽을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냐고? 그걸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연금술사'라고 할 때, 그건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오히려 '연금술사'라는 단어는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를 지칭하기 위한 단어가 아닐까. 연금술사는 과학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고, 어쩌면 실존 인물도 아니다. 연금술사들이 쓴 책을 보라. 지극히 과학적이면서, 지극히 상징적이고, 지극히 역사적이고, 지극히 심리적이고, 지극히 감성적이고, 지극히 문학적이면서, 지극히 창의적이고, 지극히 예술적이며, 지극히 물질적이고, 지극히 실무적이다. 한마디로 빈틈없이 논리적이고 지 멋대로 엉망진창이다. 사실적인 거짓말인 동시에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세상이, 사람들이, 언어가 그렇지 않은가. 빈틈없이 논리적이고 지 멋대로 엉망진창인 데다가 사실적인 거짓말인 동시에 거짓말 같은 사실.

우리도 가볍게 연금술을 해 볼 수 있다. 아무런 설명도 힌트도 없이 'O'라는 기호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자. 이것은 한글의 '이응'일 수도 있고, 알파벳의 '오우'일 수도 있으며, 숫자 '영'이거나, 화학식의 '산소', 혹은 형태적으로 '구', 고고학적으로 '태양', 종교적으로 '순환', 기호적으로는 '옳음' 등등 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나아가면 이 'O'는 우주 전체로 끝도 없이 나아가며 곧 우주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우주는 다시 블랙홀 안으로 수축하며 'O'가 된다. 'O'야 말로 바로 현자의 돌 자체인 것이다. 여기서 연금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는 'O'가 단순히 이 모든 것이라거나 막연히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게 아니라, 'O=이응=오우=영=산소=구=태양=순환=옳음=등등등등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금술의 가마 속에서 녹아내리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경계이다.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정화되는 것이다.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레몽 루셀은 인류가 구축한 모든 분류와 체계를 하나로 녹여 기체도 액체도 고체도 아닌 그 무엇을, 즉 책을 만들어 낸다. 역사? 예술? 문학? 심리? 생물학? 수학? 교육학? 지리학? 식물학? 의학? 사회학? 언어학? 도대체 이 책을 어느 책장에 분류해야 할지 사서들은 골치를 썩을 것이다. 어쩌면 바벨의 도서관마저 그의 글을 거부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히려 이 책 안에 바벨의 도서관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과장된 찬사의 (과장은 맞다. 그런데 이것이 찬사였나?) 뉘앙스를 조금만 바꾸면 그것은 '유치 찬란'이 된다. 솔직히 그의 글은 유치 찬란하다. 도무지 쓸데가 없고, 목적도 없으며, 유아적인 데다가, 몽상적이고, 천박하고, 조잡하고, 장황하고, 중언부언에, 자의적이고, 자아 과잉의 확장이다. 처음 그의 글을 읽으면 우선 그 고집스러운, 확신에 찬, 뻔뻔한 유치함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왜 이 수준미달의 유치한 글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도 확신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나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유치한지 그만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로쿠스 솔루스'를 읽고 홀린 듯이 곧바로 '아프리카의 인상'을 구해서 읽었다. 사실 두 소설은 약간의 변용이라고 할 만큼 구조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아프리카의 인상'에는, 문명이 시간대를 따라 진행 발전되지 않고 현재의 단 한 점 위에 시공간 전체가 뒤죽박죽 뒤엉켜 있는 아프리카의 실존적 현실이 투영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이한 천재 과학자의 연구소를 관람하는 '로쿠스 솔루스' 쪽이 훨씬 집중력이 높은데, 무엇보다 기발한 상상력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아프리카의 인상'이 아닌 '로쿠스 솔루스'를 내 책장에 넣었다. 사실 이 책의 상상력의 90% 정도는 잡스럽고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 10% 정도가 깜짝 놀랄 정도로 흥미진진해서 이 책 전체를 독파하기에 충분한 추진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정말 내 마음을 끈 것은 '문학적 시선'을 다루는 이 책의 방식이다. '시선'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자면 '내적 시선'과 '외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등장인물'의 시선과 '독자'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사실상 나눌 수 없는 것을 설명을 위해 나눠보고자 한다.) 우선 '로쿠스 솔루스'와 '아프리카의 인상' 모두 실질적인 인물로서의 화자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화자는 상당히 독특한 주체인데, 그는 능동적인 주인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관찰자도 아니다. 이름이나 직업, 개성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 불특정의 특정적 개인이다. 소설 속 사건과 철저하게 무관하면서도 그 사건 안에서 모든 걸 빠짐없이 관찰하고 있는 자이다. 마치 오지의 부족 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그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부재하는, 이야기 안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결코 이야기되지 않는 인문학자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화자'에게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 그리고 전지적 시점이 모두 융합된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독자는 글에서 밀려 나오면서 동시에 끌어당겨 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것은 흡사 망원경으로 머나먼 우주의 별을 보거나 현미경으로 미세하게 작은 조직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멀고도 가까운' 느낌이다. 그러한 다중적인 시점은 작가의 구체적인 전략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는 데, 처음에는 내면과 맥락과 이야기가 철저하게 배제된 기계적인 관찰로 글을 시작하다가, 다음 순간에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연약한 감정과 상처가 숨어있는 이야기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파고들더니, 또 그다음에는 순식간에 바깥쪽으로 멀리 튕겨져 나오고 만다. 자칫 멀미라도 일으키는 게 당연한 데, 의외로 이러한 차원의 전환이 독자에게 전인적인 만족감을 주며, 윤리와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순수하고 정밀한 백치미 속에서, 몰입을 유지시켜 주면서 (놀랄 만큼) 가독성을 높여준다.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어느새 끝까지 읽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망원경과 현미경의 사이를,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밀도 높은 세계를 무시해 버릴 수 있는 편집증이 독자들에게도 요구된다.

그럼 대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주인공과 조연이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오히려 화자만이 주인공이 아닌데, '화자'라는 시점의 절대성을 고려할 때 그 역시 주인공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한 명 한 명이,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은 주인공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다. 심지어 이 소설 속 인물이 들려주는 어떤 이야기의 속의 등장인물마저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물과 다름없이 주인공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인물' 역시 '이야기 속의 인물'이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인물'과 어떤 차등도 없이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민주적인 구성은 옴니버스적인 평면적 이야기의 지평을 입체적으로 확대시킨다. 혹은 반대로 계보적이거나 계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평등하게 평면화시킨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얼핏 평행우주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사실상 어느 곳에서, 어느 누구에게서 시작하든, 그리고 어느 곳에서, 어느 누구에게서 끝이 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안에서, 바깥에서, 중간에서, 끝에서 시작하고 끝나도 결국 이 세계 전체가 똑같이 구축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틀림없이 이 속에서 길을 잃겠지만, 실은 모두 옳은 길이기 때문에 결코 길을 잃는 일은 없다.

이것은 문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실험 일지라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것을 '재미있다'거나 '재미없다'라고 규정하기가 참으로 애매하다. 나는 이 책을 위해 모든 미사여구를 끌어모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재미있다'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책을 위해 모든 독설을 끌어모을 준비 역시 되어 있지만 '재미없다'라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고'와 재미'없고'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와 '미'의 사이에, 혹은 ㅈ, ㅐ, ㅁ, ㅣ,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중립적이고 평이한 표현을 찾자면 이 책은 '특이하다'. 물론 특이하다고 해서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이 특별하지 않다면 과연 특이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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