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성스러움 (4)

르네 지라르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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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욕망의 탄생



사랑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힘이 샘솟고, 마음이 신선해지고,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상대방과 나의 사랑이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기분이 들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서로 통한다는 믿음, 상대방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는 기쁨에 도취된다. 반대로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은 우리를 몹시도 고통스럽게 한다. 고통과 절망, 공포가 너무 심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그토록 죽을 것처럼 괴로운 것은 실제로 그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자아가 고유하고, 주체적이고, 자유롭다고 믿는다. 자신의 자아의 기원은 자기 자신이며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아는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즉 자아는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며 그 상대방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란 정확히 말해서 '나와 너의 자아'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아는 단 하나가 아니다. '나'는 엄마의 자식으로서, 아빠의 자식으로서, 형제로써, 친구로서, 연인으로써, 배우자로써, 내 자식의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회사 동료로서, 이웃으로써 수없이 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자아란 곧 관계이기에 그 관계가 끊어지면 그 자아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죽음은 단지 문학적인 비유나 감정적인 심리 상태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며 무엇보다 실질적인 것이다. 그 자아는 실제로 죽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식'과 '자아'라는 용어를 다소 혼동해서 쓰지만 그 둘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보통 한 사람의 의식은 하나로 통합되는 반면 자아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관계는 각각의 고유한 자아를 만들어내며 의식은 필요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 특정 자아와 접신한다. 이것은 대본에 따라 다른 역할을 연기하는 연기자와도 비슷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배우인지, 이것이 연극인지, 자신의 삶이 역할들의 집합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인 다역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이면서도 그 역할들이 모두 일인 일역의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통일된 의식을 유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특히 의식이 자리를 잡는 어린 시절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이 가해지면 의식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마도 그 고통을 자신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방어 기제인 듯한데, 그 기억과 함께, 그리고 그 기억을 경험했던 자아와 함께 의식의 일부까지 분리되는 것이다. 그것을 해리장애의 일종인 ('해리'는 떨어지고 풀어진다는 뜻이다) 다중인격장애 혹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고 한다. 다중인격장애의 경우 의식이 여러 개로 분열되어 특정 자아들에 고착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 한 가지 자아만을 가진 여러 개의 의식들이 서로에게 단절된 채 번갈아가며 주도권을 차지한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는 수많은 자아들이 있지만 그 비중이 같지는 않다. 친구나 가족, 연인과의 상호-자아는 그 힘이 너무도 커서 주체의 의식을 압도할 정도다. 때로는 그 자아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그 관계가 끊어졌는데도 자아는 죽지 않고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우리는 상호-자아를 통해 상대방과 접촉하기 때문에 그 자아가 존재한다면 설사 관계가 끊어졌더라도 여전히 상대방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단출하게 추억이나 기억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힘을 행사한다. '내 안에 당신이 살아있다'는 낭만적인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자아의 기원과 본질이 낭만적인 것처럼 사랑의 기원과 본질도 역시나 낭만적일까?

앞 장에서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그 누구도 스스로 욕망할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발적이거나 주체적이거나 본질적인 욕망은 단 하나도 없다. 욕구 이상의 모든 욕망은 모방적인 것이다. 자아는 자신을 고유하다고 느끼는 것만큼 자신의 욕망과 선택까지 자발적이고 고유하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무지와 망각에 따른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욕망직스러워 보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욕망직스러워 보이는 것은 이미 나보다 앞서서 누군가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표절자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표절자라는 걸 모르는 표절자들로서 자신의 욕망의 기원이 자신임을 입증하기 위해 악착같이 원작자에게 소송을 거는 불온한 기소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이기거나 지는 게 불가능한 송사인데 자신이 고발한 용의자 역시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원을 쫓아가다 보면 인간을 넘어 성스러운 태초의 신에게까지, 무지와 망각의 신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 욕망의 대상이 사람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가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고 느꼈거나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 상대에 대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욕구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성적 욕구와 결합한 모방-욕망, 즉 사랑은 그 어떤 욕망보다 더더욱 단단하고 강렬하다. (욕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욕구는 생존 욕구와 번식 욕구를 반영하는 식욕과 성욕인데, 일반적으로 식욕은 어머니와, 성욕은 연인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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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사랑에 빠지는 불미스럽지만 드라마틱한 치정 사건을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접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며 '충격', '배신', '비정, '악의' 같은 단어들이 동반된다. 사람들은 친구의 연인을 뺏은 사람이 냉담하고, 무정하고, 친구에게 질투나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비난한다. 사실 한 사람에게 그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도 드물다는 점에서 그들의 분노도 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실제는 그와는 정 반대다. 친구의 연인을 뺏은 사람은 냉담하고 무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친구에게 다정하고 공감하며 의리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친구에게 냉담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에게 너무나 가까이 다가갔기에 그만 모방 메커니즘의 덫에 빠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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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덫이 아니다. 예외의 일이나 의외의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 세계 자체가 모방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모방은 더욱 강력해지기 마련으로,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친구와의 상호-동일화가 너무 성공적이었기에 친구의 욕망마저 모방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친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친구가 사랑한 대상마저 사랑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친구를 배반하게 된다. 이것이 모방 메커니즘의 비극이다.

일단 같은 대상을 욕망하게 되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장애물이 되면서 경쟁 관계로 들어간다. 둘 사이의 상호 교감이 그토록 긴밀했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긴밀했기 때문에, 또한 긴밀했던 만큼 그들 사이의 증오 역시 강렬해진다. 일단 모델과 모방자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면, 그들은 점점 더 집요하게 서로를 모방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모델과 모방자의 구분은 사라진다. 때로는 이들 사이의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살인과 같은 범죄에 이르기도 하는데, 서로를 모방하고 있는 둘 중 누구도 먼저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우리는 여자 하나를 두고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정 다툼에 대해 '참 나, 그깟 여자 하나를 가지고'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여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파멸적인 대결이다.

그래서 친구의 연인이나 배우자를 탐하는 것은, 그러니까 10계명의 하나처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금기시되어왔다. 만약 친구와 친구의 연인이 결혼 전이라면 금기는 다소 약화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억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모방-욕망은 가족 관계 내에서 더 강력하며 그만큼 더 극단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근친상간이나 친형제의 배우자와의 상간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가장 강력한 금기가 되어 왔다. 얼마나 강력한 금기인지 10계명에는 물론이고 공공연히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금기일 정도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는 금기. 이 금기에 준하는 것은 거의 없으며 기껏해야 (그냥 살인도 아니고) 인육 섭취를 위한 살인 정도가 될 것이다.

만약 친구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는 역시나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지 모른다. 이것은 윤리나 의지의 문제가 아닌 자동적이고 기계적이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 자식 간의 근친상간, 형제 자매 남매간의 근친상간, 형제나 자매의 배우자와의 상간 역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만약 이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면 금기가 그토록 강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것에 저항하고 있으며 다만 혼신의 저항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마치 스스로 저항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역시 모방-욕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모방하는 모델이 동성이 아닌 이성일 때 그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될 수 있다. 모방 메커니즘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의식이나 의지로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역시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가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트랜스젠더를 억압하는 것 역시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본과 모방품의 지나친 유사성은 폭력에 취약하며 결국 모방 메커니즘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와 윤리는 모방 메커니즘의 안정적인 지속을 위해 모방 메커니즘의 긍정적인 면을 권장하고 부정적인 면을 억제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이 과정에서 일부 개인들의 억울한 좌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했듯 모방-욕망은 의지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에 옆집 여자에 대한 욕망이나 자신의 여동생에 대한 욕망은 동등한 것인데도, 후자에 대해서는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사회 윤리적 탄압이 쏟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검열, 자기 억제, 자기비판의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며, 실제로 그 욕망이 생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자책하거나 후회하기 일쑤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희생 제의는 일상적인 것이며 우리 모두는 통상적인 희생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방 메커니즘이 긍정적인 면을 권장하고 부정적인 면을 억제한다고는 하지만, 그 '긍정'과 '부정'의 정의와 경계는 임의적이고 애매하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유동적인 데다가 긍정의 극과 부정의 극으로 보이는 양상조차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경우가 많다. 그것은 상당 부분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혼란과 혼선 때문이기도 한데, 언어는 본질적으로 모순적이고 우연적이고 불분명하고 엉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가 불량품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불완전함이 모방 메커니즘의 로고스와 다름과 자아의 환상을 지탱하고 전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하는 언어의 이중 플레이에 맞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그 진의를 숨겨야 하기에, 혹은 진의를 숨기기 위해 정보를 전달해야 하기에, 거기에는 말하여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 거짓말과 공백과 침묵이 훨씬 더 클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언어는 이해를 위한 오해이며, 오해를 위한 이해이고, 결국 오해를 위한 오해이다. 결론적으로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언어야 말로 진리의 방해자다. 하지만 오해라는 안경이라도 끼지 않으면 애초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과 같다는 현실을 우리는 감내해야 한다.

'사랑'과 '폭력'이라는 단어 역시 윤리적 의미나 가치 판단 면에서는 반대말인 듯 보이지만 관계의 거리, 즉 상호성의 강도로 측정할 때는 둘 다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좀 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사랑은 긍정적인 사랑이고 폭력은 부정적인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반대로 사랑은 긍정적인 폭력이고 폭력은 부정적인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위해 '긍정'과 '부정'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만큼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과 폭력 모두 사랑이며 사랑과 폭력 모두 폭력인 셈이다. 그럼 '사랑=폭력'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비인격적인 에로스의 경지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인격적인 존재인 우리가 그토록 단일하고 단호해지기는 힘든 일이다.

나에게 욕망의 대상을 지시해주는 모델을 특정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모델은여러 사람, 혹은 집단 전체의 초자아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델은 수없이 많으며 내가 욕망하는 대상, 사람, 이념, 혹은 가치는 그러한 모델들의 욕망들의 교차점이다. 만약 모방 메커니즘이 순기능으로 작동해서 그 집단 내에 긍정적인 모델들의 다양성이 충분히 확보되면 욕망들도 더 다양해지고 간접화되고 다변화되면서 폭력성은 줄어들고 그 진행 속도 역시 감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여유를 가지고 주체와 모델과 대상의 다중적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고, '나'의 다양한 자아가 유동적이고 활기차게 공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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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을 통해) 사랑에 빠지게 된 연인들 역시 (다른 모든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모방 메커니즘의 모형을 형성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경쟁관계에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서 그들의 애정 자체를 공동의 욕망의 대상이자 목적으로 삼는다면 서로 모방하고 경쟁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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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상대 자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면 사실상 대상이 사라져 버린 삼각형은 일그러지면서 점점 일직선에 가까워지고 그만큼 모방과 경쟁은 심화된다. 관계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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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서로를 모방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욕망으로 인해 자기애가 더 강화되고 또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소유욕 또한 강해져서 갈등이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경쟁이 극단화되어 상대방을 연인이 아닌 오직 경쟁자나 소유물로만 인식하게 되면 그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혹은 전혀 반대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경쟁마저 활성화되지 않으면 미분화된 자신과 연인의 뻔한 자기 복제의 닫힌 반복 속에서 모든 자극과 열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미 서로에게 어떤 욕망도 없지만 이미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대방을 끊어낼 수도 없기에 그저 지루하고 습관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모방 메커니즘 모형의 균형과 형태, 순환을 유지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경쟁자 혹은 장애물의 등장이 오히려 연인 관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술이나 전략, 양념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의 본질의 재생산이다. 애초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떤 모델의 욕망을 내가 모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대상을 욕망하는 그 모델은 동시에 나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뒤집어 말하면 무언가 내 욕망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은, 내 욕망에 경쟁 상대가 있다는 뜻이며, 그것이 나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누누이 강조하듯이 모델과 장애물과 경쟁과 욕망은 순차적인 인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작용에 대한 여러 관점의 표현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는 대상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이 만드는 것이며 그 가치의 정도 역시 장애물의 종류와 강도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가치는 연적들에 의해 창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적들은 경쟁을 통해 욕망의 대상을 서로에게 더욱더 욕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혹은 더 나아가 욕망하는 대상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 그들은 다투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상을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물리치려 하지만 실상은 경쟁 상대로 하여금 더 그 대상을 욕망하도록, 더 그 대상을 포기할 수 없도록, 더 상대방이 경쟁에 몰두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욕망하는 대상보다 실은 자신들의 연적과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동지이자 공범자들이며 사랑은 연인 두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세 사람이 (혹은 그 이상이) 함께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랑 이야기들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애초에 그들의 사랑이 모방과 장애물로 인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욕망하게 하지만 동시에 욕망을 방해하는 모방 메커니즘 속에서 장애물이 사라지면 사랑 역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사랑이 이루어지면 사랑도 끝난다는 것을, 자신들이 상대방이 아닌 사랑을 사랑하고 있음을 예감하면서 연인들은 어찌할 바 없이 고통을 받는다. 사랑이란 상대방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지만 (실상 미분화 상태에서는 '나'와 '너'의 구분조차 사라지기에) 합일을 이루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하면 합일을 이룰 수 없다. 비극의 본질은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애초에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모방이자 장애인 이 세계를, 모방 메커니즘을, 그들의 사랑마저 초월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듯 모방 메커니즘의 극단까지 파고드는 사랑은 사랑 자체를 뛰어넘어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모방 메커니즘을 조명하고 폭로하고 부정하고 거부하고 일시적으로나마 무력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이 얼핏 정 반대로 보이는 사랑과 죽음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이며, 모방 메커니즘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경계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을 이룬 연인의 키스로 끝나는 해피엔딩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연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과 전혀 다를 게 없다. 키스가 끝나는 순간 사랑도, 이야기도, 이 세계도 끝난다.



속물


우리는 동질성과 차별성의 변증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반드시 같아야 하며 동시에 반드시 달라야 한다는, 모방 메커니즘의 불가능하지만 강박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이것이 정신질환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망각과 연극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지와 망각을 통해 서로가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의 자아와 욕망이 모방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정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사람마다 각각, 그리고 한 사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들을 충실하게 연기한다. 우리 세계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연극이며 그 망각마저 연극적인 무대이다.

속물이란 이 망각의 연극에 진심으로 몰입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연극이란 결국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속물'이라는 단어에서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찬찬히 되짚어보면 우리는 정말로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성실함, 유능함, 철두철미함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속물이란 허영심이라는 형이상학적 환상에 빠진 사람이다. 그는 누구보다 열렬하게 모델을 모방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열렬하게 그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 누구보다 열렬하게 모델에 대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다르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다르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세계가 모방과 경쟁의 촘촘한 그물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또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환상에는 언제나 자기 비하적이며 연극적인 우울함이 깃들어 있다. 그는 얼핏 옷이나, 차, 집, 명예, 지식에 대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는 그런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를 것 없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분하고 구별하기 위해 그가 사람들 사이에 애써 그어놓은 가상의 선이다.

속물은 연인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듯이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보다 같아지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달라지려고 애쓰는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방 메커니즘이 분열시킨 '나', '남들과 같은 나', '남들과 다른 나'의 끝없이 돌아가는 삼각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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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은 그 편협함과 어리석음으로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사실 그는 오히려 무지와 망각에서 어렴풋이 깨어있는 사람이다. 그는 예민하게 모방 메커니즘을 감지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 그것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모방과 장애물과 경쟁의 게임임을 알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그것에 헌신하면서 스스로 모방 메커니즘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구현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속물은 낭만주의자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그도 허무의 상호성을, 상호성의 허무를 추구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그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그 역시 모방 메커니즘 위로 솟구쳐 오르고자 도약한다. 다만 그가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다른 점은, 그가 모방 메커니즘 위로 솟구쳐 오르는 건 모방 메커니즘 속으로 다시 멋지게 다이빙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모방 메커니즘 속으로 다이빙하는 건 모방 메커니즘 위로 다시 멋지게 솟구쳐 오르기 위해서이고 말이다. 비록 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역동적인 유영이 자랑스럽고 만족스럽다.



예술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술가야 말로 속물 중에서도 가장 속물적이다. 어떤 속물보다 더 깊게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위에서 묘사한 속물의 특징들을 예술가들은 가장 완전하게 실현한다. 그래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막상 한 개인으로써는 우스꽝스럽고 비천하며 천박한 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모든 속물이 예술가는 아니지만 모든 예술가는 속물이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만약 예술가들이 속물이 아니라면 애초에 속된 물질에 형이상학적이고 비실용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많은 속물들에게서, 그들의 고독하고 추상적인 열정과 자기애에서, 일종의 예술가적 기질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예술가가 속물과 다른 한 가지는 예술가는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설사 예술가 자신이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정확히 깨닫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거리두기'이기에 그는 자기 자신까지도 몇 걸음 뒤에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창의력'이란 이 '거리두기'에서 발생하는 힘의 긴장이다. '나'와 '모델'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모방에는 변수가 많아지기 마련이다. 훌륭한 예술가는 '나'와 '모델'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이 세계가 모방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역할극의 배우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예술가는 그만 두기는 커녕 모방 메커니즘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걸까. 왜 그 무의미하고 비정한 세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걸까? 그건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방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방 메커니즘은 너무나 근원적이며 근본적이기에, 예술가는 모방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예술가는 모방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비난할 때조차 오히려 그 메커니즘에 참여하고 또 그것을 수호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을 엿보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질환에 걸릴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물인 줄 알면서도 더 속물일 수밖에 없는, 모방 메커니즘에게서 거리를 두면서도 더 모방 메커니즘에 헌신하는, 망각과 무지라는 진통제가 더 잘 듣지 않는 예술가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술가'라는 다름의 허영으로 자신의 고통을 달래보려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이 세계의 비루함 만큼이나 자신의 비루함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한다. 그는 그 사랑에 중독되어 있기에 그것이 중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끊을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은 오직 자살뿐인데, 그것은 과연 모방 메커니즘에 대한 승리일까 아니면 패배일까.



부처


종교는 자살에 반대한다. 종교는 모방 메커니즘에 저항하라고 독려하거나 모방 메커니즘과 정 반대의 이상향을 가리키며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내라고 주체를 고무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사실은 모방 메커니즘의 술수일 뿐이다. 우리는 모방 메커니즘이 자신의 추종자 뿐만 아니라 반대자까지, 그리고 추종자와 반대자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역사와 드라마까지 조장하고 흡수하며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방 메커니즘은 자살처럼 모방 메커니즘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모방 메커니즘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모방 메커니즘이 용납하거나 부추긴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은 구성원들이 모방 메커니즘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모두가 순순히 모방 메커니즘에 참여하도록, 즉 모방 메커니즘의 톱니바퀴 중 단 하나라도 멈추지 않도록 환상과 신화와 언어의 미로 속에 우리를 가두어버린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모방 메커니즘에게 승리하는 길이라는 듯이,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가장 성공한 자도 가장 실패한 자도 모두 무대 위의 훌륭한 배우들일뿐이다. 그들은 모방 메커니즘이라는 연극이 성공리에 진행되도록 서로 긴밀히 돕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희생양이 희생되는 순간, 신이 부활하는 순간, 구 세계가 신 세계로 대체되는 공백의 순간, 카오스와 접촉하는 광란 속에서 모방 메커니즘의 비밀을 슬쩍 엿보지만 그것은 신비 속으로, 망각과 무지 속으로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그러한 부역자 종교들에게 반기를 든 종교들이 있으니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기독교와 불교이다. 3장에서 자세히 피력했듯이 예수의 기독교는 모방 메커니즘의 실체를 밝히고, 희생제의를 고발하고, 모방 메커니즘을 개조하려 했다. 희생양을 통해 세계가 부활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희생양을 뺀 나머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며, 종교를 사랑으로 대체함으로써 인류의 운명을 바꾸려고 했다. 그 어떤 사람도 무고하게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랑은 모방보다, '나'보다, 종교보다 강하다. 이것은 진정 자비와 구원과 희망의 종교이다.

그러나 반면에 불교에는 자비도 구원도 희망도 없다. 불교는 구질구질한 재활용이 아닌 이 세계의 분명한 폐기를 원한다. 예수처럼 종교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아니 우주의 뿌리부터 멸려버리려는 것이다. 단지 모방 메커니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의 일부이며, 모방 메커니즘의 공모자이자, 모방 메커니즘 자체인 우리로서는 모방 메커니즘을 멈출 수도 개선할 수도 없다는 것을 부처는 정확히 깨닫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앎과 깨달음은 전혀 다른 것이다. 부처는 깨달은 예술가다. 자신을 사랑하면 속물이 되고, 속물이 진실을 알게 되면 예술가가 되며, 예술가가 진실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이 세계의 기원을 방치하거나 부정하면서 이 세계의 본질을 개선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모방 메커니즘을 사랑으로 대체, 관리, 혹은 무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부처에게는 순진한 생각이며 심지어 일종의 교만이다. 설사 모방 메커니즘을 개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프랑켄슈타인의 인조인간처럼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리 없다. 그것은 그저 모방 메커니즘의 또 다른 버전이 될 뿐이다. 예수가 실천가라면 부처는 원론주의자다. 그에게 답은 너무나 분명해서 적당히 좋게 좋게 타협할 수가 없다.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타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른 시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타인을 그저 흉내내기 때문에 우리는 낙제를 하게 된다." 모방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모방 메커니즘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보는 불교는 모방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누가 희생양이고 누가 박해자인지조차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어차피 희생양도 박해자도 모두 연극 무대의 연기자들일뿐이며, 결국 억지로 무대라는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잠재적인 희생양이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나 이미 언제나 희생양이라는 뜻이다.) 아니, 이 세계 자체가 모방 메커니즘의 희생양이 아닌가. 이것은 불교가 사회적 불평등에 둔감한 이유이기도 하다. 본질이나 원천은 그대로인 데 각각의 현상에 매달리는 건 부질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그 자리를 그대로 대체할 것이다. 각각의 현상에 일일히 대응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을 뒤덮은 잡초 덩굴의 뿌리는 내버려 둔 채 그 가지만 끊임없이 치고 있는 격이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그 가족들이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그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이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또 화살 깃이 매의 킷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깃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를 먼저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부처는 모방보다 상호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인해 일어나고 인연으로 인해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상호적인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구분도 없으며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관통하며 펼쳐져 있다. 세계의 시초부터 세계의 종말까지 모든 곳의 모든 존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모든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의 원인이자 상황이자 결과가 된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그물망의 한 고리로서 전체 메커니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윤회사상의 (자아의 윤회가 아닌) 의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자신이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물이 바짝 마른 곳에 놓인 물고기와 같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세계 전체를 보면 새로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멈춘 것도 바뀌는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나도 너도 없다. 불교의 저울에서는 이 모든 것들의 무게가 같다. 부처는 세상만사가 상호성을 통해 내재된 환상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지와 망각의 앞잡이인 감정이 (그것이 사랑이나 행복처럼 아무리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해도) 선두에서 훌륭한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감정은 모방 메커니즘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그러니까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이며 기만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미움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의 관점에서 사랑과 미움의 무게는 같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둘을 다르다고 믿는 것은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믿지 말라." "진실로 사는 첫걸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은 환상을 찍어내는 기계이며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환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과 함께 일어난다. 우리의 생각으로 세상을 만든다." "고통이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환상에 빠진 환상, 누군가 꾸는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 누군가마저도 환상에 빠진 환상이며 누군가 꾸는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가상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게다가 그 누군가가 다시 나 자신이라면? 과연 우리가 수십 수백 수천의 차원이 뒤얽힌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오히려 꿈에서 깨어나는 꿈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꼴이 아닐까. 아니, 그 이전에 누가 진정 꿈에서 깨어나기를 원한단 말인가. 우리는 오직 꿈속에서만 실존하며 실존은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달콤한 것인데.

고통받는 인간들이 그 고통을 수호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모습을 부처는 냉정하게 바라본다. 부처에게는 예수 역시 그들 중 하나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예수의 사랑은 모방 메커니즘이 만들어 내는 얄팍하고 기만적인 사랑과는 다르다. 그의 사랑은 모방 메커니즘에 기원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모방이나 경쟁이 없는 순수한 사랑이다. 나만의 행복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공평무사한 사랑이다. 반면에 부처의 사랑은 (이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예수의 사랑과는 다르다. 부처의 사랑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행복해져야 불행해지고 불행해져야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행복하기만 한 세계란 없다. 행복한 세계에 대한 약속이 사람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지라도 그것은 (선한) 사기일 뿐이다. 부처에게는 예수의 신성한 사랑마저도 결국 모방 메커니즘의 원동력이 될 뿐이며 "그물처럼 뒤얽힌 욕망"의 부침일 뿐이다. 그에게는 행복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이나, 가해자나 피해자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은 똑같이 파도에 휩쓸린 채 때로는 떠오르고 때로는 가라앉는다. 우리는 그 바다를 해쳐나갈 수 있는 방주를 만들 것이 아니라 바다 자체를 없애야 한다. 다시는 그 누구도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말이다. "굽이쳐 흐르는 욕망의 물살을 남김없이 모두 말려버린 사람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물론 모방 메커니즘을 없애는 것은 나 자신마저도 없애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살과는 다르다. 자살은 일시적으로 모방 메커니즘에 충격을 주긴 하지만 모방 메커니즘 자체를 흔들지는 않는다. 모방 메커니즘에 반동하는 자살조차 결국에는 다른 죽음들처럼 모방 메커니즘의 일부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우리 개인의 삶과 죽음은 모두 모방 메커니즘에 오롯이 속해 있기에 우리는 심지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살해서도, 모방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에 해탈이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 자체의 죽음이다. 우리를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방 메커니즘에게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끊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모방 메커니즘의 용어이다. "물거품처럼 세상을 보라. 아지랑이처럼 세상을 보라. 그럼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

희망 없음.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이다. 타협이란 없으며 진리란 엄중한 것이다. 모방 메커니즘은 단일한 시스템이고 그 자체는 결코 선도 악도 아니다. 선과 악은 모방 메커니즘의 가지에 달린 열매에 불과하다. 우리가 둘 중 어떤 과실을 먹든 그 배설물은 똑같이 모방 메커니즘을 위한 훌륭한 비료가 될 뿐이다. 모방 메커니즘을 지킬 것이냐, 모방 메커니즘을 없앨 것이냐. 우리는 오직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타협이란 없다. 진리란 엄중한 것이다. "여기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이익을 추구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이치를 깨달아 남의 존경을 기뻐하지 말라." "감각적인 기쁨이란 실로 다양하며 감미롭고 매혹적이지만 이 기쁨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욕망의 대상에게는 이런 불행이 있음을 알고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방 메커니즘에 대한 부처의 진단과 이해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내가 아는 한 이보다 세계를 더 정확하게 묘사한 이론은 없다. 나는 오히려 이것을 과학의 영역에 넣고 싶을 정도다. 그러니까 결코 종교는 아니다. 불교신자들마저 불교를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내 가르침은 바로 그 뗏목과도 같다. 강을 건널 때 잘 썼다면 그것으로 뗏목은 역할을 다 한 것이다." 강을 건넜는데도 뗏목을 등에 이고 가는 사람은 없다.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부처야 말로 실용주의자이며, 끝까지 종교적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예수를 원론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종교로서의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신에게만큼이나 희생양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정반합의 변증법 구조에 참전한 예수의 반(反)종교를 뛰어넘어, 불교는 종교도 반종교도 아닌 비(非)종교라고 할 수 있다.

해탈 역시 우리가 보통 연상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탈이란 모방 메커니즘의 진리를 정확히 깨닫고 더 이상 그것에게 굴복하지도, 그것과 타협하지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지심행(至心行)의 완전한 일치. 이것이 앎과 깨달음의 차이이다. 해탈은 근본적인 의혹을 벗어버리고 더 이상 진리를 오염시키지 않는 것, 상호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체성을 찾는 것, 모방된 '나'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럼 세상은 형태와 현상이 갈라져 안과 밖이 뒤집어지면서 텅 빈 내장을 들어낼 것이며, 우리는 이 세계가 뇌가 없는데도 생각을 하고, 폐가 없는 데도 숨을 쉬고, 심장이 없는데도 사랑을 하고, 위장이 없는데도 소화를 하고, 배설물이 없는 데도 배설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 역시 생각하기를, 숨 쉬기를, 사랑하기를, 소화하기를, 배설하기를 저절로 멈추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오해와는 다르게, 해탈은 한 번의 빅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이루어야 하는 끝없는 과업이다. 나는 부처 역시도 해탈을 완수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부처는 매 순간 해탈했으며 또한 매 순간 실패하기도 했을 것이다. 해탈은 견디고 치러야 하는 일상의 한 형태일 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을 때까지 해탈하고 또 죽을 때까지 실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건강과도 같다. 결국 누구나 죽지만 죽을 때까지는 건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결국 완전한 해탈이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기에, 불교 역시도 '불가능하기에 믿게 되는' 신비주의 종교의 하나가 된다. 불교도 예수의 기독교처럼 모방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개선하면서 자비와 구원과 희망의 종교, 모방 메커니즘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가 자비니, 자아의 윤회니, 육식 금지 같은 (선한) 사이비에 빠져든 이유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방 메커니즘을 없앨 수 없다면 우리는 선해져야 한다. 언젠가 부처 역시도 돌연 인간적인 애정이 벅차올라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만약 부처가 진정 깨달은 자였다면 그는 침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고 동시에 가장 실패한 제자였다. 그는 그저 쉬지 않고 정진했을 뿐이다. 그럼 과연 부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예수처럼) 그도 언어라는 곡괭이의 자루가 아닌 날을 붙잡고서, 말씀으로 이 평면의 세계에 깊이를 만들었다. 그 안에 물이 고일 수 있도록, 그래서 바짝 마른 곳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던 우리가 비로소 자신이 물고기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은 너무나 큰 일이지만, 또 그리 큰 일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핵심이 되는 말씀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실체를 가리키는 깊은 진리의 표현이기에, 세상 모든 것이 공허함을 바로 본다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그 실체 닿을 수 있다.

사리자여, 세상만물이 공허함과 다르지 않고 공허함이 세상만물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그러하다.

사리자여,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허하기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이렇게 공허하기에 물질도 실체가 따로 없고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느니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기에 본다는 것과 본 것을 의식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다.

괴로움에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없고,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 또한 없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찾는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거짓 믿음을 넘어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부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찾음을 온전히 끝낼 것이다.

그러니 명심하여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방법이기에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진실에 닿을 수 있다.

그래서 일러주리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거라.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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