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
나는 앞의 글들에서, 우리는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들이기에 서로가 우열 없이 같은데도 무지와 망각으로 인해 자신은 남들과 다르며 자신의 자아와 욕망이 모델의 자아와 욕망에 선행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에 빠져든다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어조를 다소 바로잡아야겠다.
우리는 서로 같다. 그러나 서로 전혀 다르다고 믿는 우리의 생각보다 같다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나 지문처럼 본질적으로 각자가 다르며 특유의 고유함과 독특함이 있다. 그러니까 모방 메커니즘은 일면 우리가 실은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달라지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같아지고야 마는 원리인 셈이다. 더군다나 '모방' 역시도 마치 복사기처럼 상대방을 나라는 백지 위에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세계는 아담을 똑 닮은 클론들로 가득했을 것이고 어떤 변화도 없는 균일함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암컷과 수컷을 둠으로써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려 했던 자연의 (혹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던 신의) 전략처럼, '나'와 모델의 상호적인 변증법 속에서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세계 역시 변화되어 왔다. 그것을 진보로 평가하든 퇴보로 평가하든지 간에, 제자리에서 정체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이 의지 자체는 진보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의지는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기 이전에 본능적이며 생존적이다. 치열한 진화의 경쟁 속에서 과거를 답습하며 제 자리에 머무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도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방은 다른 경쟁자, 혹은 경쟁종들보다 앞서나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단지 똑같이 모방해서는 그들을 앞설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위 불리한 자연환경과 신체조건 속에서도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그들을 단지 모방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방 이상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끼를 모방하는 것은 토끼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토끼처럼 빨리 뛰기 위해서다. 우리가 타자를 모방하는 것은 타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타자 이상, 결국 지금의 자신 이상이 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모방 메커니즘을 다시 규정하자면, 하나의 개체가 모방을 통해 모델과 같아지지만 동시에 그 모방을 통해 모델과 달라지며,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달라지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같아지면서 마침내는 진정 달라지게 되는 원리인 셈이다. 물론 '자아'는 이 모든 과정에 무지한 채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한다.
이쯤에서 모방에 대한 오해를 좀 더 해소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모방이란 경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이 오직 모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모방이 경쟁의 근원인 것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문명은 경쟁, 자연은 평화라는 일부의 환상과는 다르게 자연적인 욕구도 경쟁한다. 아니, 자연의 생존경쟁이야 말로 모방 폭력보다 더욱 즉각적이고 치열하며 가혹한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모방-경쟁이 우리의 인간적인 감수성에 지속적인 압박과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에 비하면 상당히 순화된 폭력이다. 모방-경쟁, 혹은 욕망-경쟁은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파멸을 회피하기 위해 욕구-경쟁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며, 우회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슬아슬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지금까지 제법 효과가 있었다. (감히 압도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까?) 그래서 모델이 '장애물'이 되는 것 역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멈춰라. 기다려라. 인내하라. 노력하라. 타협하라. 그럼 진정 원하는 것, 단순하고 즉각적인 욕구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델은, 장애물은, 환상은 우리가 물리치거나 쳐부숴야 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절충하고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속세적으로 보나 영적으로 보나 '성숙'의 의미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데로 정말 모든 장애물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끝없이 타락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소서'라는 기도가 가장 최종적이고 가장 절대적인 장애물인 죽음 앞에서조차 봉헌되는 것이다.
모방-경쟁을 통해 욕구-경쟁을 극복하고, 욕망 간의 거리를 벌리고, 욕망과 성취 간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자아-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입체적인 공간을 구축하였다.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두 발로 딛고 일어나 인간이 되고, 문명과 문화를 세우고, 진보할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모방 메커니즘에 대해 톱니바퀴나 기계, 비인간적, 자동적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했지만, 자연과 대조해 보면 모방 메커니즘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형이상학적일 뿐이다. 심지어 모방 메커니즘이 유발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조차 (때때로 자연-폭력에 거의 접근하긴 하지만) 그러하다. 우리가 모방-경쟁 이전의 이상향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모방 경쟁 이전이 아니라 모방 경쟁이 심화되기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정리하자면 모방은 단지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복사가 아니다. 우리는 모델을 모방할 때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모방물을 혹은 그 일부분을 선택하고 조합하고 개선한다. 결국 모방은 그 자체로써 밀어 올리고, 갱신하고, 진보하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힘이다. 이것이 모방 메커니즘의 진정한 본질이다. 모방 메커니즘은 점차적으로 모델을, 장애물을, 세계를 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폭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위해나 방해, 혹은 통제할 수 없는 물리적인 연쇄반응 때뿐만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의 진보적이고 건설적인 기능을 저해하고 심지어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모방 메커니즘의 진보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세계가 다시 수축하거나 퇴보하려 할 때, 구원을 위해 극단적인 조치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희생 제의다.
우리는 여기서 희생 제의에 대한 해석 역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희생 제의는 희생양에 대한 집단 폭력을 통해 (멈추지 않는 그리고 멈추어서도 안 되는) 모방 메커니즘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어 관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진정 악마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앞의 장에서, 희생 제의란 집단 전체를 파국에 빠트릴 수 있는 모방 메커니즘의 과열된 폭력을 '희생양'에게 모두 전가함으로써 위험을 해소하는 정화 작용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반쪽짜리 답안지이다. 모방 메커니즘이 그렇듯, 희생 제의 역시 단순히 기계적이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인 정화 역할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희생 제의를 통해 부활한 세계는 단지 폭력만 제거되었을 뿐, 그러니까 그저 목숨만 연장되었을 뿐 이전 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똑같은 자기 복사를 반복하거나 막막한 공허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희생 제의를 통해 변화하며 소위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넘어간다. 비슷한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사함, 그리고 '부활'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부활로 이끄는 그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희생양에게서 온다. 희생양에게는 단지 희생당하는 제물, 일방적인 폭력 받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방 메커니즘이 희생 제의를 통해 정화 작용과 진화 작용을 동시에 완수할 수 있는 것은 희생양이 희생과 개혁을 동시에 완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억울한 희생자인 희생양이 개혁을 완수한다고? 이 질문에 '폭력과 성스러움'의 저자 르네 지라르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는 아예 질문조차 듣지 못한 사람처럼 영 딴청을 피우며 은근슬쩍 옆으로 비껴나간다. 저자가 그토록 지적했던 무지와 망각의 환상에 저자 자신이 (어쩌면 자발적으로)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짐작컨대 그것은 그의 양심이 지성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는 종교를 (특히 고대 종교나 원시 종교를) 함부로 미신이나 어리석음, 조작, 거짓으로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지성의 포기이며 경솔한 편협함이라면서, 그 세계의 실질적인 의미와 작동 방식을 인정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단절된 자의식 속에 갇혀서 다른 세계를 제단 할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메커니즘에 공정한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모방 메커니즘'이 다분히 비주체적, 비지성적, 비감성적으로 작동하기에,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감정이 배제된 기계론적인 심리학을 주창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이 모방 메커니즘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으며 기계적 실용성이 모든 인간적 특징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결과적으로 그의 이론이 희생 제의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희생양'은 우리의 근원이자 본질이며, 법과 윤리적 장치가 아직 완비되지 않은 원시 사회에서 희생 제의는 유일하고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당연하다는 의미에서 심지어 일면 정의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더 이상 '원시'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의 세계라고 해서 그들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일까? 단일한 모방 메커니즘이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현대의 법과 윤리는 모방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완비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희생양의 정당성과 실효성은 현대에도 유효하지 않은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구원을 이루는 공식은 언제나 정당하고, 정의로우며, 신성한 것인가?
르네 지라르는 이 대답을, 이 대답의 파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희생자에 대한 폭력을 옹호하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는 자신의 이론을 더 선명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돌연 (학문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당한 이론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대신에 희생양의 역할과 의미를 철저하게 축소하는 쪽으로 적당히 타협한다. 희생양은 단지 집단 폭력에 대항하거나 복수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는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는) 약자이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이것은 과연 옹호인가 모욕인가?
희생 제의는 정당하지만 정당하지 않다.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우리에게 이중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시대와 장소의 차이라는 조건이 붙지만 모방 메커니즘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는 것은 르네 지라르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적 고뇌에 경도된 그는 모방 메커니즘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에서 (학문적인 접근인척 하면서) 윤리적인 접근으로 은근슬쩍 선회한다. 그는 희생양 선택 기준의 무작위성과 부당함을 강조하면서, 누구나 희생양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약자들이 손쉽게 그 대상이 될 것이라고 선언(경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사실이 아니다. 모방 메커니즘이 희생양을 그저 힘없고 만만한 애들 중에 아무나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모방 메커니즘의 정교함을 그토록 치밀하게 분석한 르네 지라르가 갑자기 이토록 막연하고 엉성하며 순진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 내게는 가히 충격적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의 무고함을 밝히는 데에만 급급하여 희생양의 신성한 자질을 원천적으로 무시한다. 희생양의 인격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의 존재를 박해한 셈이다. 르네 지라르의 주장과는 달리, 누군가 희생양으로 선택된 데에는 무력함 외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가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까다롭고도 위험하지만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의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을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이 박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원인'과 '잘못'은 전혀 다른 구분이다. 나는 이 글 전체에서 내내 일정 단어의 도덕적인 (선이나 악과 같은) 뉘앙스와 의식적인 (자각이나 자동과 같은) 뉘앙스를 제거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비겁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뉘앙스 역시도 그 단어 본연의 진동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 희생양으로 선택된 건 그가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특히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며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는 걸 인정한다. 본질적으로 '희생양'의 원인은 희생양 자신이 아니라 모방 메커니즘이다. (여전히 박해자를 위한 면피성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니 다시 다듬어서 (특히 희생양을 주어의 자리에 놓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표현하자면, 모방 메커니즘은 '희생양'에게 특정한 자격을 요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세계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는 단지 폭력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는 끊임없이 진보해야 한다. 문제는 진보하려면 기존 체제에 다름이 유입되어야 하는데, 다름은 단일한 구성을 위험에 빠뜨릴 여지가 있기 때문에 억압받아야 한다. 그러나 단일한 구성은 도태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역시 어떻게 해서든 다름은 유입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맞물리는 과제이며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한 체제는 언제나 다름의 포함과 배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모순된 긴장 상태에 놓여있다. 이 긴장을 해결하는 역량이야말로 그 체제의 생존과 직결된다.
다름은 모방 메커니즘을 무너뜨릴 수 있고 또 변화시킬 수 있는 양면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다. 이 신성한 부조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바로 희생양이 이 모순을 해결한다.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자는 남들과 다르다. 물론 남들과 지극히 같다는 전제하에 다르다는 것인데, 모방의 동일성 속에서는 딱 반 발자국조차 큰 차이가 될 수 있다. 또한 구성원 누구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반발자국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거의 (의지의 전능함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운명적인 일이다. 그것은 상호성과 변증법과 시대와 우연과 집단과 사건과 사물 등등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불거진다. 어쨌든 다르기 때문에 달라 보이고 달라 보이기 때문에 다른 이 '다른 자들'이 집단 전체의 만장일치가 요구될 때 동일하게 협조할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이 '미지수'라는 것이 '반대'보다 더 큰 긴장과 불안을 야기한다. 우리는 언제나 다양성의 가치를 논하지만 만장일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다양성은 불안과 혼란, 폭력의 단초가 될 수 있으며 법과 제도가 완비되지 않은 시대에는 더욱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위협이다. 그러한 가능성만으로도 집단 내의 의심과 불안이 고조되고, 그러한 의심과 불안이 개인의 성숙함이나 윤리 만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현실적인 압력으로 작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위협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는 단지 몰지각하거나 편협한 망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가령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늘 빠짐없이 언급되는 유대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남들과의 다름과 선민의식으로 구축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대대손손 유지, 강화하고 있는 그들 말이다. 하나의 국가 안에서 자신들만의 국가를 고집하고 있는 그들을 대체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과연 그들과 함께 만장일치에 이를 수 있을까? 오히려 왕정 시대라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은 오히려 나머지들 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무신경할 수 있다. 그러나 점차 민주화, 평등화되면서 모두가 함께 똑같이 한 표씩의 권리를 행사해야 할 때 불안과 갈등은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 표현과 다름의 자유를 인정하는 민주주주의란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단일성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단일함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없다면 결코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에게 아직 자신들의 국가가 없던 시기에, 그리하여 그들이 모든 나라 안에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던 시기에, 유대인들과 함께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했을까?
그러나 위협이 되는 이 다름이 그 집단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개개인의 윤리나 이념, 의식과는 상관없이, 다름은 그 사회에 대한 질문이며, 자극이며, 도전이다. 다름은 뻔하고 안전한 답습을 반복하고 있는 그 집단의 구태에 새로운 관점과 진동과 소음을 만들어 낸다. 금기를 세운 신들 자신이 오히려 보란듯이 금기를 깨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금기는 그 세계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이면서 동시에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기를 깬 자가 희생양이 되거나 희생양이 금기를 깨게 되는 것이다.
희생양이 되는 대상이 '눈에 띈' 것은 이미 그들의 관점과 진동과 소음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집단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그러한 다름을 극복하기 위해 이들을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반항하거나 복수할 수 없는 일방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실은 그 다름을 제압하면서도 한편 그것을 수용하고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다름을 억압하고 단죄하기 위한 명분으로 선택된 희생양이 그로 인해 세계의 신으로 추앙됨으로써 오히려 그 다름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고 신화와 윤리, 언어를 통해 그 집단에 영구히 보존되고 또한 기념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당면한 과제만큼이나 모순적이지만 또한 그만큼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희생양은 모방 메커니즘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되는 방식을 통해 오히려 모방 메커니즘의 가장 중심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왜 포로처럼 가장 비루한 자와 왕처럼 가장 위대한 자가 모두 희생양이 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희생 제의는 폭력 해소뿐만이 아니라 모방과 다름의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모방 메커니즘의 (반어적이고 부조리하지만 어쩌면 최선인) 전략이다. 그리고 희생양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인 모방 메커니즘의 참여자이자, 모방 메커니즘을 통치하는 비의식적고 비자율적인 정치인이자, 모방 메커니즘을 재창조하는 실질적인 주체자이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의 책 제목을 '폭력과 성스러움'이라고 했다. 희생양이 집단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성스러워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장의 제목을 '성스러움과 폭력'이라고 했다. 희생양이 애초에 성스러웠기에 희생양으로 선택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르네 지라르의 논리대로 희생양이 희생 제의를 통해 성스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공식적으로 공인되고 연출되고 고정되는 것일 뿐, 성스러움은 그 대상이 희생양으로 선택되기 전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 사람이 희생양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남들과 달랐으며 그 다름의 가장 분명한 화신이자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양은 같았기 때문이 아니라 달랐기에, 그저 약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일면 강자였기에, 비루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러웠기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글쎄, 이것은 과연 옹호인가 모욕인가?
개인적인 차원의 '나'를 형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언가와 대립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와 상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립자다. 그러니까 동질성이 아닌 이질성이 우리의 기준과 경계가 된다. 그리하여 모든 집단에게는 희생양이 있지만 어떤 희생양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정체성과 관점과 지향이 달라진다. 그 사회가 무엇을 '다름'으로 보는가가 그 사회의 본질과 특성과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러니까 '희생양'이 바로 그 사회의 기준이면서 동시에 경계이고, 일종의 자기표현 방식이며 방향성인 것이다. 그래서 희생 제의는 다름과 같음의 가상의 전쟁이며, 늘 같음이 승리하도록 정해져 있으면서도 그 두 가지 가치 모두를 평등하고 공정하게 드러내는 (다만 '선'과 '악'이라는 역할놀이 속에서 박해자도 희생양도 감쪽같이 속고 있는) 일종의 연극이기도 하다. 표면적인 대립이라는 연극적인 상황극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창조하면서 집단 자아를 확립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집단'이라는 표현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집단 자아가 없는 집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집단 자아가 없는 개인 자아 역시 존재하지 않는데, 개인이란 오직 집단속에서만, 즉 상호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 제의라는 신성한 연극은 지나치게 직접적이면서 지나치게 기만적이기에 이제는 폐기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희생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희생양은 결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행간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를 함의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그것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일까? 나는 그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 대안 역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것을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내가 희생양이 되지 않기만을, 그리하여 내 자아가 탈인격화되는 고통을 겪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 같은 범인과는 다르다. 예수는 자신이 직접 희생양이 됨으로써 모방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희생 제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고발은 희생양이 다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만약 예수의 사랑이 단지 무고한 이들을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는 결코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대안 없는 희생양의 부재 속에 다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이 약자의 보호를 넘어 다름을 보존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방-욕망이 자연-욕구를 통제했듯이 사랑 역시 모방-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랑은 모방-욕망을 방해하고, 지연시키고, 극복하며, 그렇게 넓게 펼쳐지고 교차되고 혼용되는 과정 속에서 세계는 다름을 자연스럽게 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가족, 혼인, 협상, 동맹 등이 될 것이며, 형이상학적으로는 같음과 다름의 가족, 같음과 다름의 혼인, 같음과 다름의 협상, 같음과 다름의 동맹과 다름 아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다음 세대들은 양쪽 가치 모두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자신의 혈통 안에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사랑이 폭력이라는 사랑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사랑은 교환이나 거래, 경쟁을 초월하며, 아무 조건 없이 동의와 조화와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불가해한 열정이다. 이 사랑 역시 모방 메커니즘의 일부일까? 그렇다. 일종의 원심력인 사랑이 없었다면 모방 메커니즘은 훨씬 더 구차하고 협소하고 형이하학적이었을 것이고, '나-모델-대상'의 삼각형은 언제나 자신들이 발산하고 발기하는 열기와 욕망의 구심력으로 인해 무참하게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기원은 모방 메커니즘보다 더 오래되었다. 사랑은 아직 카오스의 젖가슴에 안겨 있던 태초의 아기 에로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아기 예수는 바로 이 아기 에로스의 화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적인 사랑이 현실의 구체적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극악한 범죄자들조차 일종의 희생양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 역시 일종의 박해가 아닐까 근심하게 된다. 범죄자란 모방 메커니즘의 상호성 속에서, 그러니까 결코 독단적일 수 없는 모든 구성원들과의 상호성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 책임을 범죄자 한 개인에게 지운다면 그가 바로 희생양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유대인과 나치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뜻일까. 우리는 여기에 다시 부처를 소환해야 하는가. 모방 메커니즘을 멈추고 이 세계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이 세계와 나 자신의 멸망을 꿈꾸면서?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는 무지와 망각이 필요한 것이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