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32

잭슨 폴록

by 곡도

Number 32 넘버 32 / Jackson Pollock 잭슨 폴록 (1950)






예전에 아주 오래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회랑 위에서 잘린 한 남자의 머리가 층계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는 그림이었는데,


(회랑 위에는 목 없는 남자가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지.)


층계에는 붉은 피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아니,


캔버스 위에는 붉은 물감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환상과 재현과 사물의 일치 때문에 (혹은 겹침 때문에)


나는 괴이한 어지러움증을 느꼈다.


그것이 원래 예술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환상과 실재를 뒤섞어 마법의 묘약을 만드는 것.


은폐와 폭로를 비비 꼬아 기묘한 무늬를 짜내는 것.


사기를 쳐서 진실을 폭로하면서 또 몇 개는 슬쩍 뒤로 빼돌리는 것.


출구가 없는 무책임한 미로를 보란 듯이 하늘 높이 건설하는 것.


그림 안의 수많은 군중 중 한 사람이 슬쩍 나를 쳐다보게 하는 것.


그런데 이제 예술가들은 그런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거짓과 가식과 가증에 침을 뱉겠다는 것이다.


물감은 그저 물감이고, 사물은 그저 사물이라는 것이다.


왜 물감을 형상으로 치장하고, 왜 사물을 환상으로 포장해야 하나.


환상이나 재현 같은 거짓부렁에 놀아나지 않고,


비밀이나 은폐 같은 낯간지러운 짓거리 따위는 집어치우고,


미리 다 까발려서 폭로할 것 하나 남아있지 않게,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실존적인,


자유로운 인격이 아니라 인격에서 자유로운,


예술은 사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좋다. 나도 즐겁다. 흥이 난다.


영혼이 없는 사물의 자유로움.


운명과 우연의 흔적의 수집.


지극히 예술가답고 지극히 예술다운


진정 미학적인 작품들.


아름답다.


그러나 다른 영웅들을 죽이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결국 괴물이 되는) 탐욕스러운 영웅처럼


예술가가 캔버스 위에 신나게 뿌리고 있는 것은 실은


물감이 아니라 미래의 모든 예술가들의 피가 아닌가?


물감이 물감으로 충분하고


자유가 자유로 충분하고


사물이 사물로서 충분하다면


왜 예술가가 필요하고 예술이 필요하지?


쯧, 거추장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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