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노이즈오프
공연장소 :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공연기간 : 2025년 3월 1일 ~ 2025년 3월 14일
관람시간 : 2025년 3월 1일 오후 4시
* 영문 제목인 'Noises off'처럼 한글 제목에서도 '노이즈'와 '오프' 사이를 띄어서 '노이즈 오프'라고 해야 하는데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연극이 '노이즈오프'로 붙여서 표기하였기에 그대로 표시함.
꽤나 오래전에 영화로 이 작품을 접한 뒤, 연극으로 꼭 다시 보고 싶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다가 인터파크에서 이 연극을 발견하고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예매를 했다. 거의 3달 만에 보는 연극인 데다가 올해 들어 처음 보는 연극인지라 내 기대감은 한껏 높았다. 자, 이미 눈치챘겠지만 글쓰기 기술에서 기대감이 높았다고 굳이 첨부하는 건 언제나 실상이 그 기대감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이즈 오프'는 똑똑하고, 재치 있고, 과감하며, 동시에 서민적이고 친근한 희곡이다. (솔직히 나름의 어설픔과 엉성함 역시 많은 희곡이긴 하지만 일단 차치하도록 하자.) 그러나 그만큼 어려운 희곡이기도 하다. 아니,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참으로 어렵다. 우리는 비극에 대한 이론은 세울 수 있어도 코미디에 대한 이론은 세울 수가 없는데, 이론을 세울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코미디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불가해한 공식이며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을 빗겨나가는 과녁을 정확히 맞혀야 하는 휘어진 화살이다. 코미디에는 영민함과 비상함, 정교함과 섬세함, 자신감과 능동성, 공감능력과 열린 마음 등의 능력 뿐만 아니라 공허, 망가짐, 결핍, 자기 비하, 공포와 두려움 등과 같은 무능력 또한 필요하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 번 피식 웃기 위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전 인류, 역사 전체, 육체, 자연, 죽음, 신 등등을 모조리 동원해야 한다. 혹여 기적처럼 크게 웃음이라도 터진다면 그것은 우주 전체가 요동치는 것과 맞먹는 일이다. 그래서 신은 웃지 않는다. 우리는 신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하지만, 신이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의 웃음이다. 그것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실상 우리가 불량품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사탄이 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면 (혹은 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사탄이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라 웃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악과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그 새큼한 신맛에 아담과 이브는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고, 그래서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고, 확신하건대, 천국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 되었다.
한 때 '해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정교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해체'란 결코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완전하거나 통합되어 있지 않은데 대체 무엇을 해체한다는 말인가. '해체'라는 말은 '노출'이나 '폭로'라는 말로 대체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모든 것이 느슨하고, 단절되어 있고, 무작위적이고, 시시각각 변신하고, 지극히 작위적이라는 예감이 노출-폭로될 때, 그것을 우리는 부조리라고 부른다. 부조리란 숨겨진 것이 없는 데도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데도 숨겨진 것이 없는 것이고, 모르는 것이 없는 데도 알지 못하는 것 혹은 알지 못하는 데도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데도 부재하지 않는 것 혹은 부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조리와 함께 유희를 벌이는 (벌여보겠다는) 코미디야 말로 이 부조리와 대결을 벌이는 (벌여보겠다는) 비극보다 더 신성하지 않은가.
유희 속에서 부조리와 부조리가 접촉할 때, 실존적 존재는 간지럽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터트린다. 코미디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어려우며 신비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코미디를 코미디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접촉, 즉 '타이밍'이다. 타이밍은 코미디의 (사실상 우주 만물의) 내용이고, 기술이고, 또 동시에 본질이기도 하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듯이, 지연된 타이밍은 타이밍이 아니다. 0.1초의 차이, 혹은 아주 미세한 어조, 혹은 빼도 아무 상관없는 조사의 유무 따위가 코미디에서는 결정적이다. 똑같은 대사일지라도 어떨 때는 큰 웃음을 일으키고, 어떨 때는 유치하기 그지없으며, 심지어 냉소와 경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분석할 수 없다. 그러나 안다. 아니, '안다'기 보다는 '반응'한다. 마치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재채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코미디는 참 어렵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코미디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어쨌거나 웃음이 터지지 않는 건 웃음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연극을 보면서 한 번도 웃음이 터지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빵빵 터졌다는 걸 공정하게 말해둔다.) 이 연극은 전체적으로 '타이밍'이 잘 맞지를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아슬아슬 조급하고, 주고받는 대사의 합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캐릭터에게 생기와 매력을 부여하지 못했으며, 관계의 개연성이 자꾸 끊어지고, 흐름에 빈틈이 숭숭 나있고, 힘 있게 올려붙여야 하는 곳이나 확실히 힘을 빼야 하는 곳에서도 죽죽 늘어진다. 심지어 우리의 그 소중한 '정어리'조차 비릿한 신선함을 잃었다. 솔직히 말해서 연습이 덜 되었거나, 해석이 부족했거나,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부하자면 나는 희곡 원문을 공연자 멋대로 편집하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이 연극은 원작 대사의 많은 부분을 멋대로 수정함으로써 특유의 유머와 리듬과 개연성을 해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맥락을 꼼꼼히 삭제한 건 공연장의 장소성을 고려한 자기 검열의 결과인가, 아니면 외압의 폐해인가? 그렇다면 공연장을 바꾸든지 작품을 바꾸었어야 옳지 않았을까?
많은 코미디 작품이 그렇듯이 - 계속 말하지만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에 - 이 희곡 역시 배우들에게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자유를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마치 정교한 시계의 복잡한 톱니바퀴들처럼 기계적으로 딱딱 맞게 돌아가야 한다. 그중 작은 톱니바퀴 하나만 미세하게 맞지 않아도 시계의 시간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하게 맞기 마련인 멈춘 시계보다도 더 나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게는 이 작품이 제대로 맞지 않는 시계였던 셈이다. 그러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코미디는 정말로 어렵다. 그것은 악마를 웃겨야 하는 일이다. 악마는 쉽게 웃지 않지만 한 번 웃으면 그 누구보다 크게 웃는다.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서 웃음은 결함이나 사건이나 일탈이나 어리둥절함이나 오류가 아니라 목적인지도 모른다. 만약 삶이 부조리라면 웃음은 그 한없는 부조리 너머의 지평선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지평선을 보기 위해 이 땅 위에 두 발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생물학적, 심리적, 문화적 진화는 웃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우리가 웃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을 수 없을 때 사람은 죽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