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연극 :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공연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기간 : 2025년 5월 2일 ~ 2025년 5월 4일
관람시간 : 2025년 5월 4일 오후 3시
안헬리카, 당신의 공연은 진부하고 지루해요.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당신이 원했던 것이기에
내 말이 모욕이 되지는 않겠죠.
일단 자기반성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제목에 나오는 '후안 벨몬테'가 누구인지 사전에 찾아보았어야 했다. 일단 제목의 유치함에 진저리가 났고, 아마도 연출가나 배우의 이름이겠거니 하고 (유명 연출가나 배우의 이름을 부제목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만약 후안 벨몬테가 누구인지 인지하고 있었더라면 연극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마도 유명한 사람일 후안 벨몬테를 한국 관객이 알리 만무하기에, 나는 공연 앞쪽에 간단하게 후안 벨몬테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을 삽입하거나 간단한 안내자료를 나누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안 벨몬테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로 그는 1910년에 투우사가 되었다. 그는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뛰고 점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신의 장애에 적합한 새로운 투우 스타일로 최고의 투우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수많은 부상과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대필)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에게 '황소 살해자'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말년에 그는 폐암에 걸렸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안헬리카는 후안 벨몬테와 자기 자신의 삶을 투우라는 이미지 속에 중첩시킨다. 동물 보호에 대한 요구, 잔인성과 야만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갈수록 투우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지만, 투우 애호가들은 아마도 이렇게 항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옳음이, 정의가, 법이, 꽉 맞는 옷처럼 사람의 숨통을 조르고 있는 오늘날 모험은, 열정은, 성스러움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투우가 옳지 않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초에 삶과 죽음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는 게 옳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게 옳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살아있기에 죽는 것이고 죽어야 하기에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살기 위해 죽고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일치를 투우가 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삶과 죽음의 대결이면서 또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투우는 신성한 것이 아닌가? 투우를 국가에서 추방하고, 삶에서 죽음을 추방하고, 죽음에서 삶을 추방하면서 결국 우리의 영혼도 추방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연극은 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길고 불쾌한 소음으로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결코 유쾌한 연극이 아님을 사전에 공지한다. 그리고 곧이어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안헬리카가 무대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 자신의 무릎과 손등에 자해를 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연출한다. (연출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자해가 이루어진다.) 그 장면은 나를 역겹게 했는데 피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피를 너무 적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고작 대단치 않은 그 정도 피를 보여주려고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자해를 한 것인가? 거기다가 미리 소독약까지 꼼꼼하게 바르고서?
안헬리카, 위생학과 신성함은 어울리지 않아요.
소독약은 세균뿐만 아니라 신성함도 씻어내죠. 신성함도 일종의 감염이거든요.
후안 벨몬테가 투우장에 나서면서 옆구리에 소독약을 챙겨들고 나가던가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주여, 소독약부터 발라주소서 하던가요.
그랬다면 그들은 부활하지 못했을 거예요.
무대 위에서 자해를 하기로 했으면 손가락이라도 하나 잘랐어야지. 농담이 아니다. 그럼 손가락 발가락을 합쳐서 스무 번은 공연할 수 있었을 테고, 그것은 정말 멋진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고작 소독약을 듬뿍 바른 상처에서 흐르는 피 몇 방울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안일하고 나약한 것이다. 자신은 타협하지 않는 척하면서 사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타협하고 있는 그 엘리트적 가증과 비겁함에 나는 비위가 상했다. 차라리 가짜 피를 무대 위에 듬뿍 뿌리는 것이 더 솔직하고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에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것이 그저 데이트 용이나 자기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한 관람용 공연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자신의 몸과 피의 자서전이라는 것, 이 무대 위에 있는 것은 배우가 아니라 인간 안헬리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무대는 공연장이 아니라 투우장이며 동시에 제단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무대를 전복시키려 한다. 그러나 사실 그 어떤 무대가 그렇지 않을까? 그걸 증명하기 위해 꼭 피를 보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왕 피를 보일 거라면, 다시 말하지만, 손가락이라도 하나 자르는 패기를 보여주던지 말이다. 유구한 시공간을 전복시키기 위해, 인간들 사이로 신을 혹은 신들 사이로 인간을 강림시키기 위해, 고체인 영혼을 액체로 만들기 위해, 단지 피 몇 방울로 싸게 먹힐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니 그건 무리다. 그것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소가 죽든지 용감하고 나약한 인간이 죽든지, 하여간 누군가 가지고 있던 피를 눈앞에서 철철 쏟아야만 겨우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 점을 안헬리카도 인지하고 있었고 이 점을 만회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분명 영리하다. 공연 중에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절단된 장애인이 속옷만 입은 채 무대에 등장하는 데, 그는 이 공연에서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다. 아니, 그는 이 공연의 중심이며 이 공연 자체, 아니 '공연' 그 자체다.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단번에 배우와 실존 인물을 뛰어넘으면서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피 한 방울 없이 말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 공연은, 그리고 끝없이 떠들어대는 안헬리카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안헬리카는 이 공연에서 별 필요가 없다. 그저 팔다리가 절단된 저 사람을 옷을 벗겨 무대 한가운데 새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에게는 대사조차 필요 없다. 우리는 진동하는 그의 침묵을 충분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공연인가?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것이? 그대로 까발리는 것이? 공연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상처와 장애를 노출하고, 무대 위에서 발가벗고, 무대 위에서 성기를 까 뒤집고, 무대 위에서 똥오줌을 싸고, 무대 위에서 생리대를 갈고, 무대 위에서 섹스를 하고, 무대 위에서 낙태를 하고, 무대 위에서 애를 낳고, 무대 위에서 임종을 맞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그것이 공연인가. 그렇다. 물론 그것은 공연이다. 훌륭한 공연이다. 특히 구성원들이 점점 더 건전하고 순해지기를 강요하는 요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지적하는 것은 이 공연의 시도가 지나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상상력을 희생시킨 대가가 진부하고 초라하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연극을 보고 비위가 상한다면,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쉽기 때문이며, 너무 잔인해서가 아니라 너무 안일하기 때문이며, 너무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미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부하고 지루해.
안헬리카, 당신은 너무 진지해요.
그게 나를 질리게 하네요.
이 공연은 상상력과 유머를, 그리고 아마도 재능까지 제거함으로써 실존에 집중하고자 한다. 안헬리카는 자신을, 그러니까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모두 사람들 앞에서 시시콜콜 낱낱이 지루하게 까발림으로써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이 세계를 자극하고 조명하고 인간적 공감대를 실존적으로 형성하려 한다. 그녀가 던지는 텍스트들은 분명 흥미롭다. 지극히 직설적이고 파편적이지만, 그것이 꼭 은유적이거나 구조적일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의 은유적이거나 구조적인 모든 것은 거짓, 비겁함, 영원히 진행되면서 영원히 지연되는 임종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그리고 삶과 죽음 모두를 관통하며 솟구쳐 오르는 피가 사람을, 텍스트를, 영혼을 실시간으로 난도질하고 있으며 그 폭력 속에서 사람이, 텍스트가, 영혼이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어가는,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사랑하는, 또한 죽음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삶을 혐오하는 기형아들이다. 우리는 기형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기형이기에 신성하고 완전하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어쩌면 기형 중에 가장 기형적인 자살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하며 가장 신성한 행위일지 모른다는 아득한 예감을 공격적으로 회피하면서 또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기형이라고? 에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가 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또 저주인가.
안헬리카, 끌어올린 치마 속에 팬티를 입고 있다니요.
당신의 정숙한 수줍음에 정말 실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