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화이트래빗 레드래빗(WHITE RABBIT RED RABBIT)
공연장소 :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공연기간 : 2025년 4월 30일 ~ 2025년 5월 25일
관람시간 : 2025년 5월 11일 오후 2시
하얀 토끼들이 사는 우리 안에 사다리를 놓고 그 위에 당근을 놓으면
토끼들 중 한 마리가 사다리에 올라가 당근을 차지한다.
그럼 그때부터 그 토끼는 빨간 토끼가 된다.
전위적인 공연이다, 실험적인 공연이다, 현장성에 집중하는 즉흥적이고 참여적인 공연이다 하면 우선 의심부터 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정치인들의 그럴듯한 선전 문구나 거창한 공약처럼 프래임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위적이라고 하면서 진부하고, 실험적이라고 하면서 고리타분하고, 현장성이나 관객 참여를 추구한다면서 관객을 소품이나 자동인형 취급하는 작품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남들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기 위해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는 것. 물론 그것 자체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정말이지 꼰대 같은 이 핀잔도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이거나 현장성이라는 광고 문구를 내세우는 작품들은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해체적이기 일쑤다. 일단 기존의 가치를 모두 때려 부수고 나서 그 폐허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보자는 식이다. 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으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다 같이 죽는 수 밖에. 나 역시 이런 방식에 흥미가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작품들에는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어쩌면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부수는 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능을 세상에 대한 분노로 변질 혹은 승화시키는 예술가들과 행동가들만큼 흔한 것도 없으니까.) 관객으로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박탈된 파괴를 한 시간 넘게 꼼짝없이 붙잡혀 앉아 보고 있는 건 고역이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그것은 일상이 아닌가.) 파괴를 위한 파괴, 전위를 위한 전위, 실험을 위한 실험, 참여를 위한 참여는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 만큼이나 사람을 역하게 만든다.
일단 이 작품은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해체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장점이지만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매 회차마다 다른 배우가 처음 접하는 대본에 따라 관객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공연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극 형식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이 역시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해체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그렇다고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이거나, 현장성에 집중하는 즉흥적이고 참여적인 공연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나오지 않는데, 내게는 이 공연이 진부하고 지루하며 안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독특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개성과 매력이 한참 부족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은 관객의 각자 취향에 따라 평가가 판이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두겠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를 두 가지 정도로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너무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작가와 배우와 관객이 공연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해서 연결되는 것, 공연의 본질이기에 당연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간과되는 그것을 전면에 드러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신선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내용이 너무 없다. 단지 그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최대한 시간을 질질 끄는 느낌이다. 순한 맛과 싱거운 맛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하얀 토끼니, 빨간 토끼니, 독극물이니, 자살이니 등등 자잘하고 톡 쏘는 아이디어를 후추처럼 여기저기 뿌려놓았지만 소금도 설탕도 빠진 공연은 싱겁고 엉성하기 그지없다. 솔직히 얼핏 어린아이를 위한 교육용 프로그램처럼 여겨질 정도였고, 작가가 관객을 바보취급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선한 (의도의) 사람이 글을 쓰고, 선한 (의도의) 사람이 연기를 하고, 선한 (의도의) 관객들이 참여함으로써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공감대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선한 연대의 공연을 꿈꾸는 유치한 인류애로 충만한 작가의 선한 의도는 알겠으나, 말하나 마나 선한 예술이 결코 좋은 예술은 아니다. 작가의 적극적인 공연 개입이라는, 혹은 그런 척하는 연극적 장치가 그나마 나를 진정시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공연 전체를 끌고 가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와 직접적으로, 아마도 인과 관계로 관련이 있을 듯한데) 이 공연이 작가와 배우와 관객의 공감과 연대를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기능적으로는 배우와 관객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더 나아가 아예 전문 배우의 역할 자체를 제거하는데 집중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 자체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설정이다. 문제는 작품의 이러한 의도를 작품 스스로가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이 연극에는 전문 배우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전문 배우는 방해가 될 뿐이다. 이 작품은 전문 배우의 연기력과 잠재력, 가능성에는 단 1도 관심이 없는데, 이 공연이 요구하는 건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그저 배우, 배우라는 역할, 배우라는 무대 위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전문 배우 없이 관객들끼리 공연을 만들어가는 설정이었다면 훨씬 본래 작품의 취지에도 맞고 의미와 재미도 다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미리 이 점을 공지함으로써 나 같은 관객은 이 작품을 거를 수 있도록 해줘야겠지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배우가 없는 텅 빈 무대 위로 관객들 중 누군가가 뛰어올라가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그는 '관객'이 아닌 '배우'가 된다) 대본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하얀 토끼와 빨간 토끼 이야기가 강력한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공연 전체의 완성도 역시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 배우들, 혹은 전문 배우들은 (이 공연에서) 하얀 토끼인 적이 없으며, 애초에 빨간 토끼로써 외부로부터 캐스팅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본질과 전혀 맞지가 않는다. 이 자기모순이, 자신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한 무관심이, (작가와 배우와 관객의) 지극히 보수적인 자기애가 결국 공연을 진부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말았다.
어쨌거나 무대 위로 올라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관객들이 마치 늘 무대 위에 올라가고 싶었다는 듯이, 자신을 불러 주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기는 처음부터 관객이 아니라 배우라는 듯이 기쁘게 무대 위로 올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 나는 놀랐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처음부터 관객석에 앉아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떻게 매번 공연 때마다 무대 위로 뛰어오르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당근을 차지하는 토끼가 빨간 토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근을 차지하지 못한 토끼가 하얀 토끼가 되는 것일까? 모든 하얀 토끼는 밤마다 빨간색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다. 나는 그저 관객이 되고 싶어서, 무명의 관객, 수많은 토끼들 속의 토끼, 어둠 속의 하얀 시선이 되고 싶어서 공연장을 찾는 것이다. 빨간 토끼가 내 대신 십자가라는 사다리 위로 올라가 가시 면류관이라는 당근을 차지하게끔 부추기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이 연극이 나를 공연 참여자로 지목했다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티켓 환불과 교통비, 거기에 내 시간 낭비에 대한 위자료까지 청구했을 것이다. 어, 혹시 그럼 나는 그 순간 빨간 토끼가 되어 다른 하얀 토끼들로부터 미움을 받게되었을까? 무대를 거부하는 것 역시 무대 위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은 행동인 걸까? 결국 모든 하얀 토끼는 빨간 토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