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킬링시저
공연장소 :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
공연기간 : 2025년 5월 10일 ~ 2025년 7월 20일
관람시간 : 2025년 5월 17일 오후 3시
개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희곡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의 희곡은 '햄릿' '오셀로' 멕베스' '리처드 3세'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언제나 중타 이상은 치기 마련이지만 '줄리어스 시저'는 좀 더 평이한 느낌이다. 그래서 '킬링시저'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안내 문구를 읽던 중 '줄리어스 시저의 완벽한 재해석'이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재해석'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도 유혹적인 데다가 특히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재해석하기에 좋은 재료다. 일단 '셰익스피어'라는 유명 브랜드가 마음껏 재해석할 수 있는 안전한 토대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희곡이 쉴 새 없이, 빈틈없이, 남김없이 떠들어대는 것 같아도 행간은 완전히 무방비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나는 셰익스피어도 아니고, 줄리어스 시저도 아니고, 오직 '재해석'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끌려 이 공연을 보러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공연 중간에 뛰쳐나오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3류 패션 잡지는 촌스러워서 3류가 아니다. 세련된 사진들로 지면 전체를 채우고, 보기 좋고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지만 내용은 마치 뜬금없는 가전제품 사용 설명서를 서술체로 베껴낸 처럼 아무런 정보도, 의미도, 가치도 없기 때문에 3류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탁기를 주문했더니 세탁기 사용 설명서만 도착한 격인데, 소비자는 자신이 세탁기를 주문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사용 설명서만 열심히 읽고 있는 격이다. 쓰는 사람도 누군가 이것을 정말 읽을 거라는 기대가 없고, 읽는 사람도 거기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 무관심과 무신경의 합의 속에서 그저 지면을 채워야 하기에 기계적으로 쓰고 글을 읽을 줄 알기에 기계적으로 읽는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며, 거의 언어도 아니다.
이 연극의 시작은 괜찮았다. 무대 디자인도 집중력이 있었고 비장한 율동과 노래로 공연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순간만큼은 나도 기대감이 컸다. 그것이 이 연극의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참담하게 실망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 작품은 도대체 중구난방 잘 비비지도 않은 잡탕밥이다. 햄릿, 멕베스, 오델로 등을 뒤섞어 놓으면서 햄릿의 고뇌와, 멕베스의 야욕과, 오델로의 회환과, 이야고의 근원 없는 근원의 사악함은 깨끗하게 생략해 버렸다. 셰익스피어 명작을 어린아이들의 우화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해석'이 안되면 그냥 생략해 버리는 게 '재해석'인가. '해석'보다 쉬웠어요가 '재해석'인가. '해석'으로 욕을 먹으면 '재해석'으로 우기고 '재해석'으로 욕을 먹으면 '해석'으로 우길 심산인가.
로마 최초의 황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공화정의 개혁가이면서 동시에 공화정의 적이었으며, 결국 가장 가까운 측근들에게 암살당하고 만 비운의 줄리어스 시저 이야기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더라도 이미 스스로 높은 밀도와 열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밀도와 열기 속에서 줄리어스 시저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학적으로, 심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언제나 새롭고 생생하게 격동한다. 그들 중 누가 주인공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분명 '이 살인이 연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아득할 정도로 오래 공연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킬링시저'의 인물들은 육체도 없고, 영혼도 없고, 심지어 인격도 없다. 그들은 유령조차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인위적이고 이론적이며 가식적인 설정'일뿐이다. 사람이 글을 쓰고, 사람이 연기하고, 사람이 연출하는데, 이토록 비인간적이기도 쉬운 일이 아닐 듯하다. 이 연극은 '위대함'에 대해서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다. 줄리어스 시저 이야기의 인물들이 강렬하고 매력적인 것은, 그리고 그들이 영웅인 것은, 그들이 고결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들이 비천하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비겁한 구질구질함 속에서 고결한 정신과 용기가 솟구쳐 오르고, 그 고결한 정신과 용기가 다시 나약하고 비겁한 구질구질함 속으로 침몰하고야 마는 거센 폭풍우 자체야 말로 바로 진정한 위대함이다. 그런데 '킬링시저'에는 폭풍우가 없다. 폭풍우는 고사하고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건조하고 냉담하다. 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뛰어다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했던 말을 하고 하고 하고 (도대체 별 내용도 없는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는 건지) 또 하지만 미세한 바람 한 점 불게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서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신이 되고자 하는 남자들, 자신들이 신이라고 착각하는 남자들의 허영과, 위선과, 망상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당겨서 인간적인 삶으로, 구질구질한 일상과 소박한 소망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말이다. 어머니들, 부인들, 딸들은 그저 징징거리며 이야기를 감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태어나고 먹고 싸고 죽는 육체를 부둥켜 안고 쥐어짜기 위해, 인간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고백하기 위해, 영혼 없는 언어에서 남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킬링시저'는 그런 원작의 여자들 마저 고결한 이상의 얼룩이라는 듯이, 그저 역사의 본질과 상관없는 곁가지라는 듯이, 이야기의 잡다한 소음이라는 듯이 완벽하게 세척해 버리고 말았다. 별 역할도 없어 보이는 그녀들이야말로 고결한 이상만큼이나, 역사의 본질만큼이나, 웅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대안도 없이 말이다. 이 연극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사용 설명서가 세탁기 용인지 텔레비젼 용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가끔 사진 찍기용 연극인가 싶은 연극들이 있다. 아마도 그런 연극 제작자들은 '이미지'라는 의미를 완전히 협소하게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혹은 자신들의 무능력과 무재능과 무신경함을 그렇게 감추려고 하는 비겁함인지도 모른다. 간곡히 말하건대 재능도 대안도 상상력도 없다면 제발 '재해석' 하지 마라. 그냥 원작을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설계도를 받은 기술공처럼 곧이곧대로 충실하게 만들어라. 촌스럽고 고리타분하고 재능이 없다고 욕을 먹더라도 그냥 그렇게 해라. '재해석'은 원작에 대한 자격지심과 이해력의 무능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