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헤다 가블러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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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 헤다 가블러

공연장소 :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공연기간 : 2025년 6월 7일 ~ 2025년 6월 8일

관람시간 : 2025년 6월 8일 오후 3시




문제적 인간 남자가 '햄릿'이라면 문제적 인간 여자는 '헤다 가블러'라고 한다. 희곡을 읽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헤다 가블러' 연극을 봤다. 그리고 문제적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그리고 햄릿과의 연관 관계가 참으로 적절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헤다 가블러'는 남자 햄릿의 여자 버전은 아니다. 그 둘은 확고한 공통점만큼이나 극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새파란 청년이거나, 근친상간이나 왕위 다툼 등과 같은 비극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햄릿보다 오히려 헤다 가블러를 우리 자신의 초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햄릿'과 '헤다 가블러' 작품 모두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로 그 이름이 작품의 중심이면서 또한 전체이며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그 이름 이상이 없으며 그 이름 이하가 없다. 마치 우리 자신처럼 말이다. 과연 '문제적' 인간이란 무슨 뜻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말에서 '문제'란 '질문'과 '귀찮은 일이나 말썽'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적' 인간이란 말에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유효하다. '햄릿'과 '헤다 가블러', (여기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도 좋다) 이것은 질문이면서 동시에 말썽이다.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라는 존재를 선택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종을, 성별을 (뭐, 원하다면 젠더를), 우리의 외모를, 우리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심지어 태어나기를 허락한 적도 없다. 'To be or not to be'는 사실 태어나기 전에 했어야 하는 고민이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본질을 통해 실존하고 있으며, 선택의 여지없이, 어쩔 수 없이, 당연히,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햄릿'이고 '헤다 가블러'이고 '당신의 이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삶을 그럭저럭 잘 영위해 나간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그런가?

'햄릿'과 '헤다 가블러'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제적 인간이다. 질문하는 자는 귀찮은 말썽을 일으키는 자이며 귀찮은 말썽을 일으키는 자는 질문하는 자이다. 질문하지 마라. 그럼 말썽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썽을 일으키지 마라. 그럼 질문이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적인 연상작용으로 인해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문제적 인간'의 질문이나 말썽은 결코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햄릿보다는 헤다 가블러가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 그들은 답을 찾는 것도, 답을 찾지 못해 죽는 것도 아니다. 문제적 인간이 질문을 하고 말썽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굳이 비유하자면 문제가 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문제를 추구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폭로의 과정에서 '햄릿'과 '헤다 가블러'의 차이가 확연해진다. 햄릿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문제적 인간'에 더 충실한 쪽은 '헤다 가블러'다. 사실 햄릿의 유명세는 오히려 충분히 '문제적'이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햄릿, 유치한 애송이, '햄릿'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었다면 결코 문제적 인간이 되지 않았을 겁쟁이는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햄릿'이라는 그의 이름은 이미 처음부터 왕국과 근친상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햄릿은 햄릿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려 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뭐, 좀 찝찝하긴 해도, 딱히 크게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다. 그냥 오필리어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왕위를 물려받고, 훌륭한 왕이 되는 햄릿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는 어떤 문제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이게 뭐가 잘못인가? 우리는 모두 마땅히 그리 해야 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그를 깨우기 위해, 혹은 그런 그를 망치기 위해,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유령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이름 역시 '햄릿'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직설적이다.) '햄릿'이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이 유령은 햄릿에게 '햄릿'이 되라고 강요하기 위해 그에게 강림한다. 복수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햄릿은 계속 그를 악마라고 의심하는 데 그것은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보건대 그것이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을 일을 대체 몇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인가. 심지어 햄릿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햄릿'이라는 유령은 햄릿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존재하며, 자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햄릿'이라는 이름의 이 순진한 애송이를 희생시키는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만약 이 애송이가 더 순진했다면, 혹은 더 교활했다면 그 이름은 위대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온전히 '햄릿'이 되기에는 너무나 '문제적 인간'이었다.

'문제적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삶이 역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인간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대 위의 연기자가 돌연 자신은 그 인물이 아닌 배우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명함이나 깨달음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야유를 받을 것이다. 유치함, 어리석음, 미숙함이라는 죄명으로 말이다. 그는 연극을 망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는 '햄릿'의 대사를 말해야 한다. 그는 클로디어스, 폴로니우스, 레어티즈를 죽여야 하고 자신도 칼에 맞아 죽어야 한다. 그래야 이 연극이 완성될 것이다. 그래야 막이 내리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갈 것이 아닌가.

앞에서 유령이 요구한 복수가 그럴듯한 핑계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핑계다. 햄릿을 '햄릿'으로 만드는 것은 복수를 추동하는 분노다. 그것은 자꾸만 자신의 이름에서 미끄러져 나가려고 하는 햄릿을 '햄릿'이라는 이름에 붙여 넣는 접착제다. 이름과 실존적 인물을 결합하는 연금술의 수은이다. 악마의 계책이다. 분노가 그를 살게 하는, 정확히 말하면 '햄릿'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정작 '햄릿'이라는 이름은 분노하지 않는데도 햄릿은 그것이 자신의 분노라고 착각한다. 분노로 끓어오른 영혼은 햄릿에서 '햄릿'으로, 다시 '햄릿'에서 햄릿으로 넘쳐흐르며 뒤섞인다. 그리하여 그는 휘청거리면서도 결국 '햄릿'을 완성하기 위해 나아간다. 성공적으로 '햄릿'으로 살지는 못했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햄릿'으로 죽는다. 이렇게 위대한 이름이 완성되는 이야기를, 위대한 운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비극'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헤다 가블러'는 비극이 아니다. '헤다 가블러'라는 이름은 '햄릿'처럼 위대하지 않다. 그 이름은 한 왕국의 왕세자도 아니고, 근친상간이나 살인과 연관되어 있지도 않다. 완수해야 할 복수도 떨치고 일어날 만한 분노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헤다 가블러를 찾아오는 '헤다 가블러'라는 유령도 없다. 악마조차 이 평범한 이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사소하고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문제적 인간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햄릿은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사느냐 죽느냐는 그저 우유부단하고 철없는 넋두리일 뿐 그는 전혀 자살할 생각이 없다. 자살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공사가 바쁘고 해내야만 하는 위대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역사, 정치, 뭐 그런 남자들의 일들. 그러나 헤다 가블러는 그런 일들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여기에 그녀가 여자라는 건 결정적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결혼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이 바로 여자들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역사니까. 그 누구도 여자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햄릿'이라는 이름은 여자에게는 결코 상속되지 않는다. '햄릿'의 유령은 결코 딸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헤다 가블러'는 결혼하는 순간 '헤다 테스만'이 되지 않는가. 여자들은 결혼과 함께 손상되고 변형되는 자신의 이름 속에서 이미 '문제적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현실을 노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간의 대표를 세워야 한다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적당할 것이다.

비극도, 분노도, 사명도 없는 헤다 가블러는 지루하고 또 지루하기만 하다. 어쨌든 살아있는 한 무언가는 해야 하기에 결혼도 하고, 수다도 떨고, 집안도 꾸미고, 몸치장도 해보지만 지루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저리도 열심히 살아가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별 볼 일도 없는 시시한 이름들을 가지고서 교수가 되어 보겠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피겠다, 대단한 책을 써보겠다,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겠다, 욕망을 충족시키겠다 하며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 어찌 된 영문일까? 어떻게 저들은 저리도 자신의 이름에 온전히 몰입하며, 온전히 만족하고, 또 온전히 괴로워하는가? 대체 왜 그들은 자살하지 않는가. 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가. 우리는 '햄릿'이 아닌데. 아니, 햄릿마저도 차라리 그냥 자살해 버렸다면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회한은 이름에서 오는 것이니까. 그래서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은 수치심에 쫓겨 허둥지둥 또 다른 배역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놀랍게도) 이 연극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실은 무대도 관객도 없다. 배우들만이 득실거린다. 그런데도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유령이, 악마가, 이름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헤다 가블러가 그토록 스캔들을 꺼려했던 이유일 것이다. 스캔들은 이름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다. 햄릿을 '햄릿'으로, 헤다 가블러를 '헤다 가블러'로 만든다. 일단 스캔들에 휘말리면 감정이 끓어오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커튼이 올라가고, 조명이 밝혀지고, 연극이 시작된다. 그럼 우리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 내야만 한다. 일단 연극이 시작되면 연극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그 어떤 배우가 연극 도중에 조명을 꺼버릴 수 있을까? 그 어떤 배우가 연극 도중에 무대를 떠날 수 있을까? 그 어떤 배우가 연극 도중에 자신의 진짜 이름을 고백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용기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는 것인가. 이미 그 사람은 이름이 없는데.

그것이 헤다 가블러가 한 짓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헤다 가블러'는 문제적 인간이 아니다. '문제적 인간'은 절대로 연극을 끝내지 못한다. 연극을 끝내지 못하기에 '문제적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이유 없이 태어난 것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았던 것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죽는다. 그냥 구질구질해서 죽는다. 미련 없이 죽는다. 문득 생각난 김에 죽는다. 마치 한 번도 '헤다 가블러'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이번 연극에 대해 짧게 평을 해보자면, 개인적으로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우선 헤다 가블러를 포함해서 인물들을 다소 작위적이고 희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들이 어딘지 붕 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렇게 한 이유는 알 것도 같다. 그러지 않았다면 무지하게 지루한 연극이 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을 감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할과 이름의 무가치함을 들어내기 위해 굳이 인물들을 희극적으로 그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 무가치함이 더 돋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에 헤다 가블러가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홀로 총을 들고 춤을 추듯 화려한 동작을 취하는 데, 그것은 '헤다 가블러'에 대한 심각한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헤다 가블러의 자살은 어떤 미학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연극적인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극적'인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저 손을 흔들어 파리를 쫓듯 툭 하니 죽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다른 인물들이 자신들의 일에 각자 몰두하고 있는 분주한 일상의 와중에 암시도, 맥락도, 준비도, 극적인 장치나 행위도 없이 시시하게 덜컥 자살해 버렸다면 훨씬 '헤다 가블러'의 의도에 맞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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