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디 이펙트
공연장소 : NOL 서경스퀘어 스콘 2관
공연기간 : 2025년 6월 10일 ~ 2025년 8월 31일
관람시간 : 2025년 6월 22일 오후 2시
이런 종류의 연극은 감상을 밝히기가 조금 난해하다. 연극이 어렵다거나, 애매하다거나,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관객들과 의견이 다르리라는 강력한 예감 때문이다. 확신하건대 대부분의 관객들의 감상평은 긍정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내 의견은 부정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견이 다른 건, 내가 부정적으로 본 부분을 그들이 못 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바로 그 점이 나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편리한 방어막을 쳐두려 한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라고.
일단 호불호를 떠나서 전체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은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무대 다자인에도 공을 들였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열정적이었고, 연출에도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이 연극의 전체적인 주제를 한마디로 짚어보면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 이 두 개념의 대결.
육체와 영혼의 주도권 경쟁은 다소 식상하긴 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에는 영혼이 육체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그리고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의 썩어가는 시체로부터 불멸의 영혼을 보존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존재를 구원해야 했으니까. 우리가 지금 당장 살아갈 수 있는 건 사실상 우리의 영혼이 완전하며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조차 실은 그것을 믿고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살아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고로 이원론이란 사실상 영혼절대설 또는 영혼불멸설이며, 인간성과 자아의 기원이다. 이 열망과 확신이 너무 커서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숭상하다 못해 육체를 극도로 천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들은 -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영혼은 -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고문하고 학대함으로써 영혼이 육체의 지배자임을, 의지가 자연의 지배자임을, 선이 악의 지배자임을 입증하려 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전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영혼이 자아 과잉에 빠져 끊임없이 조잘대는 동안,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을 치장하고 온갖 더러운 말과 행위로 육체를 모욕하고 학대하는 동안, 육체는 그것을 묵묵히 견디어왔다. 우리는 그 침묵이 육체에게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육체에게는 지능도, 언어도, 감성도, 윤리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라고, 육체는 그저 편리한 도구, 임시 거주처, 통제해야 하는 백치 노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는 새로운 사실에, 거의 음모에 가까운 반전에 경악하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는, 지능도, 언어도, 감성도, 윤리도, 의지도 없는, 그저 편리한 도구, 임시 거주처, 통제해야 하는 백치 노예는 실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육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육체가 원하는 대로 느끼고 있는 거라나. 영혼이란 원인이나 본질이 아니라 결과이거나 과정이며, 그저 뇌의 기능이나 작용의 명칭, 더 나쁘게는 그저 부산물이거나 심지어 부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혼은 한 번도 육체의 주인인 적이 없기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혼이란 존재한 적조차 없기에 이원론은 무색해진다. 이제 모든 것이 전도되었다. 아니, 전도조차 무산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라는 주어 자체가 부정됨으로써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 연극은 이러한 고뇌의 극점으로 '사랑'과 '절망'을 제시한다. 감성적인 측면에서 '사랑'과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인간적이며 실존적인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그저 신경전달 물질과 호르몬 조합의 결과인 뿐인 걸까? 우울이 약을 먹고 호전된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랑하고 왜 절망해야 하지? 왜 하루하루 사랑하고 절망하며 살아가야 하지? 이러한 질문들이 의학 약물 실험을 배경으로 한 네 사람의 관계 속에서 펼쳐진다. 이것은 자신의 자아를, 의지를, 인간성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우화이다. 이제 자아와 의지와 인간성은 인간의 선천적이고 필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인간이 그냥 인간으로 사는 게 이렇게나 힘들어서야.
이것은 일면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분명 더 흥미롭게 풀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감정의 과잉이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연극에는 두 커플이 나오는 데, 사랑을 담당하고 있는 커플과 우울을 담당하고 있는 커플이다. 끊임없이 감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본질적으로 서정적이기 때문에, 최소한 이 두 커플 중 한 커플은 좀 차분하고 진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두 커플 모두 울고, 소리 지르고, 몸부림을 치니 신경이 약한 나로서는 그들에게 공감하기도 전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마치 그들은 인간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 이상이라고 - 왜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어쨌건 무조건 그렇다고 - 이미 결론을 내리고서 그 복음을 내게 전도하기 위해 울며불며 매달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연극에 질문이란 없었던 셈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소리치고 있지 않느냐, 내가 이렇게까지 울고 있지 않느냐, 내가 이렇게까지 몸부림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의심하는가. 나를 의심하고, 너를 의심하고, 사랑을 의심하고, 절망을 의심하고, 인간의 영혼을 의심하는가. 마치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회초리로 내리치며 기도하는 수도자처럼 선하고, 고귀하고, 단순하고, 안일하고, 순진하게.
나는 행복하고 싶은데 왜 내 뇌는 날 행복하게 하지 않을까. 나는 울고 싶지 않은데 왜 내 뇌는 내 눈물을 멈춰주지 않을까. 이것이 뇌신경학이 만들어낸 새로운 질문이라고? 아니, 이번에는 핑계가 '뇌'일뿐, 이것은 오래된 질문이다.
나는 여기서 조심스럽지만 연기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이려고 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훌륭했다. 무대 위에서 그처럼 몰입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용 연기였다. 영상 속의 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한 주체인 인물에게 완전히 몰입해 있는 배우의 연기.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공연에서만큼은 무대 위의 연극용 연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완전한 세계를 가정한다 해도 숨길 수 없는 작위적인 공간에서 작위적인 인물들의 작위적인 연기 말이다. 무엇보다 바로 코 앞에서 관객들이 뻔히 그들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무대 위의 연극배우들은 배우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 역시 관객이 된다. 그들에게는 연기하는 자신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있다. 그들은 당장 지금 이곳의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 극 중 인물, 관객, 혹은 그 이상으로 끊임없이 분열되며 동시에 그것을 끊임없이 끌어모으고 통합하느라 (그리고 끊임없이 통합에 실패하느라) 일면 냉정해진다. 그러한 분열이 없다면, 그러한 냉정함이 없다면, 그러한 어색함이 없다면, 그들은 뻔한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배우들은 너무나 연기를 잘했다. 마치 관객 앞이 아닌 카메라 앞인 것처럼. 나는 그것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