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아마데우스
공연장소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공연기간 : 2025년 9월 16일 ~ 2025년 11월 23일
관람시간 : 2025년 9월 21일 오후 3시
나는 연극 관렴평을 다소 독하게 하는 편이다. 수사적으로 일부러 그렇게 하는 면도 있지만, 내가 그 연극 한 편을 보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따져보면 실제로도 열이 받아 참을 수가 없다. 좋은 연극은 희귀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려고 연극을 보러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심약한 내게는 수준 미달의 연극이 주는 타격이 만만치 않다. 착하게 살자,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봐도 결국 독설이 쏟아져 나오고 마는 것이다. 어쨌거나 좋은 연극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이 모든 울화를 견뎌야 한다. 기약도 없이.
보고 싶은 연극이 없어서 2달 동안 연극 관람을 하지 못했다. 보통 휴가철과 크리스마스-새해 기간은 연극의 비수기다. 움직이기 쉽지 않은 철이니 일면 다행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와 더위에 시달리며 칩거하는 2달 동안 내 독기도 상당히 빠졌다. 나는 다소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오랜만에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피둥피둥 노는 동안 비와 더위에 시달리면서 연극을 준비했을 연극인들을 응원해주고도 싶었다. 더구나 이 연극은 '아마데우스'였다. 이걸 어떻게 망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연극을 보는 동안 나는 내 독기가 다시 생생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족히 6개월은 쓰고도 너끈히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그래, 기억났다. 내가 연극을 보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건 연극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증오 때문이지.
이 연극은 피터 셰퍼의 훌륭한 희곡인 '아마데우스'와,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칭송되는 영화 '아마데우스'를 뒤섞어서 난잡한 신파극을 만드는 기괴한 재주를 지녔다. 이 훌륭한 두 '아마데우스' 중에 단 하나만 제대로 파고들었어도 괜찮은 연극 한 편은 너끈히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지루하고 산만한 연극을 제작한 것은 이 두 '아마데우스'보다 자신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믿는 교만 때문인가, 아니면 이 두 '아마데우스'를 이해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대중에 대한 아부 때문인가. 황금으로 만든 작품이 고철 값으로 떨어지는 예술이라는 연금술.
일단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뭐니뭐니 해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어설프게 영화 '아마데우스'의 주인공을 흉내 내고 있는 '모차르트'다. 대놓고 캐릭터를 베껴왔으면서도 또 뭔가 한 발 뒤로 빼는 느낌이라 그냥 이도 저도 아니다. 그건 배우의 역량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요 원인은 연극 자체가 모차르트에게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의 무게 중심이 살리에르에게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데, 단순히 분량이나 대사 문제가 아니라 연극이 모차르트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실상 거의 포기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빛이 미약하니 그림자도 - 아무리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도 - 함게 미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살리에르도 연극 전체를 이끌어나갈 힘과 동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혹시 살리에르를 빛으로 모차르트를 그림자로 만들려고 한 걸까? 의도이건 아니건 그런 느낌을 풍기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 연극은 그림자 없는 유령을, 도대체 왜 고통받는지, 왜 분노하는지, 왜 절망하고 죄의식에 시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이 멋진 패션모델처럼 허공에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 유령 하나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이 연극은 모든 것이 다 경솔하고 어설프기만 하다. 바람잡이들은 별 의미를 던져주지 못하면서 접시 깨지듯이 시끄럽기만 한 장식품들처럼 무대를 채운다. 콘스탄체 역시 불필요하게 분량만 차지하는 불필요한 인물이며, 콘스탄체와 살리에르의 갈등은 무의미하다 못해 지저분할 정도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오페라 가수의 노래도 연극을 고양시키기보다는 대충 끼워놓은 듯한 인상을 주며, 왕을 비롯한 대신들은 생명력이나 개성이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본질보다 사족에 파묻힌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리에르의 원맨쇼에 기대고 있는데, 연극 전체에 진지함도 섬세함도 몰입감도 없으니 계속해서 이어지는 살리에르의 독백은 얄팍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다. 자, 내가 또 빼먹은 게 있나?
신-천재-범인의 삼각 구도는 사실 그 자체로 고루하다. 그것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시대에도 이미 그러했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죽은 신을 기리는 제사다. 무신론자인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만든 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신을 추억하기 위함이고, 유신론자인 살리에르는 신화를 쫓아 신의 무덤을 파헤치기 위해 헤매는 도굴꾼이다. 이것은 결코 신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며 신은 사실상 이 이야기 속에서 완벽하게 부재한다. 이것은 신의 부재로 공석이 된 주도권을 두고 싸우는 예술가와 관객들, 생산자와 소비자들, 천재와 범인들의 대결이다. 누가 이겼는가? 결국 마지막에 살리에르만이 살아있었음을 기억하자. 신이 죽고, 천재가 죽고, 초라하고 늙고 비참하지만 자살하지도 못한 채 끈질기게 살아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살리에르다. 그리고 살리에르가 우리에게, 대중에게, 미래 세대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집단성 그 자체이다. 평범하고 아무 재능이 없으면서도 이제 면죄부까지 움켜쥔 절대적 대중. 민주적 자본주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시대에 우리는 결국 살리에르가 이겼음을, 살리에르는 결국 우리가 이겼음을 안다. 우리는 매일 천재를 죽이고, 예술을 죽이고, 가치를 죽이면서 매번 용서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