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영화는요?
이 이야기는 팩션입니다.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한국식 영어 단어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실화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픽션을 섞어 재창조하거나 더 나아가 가상의 사건·인물을 덧붙이는 행위 또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의미합니다. 소개팅 당사자는 여러 사람이 모인 인격들로, 허구의 인물임을 알려드립니다.
'서울역에서 토요일에 만나기로 해놨다. 나가봐라'
'왜 싫다고 하는데 맘대로 약속을 잡고 그래.'
'딱 한번만 나가. 다음에는 이런거 안할게'
뚝
아빠가 선자리를 어디서 가져왔다.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한 번만 나가보란다. 사람이 너무 아깝다나.
지방에 건물이 몇 개나 있는 분의 아들이고 미국으로 유학도 다녀왔단다. 3대가 아니라 5대가 부자하다 망할 만큼이라고 꼭 나가란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자식이 무조건 행복하게 살거라고 믿는 K-아빠의 전형이다.
'외국에서 유학했으면 엄청 영어 잘하겠다. 너한테 막 미국 가봤냐고 묻고 무시하고 그러면 어떡해'
'그러게 난 하와유 아임파인땡큐밖에 못하는데.'
'너 억양 완전 경상도영어다. 하\와/유\가 뭐니 ㅋㅋ'
'난 그렇게 배웠는데잉 영어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신거거든. 우리 선생님을 모욕하지 마라'
친구와 전화를 하며 갑자기 잡힌 선자리에 대한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다음날 서울역에서 그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오시는데 많이 힘드셨죠. 기차까지 타고 선자리를 오시다니.'
'아 네. 얼마 안걸렸어요.'
말 수가 적은사람이었다. 어메리카에서 왔으면 좀 더 제스쳐도 크고 말도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편견이었다.
'일 끝나면 뭐하세요?'
'집에서 쉬어요'
음. 나도 집에서 쉬기는 하지만 이럴 땐 집에서 책을 봐요, 운동을 해요 등의 대답이 나와야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데 대화가 끊겨버렸다. 어색한 공기를 못참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그럼 음악 좋아하세요? 자주 듣는 장르가 있으신가요?'
'잘 안듣습니다'
오, 정보 입수. 음악을 잘 안듣는 사람이다.
악. 이런 정보를 얻어봤자 대화를 더 해나갈 순 없다. 이 사람과 잘해보고 말고를 떠나서 밥을 먹는 이 시간만큼은 잘 끝내고 싶다. 체하지 않고 먹고 싶다.
이것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치트키를 쓰자. 머리 속에 '소개팅 토크박스'를 굴려본다.
자 주사위는 여섯 면 이니까, 신에게는 이제 다섯 개의 소재가 남았습니다.
음악 하나는 금방 썼고, 남은건 취미생활, 영화취향, 여행경험, 일에 대한 만족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취미 생활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즐거운 시간들을 자꾸 묻게 만들어 스스로에 도취되어 이야기하게 만들 수 있다.
영화 취향은 10개 말하다 보면 한 개 정도는 아는게 나와서 줄거리나 배우 등의 얘기로 10분은 수다가 가능하다.
여행 경험은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소재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의 서사가 쭉쭉 나오고 행복했던 기억을 출력해내어 소개팅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일에 대한 만족도는 하는 일의 종류, 일의 숙련도, 상사나 부하 직원에 대한 험담 등 무궁한 대화거리가 나올 수 있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가 나오더라도 맞장구를 치면 된다. 난 뭐든지 잘 먹어서 뭘 얘기하든 다 맛있다고 할 수 있다. 두부만 빼고.
어쨌든 두 번째 주사위를 굴려본다.
'영화는 좋아하시나요?'
'아 네 가끔 봐요.'
'요즘 본거 있으세요?'
'기억이 잘 안나네요'
실패
이 분은 그냥 말을 하기 싫은 것 같았다. 얘기하면서 눈도 잘 안마주친다. 그 나라에서 눈 안마주치면 사람들이 뭐라 했을텐데. 음식을 먹기는 하는데 깨작깨작 먹는다.
혹시 미국에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가족들이 반대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설득하고 있는 중인걸까?
가족들이 한국에서 여자 한명만 만나보라고 해서 나온게 지금 이 서울역에서의 숨막히는 선자리인가.
대답을 잘 하지 않는건 그녀와의 의리를 위해서인걸까.
밥을 휘적휘적 저으며 오만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돌아가는 기차는 몇시인가요?'
'앞으로 네 시간 뒤요'
안돼. 네 시간이나 이 사람을 책임져야 하다니. 어서 돌려보내야겠다.
'아 지금 밥 거의 다먹었는데 시간 당기는건 어떠세요? 지금 어플 열면 직전표는 자리가 좀 많이 날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버스정류장 가까워요. 먼저 가세요'
'아닙니다. 예의가 아니죠'
예의라. 이 자리에 탐탁치 않게 나왔기에 그런 미안함에 예의를 차리려고 한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버스정류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조심히 가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왜 이런 마지막 인사를. 역시 내 예상이 맞았던 건가.
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보니 그 분의 문자가 와 있다.
'저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인씨 저 같은 사람이 나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
'저' '같은' 사람이 나와서.
대화를 안한게 아니라 못.했.던. 거였다.
그 자리에서의 대화를 복기해 보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야기를 해도 이상하게 말 끝이 흐려지고, 쳐다보면 자꾸만 고개를 숙였었다.
이 분은 자신감이 극도로 없는 사람이었던거다. 부족함 없이 자라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 자신을 저렇게 사랑하지 않다니. 어디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걸까.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살기에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을 '저 같은'사람이라고 한 것인가.
부모가 자수성가형 인간이면 자식이 더 주눅들어 산다고 하는데 그런 유형인걸까.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성취를 해 나가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지지 않는걸까. 그럼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건데 이러면 사람 사귀기도 힘들고 일 하는 것도 어려울텐데.
생에 제일 어려운 소개팅, 아니 선을 봤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개도 시원하게 든 적이 없어 얼굴도 취향도 잘 기억이 안나는 그가 언젠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서 '죄송하지 않은' 만남을 하면 좋겠다. 소개팅이든 선이든 뭐 어쨌든.
how are you 하면, Im fine thank you하도록.
이번 소개팅도 fine 하진 않았구나.
아 어렵고 어렵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