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8: 오이토스트와 빨강 국수
"여행은 예상치 못한 것, 방향 감각을 상실한 혼미한 상태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고 관광은 안전하고 통제된 것, 미리 정해진 것이다."
언젠가 인생도 여행과 관광 중 어딘가를 줄타기하며 오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저 글귀가 참 와닿았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은 뇌가 가장 싫어하는 일중 하나라고 들었다. 뇌는 효율성의 끝판왕이라 귀신같이 최적의 패턴을 찾아내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새로움을 두렵게 만든다고. 그래서일까, 대학교 3학년의 끝무렵 악착같이 쪽잠을 자며 멤버십에 들어간 것을 끝으로 나의 인생은 관광버스를 탄 것 같다. 물론 회사는 학교와 달랐지만, 반복되는 안정된 시간과 규칙적인 루틴의 맛을 알아버린 나에게 스스로의 방향 감각을 흔들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시도의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단 꿀을 먹는 꿀벌이어도 배가 부르면 푹 퍼져서 꽃잎에 널브러져 잠이 들고 만다. 아니 어쩌면 정말 이렇게 매일같이 꿀을 찾아 헤매고 단맛을 빨아들이며 아주 정확한 감각으로 벌집을 향해 돌아가는 자신을 한 번쯤 되돌아볼지도 모른다. 방향감각과 기억력이 아주 좋은 꿀벌조차도 가끔씩은 처음 보는 길을 일부러 선택하는 '탐색비행'을 한다고 한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여름은 오겠지만,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25년의 8월, 그 낯선 비행처럼 나도 익숙한 길을 벗어나 초록에 몸을 던져 보았다.
눈 한가득 시야에 초록 물결이 바람을 따라 파도처럼 일렁이던 풍경.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옅은 초록이, 다시 한번 스쳐가면 짙은 초록이, 또다시 물결을 세울 때마다 무수한 초록이 교차했다. 바람이 머물렀다 사라질 때마다 초록은 옅어졌다가 짙어지며 씨실과 날실처럼 직조되듯 물결쳤다.
-충북 제천의 숲
모퉁이를 돌자, 붉은 보초대 한 채와 인적 없는 나무 숲 사이로 정돈된 길 하나가 이어졌다. 그 앞을 가로막은 차단기가 아니었다면, 이 기묘한 풍경은 마치 비밀의 정원에서 매리가 덩굴 사이로 정원 입구의 열쇠구멍을 발견한 그 순간과 같았다. 굽이굽이 2킬로 남짓 오르내리는 도로 끝에, 누군가 야산 깊숙이 비밀스럽게 가꿔둔 듯한 광활한 정원이 펼쳐졌다. 살포시 깔린 연둣빛 풀 위로는 정갈한 간격의 소나무들이 기묘하게 우뚝 서 있었고, 낮은 오름들이 잔잔히 이어졌다. 그곳은 마치 시간조차 잠시 멈춘 듯한, 누군가가 고이 숨겨둔 또 하나의 세상 같았다.
-경남 산청의 숲
어른이 된 후로는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풍경이 그 밤 숲 속에 있었다. 나무 위에 걸린 작은 오두막은 어쩐지 허클베리 핀의 세계에서 뛰쳐나온 조각 같기도 했고, 어린 왕자의 소행성 모퉁이 바오바브나무 가지에 올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창문 틈새로 새어 나온 불빛은 누군가의 체온처럼 은근히 퍼져 나와 밤의 숲을 품었고, 그 온기는 나를 잠시 안심시켰다. 오두막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어린 시절 나만의 은신처를 떠올리게 하는 기묘한 통로였다.
-수락 동막골의 숲
P.S> 숲에서의 탐색비행이 끝나면, 부엌에서도 작은 탐색비행을 했다.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오이를 얹어보기도 하고, 붉은 토마토로 차가운 국수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낯설지만 즐거운 조합이, 8월의 식탁에 여행의 흔적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