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SU Nov 18. 2022

다정한 단호박

Ep 03: 단호박 포타주

단호박 포타주를 해 먹으면 ‘다정한 단호박’이 될 수 있을까? 이건 우스갯소리지만 늦가을에 단호박을 놓치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The Only Thing I Do Know Is That We Have To Be Kind.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양자역학과 멀티버스에 혹해 보러 갔다가 올해 내 인생 영화가 돼버린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 나오는 대사이다.


스스로에게조차 다정함을 건네기 힘든 요즘,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다정함을 보여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까지 갈 것도 없다. 여러 갈래로 놓인 관계 속에서 오늘도 어느 정도까지의 다정함을 그들에게 건넬지 내가 줄 수 있는 '다정함의 무게'를 저울 재듯 재고 있었으니까.


'다정함'이라는 세계를 '센스로 똘똘 뭉친 앙증맞은 짓으로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거나', '사는 동안 인류애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어쩌면 양심의 가책을 덜고자) 다달이 빠져나가는 기부금'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내게 있어 다정한 무언가는 관계의 정의에 상관없이 함께하는 시간에 의미를 둬 주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도 있었겠지만 지금보다도 마음이 덜 자랐을 때는 관계의 정의를 모눈종이 자르듯 재단하고 싶어 했다. 회사 사람은 여기까지, 인생의 친한 친구는 딱 몇 명만, 이 이상의 거리는 경고등 켜기, 나에게 이 정도의 다정함을 바라다니 차라리 단호박이 되겠어 등등. 지금은? 마음이 성숙 해졌다기보다는 살아가는 관계들이 복잡해졌다. 수박바의 빨간 맛과 초록 맛처럼 경계가 단호했던 관계들의 정의는 소프트콘의 초코맛, 바닐라맛 회오리의 어디 중간쯤과 같은 혼합형이 돼버렸다. 칸칸이 나눠두었던 관계의 거리는 희미해졌고 자연스럽게 얼마만큼의 다정함을 쏟아야 할지도 어지러워졌다. 와중에 끝이 자명하게 보이는 사이는 ‘대체 이 관계의 끝에 남는 게 뭔데 내가 마음을 쏟아야 하지!’라는 인색함으로 속이 부글 거리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정함과 단호박 사이에서 길을 잃던 나는 작년의 ‘젤라토’를 떠올렸다.

으슬으슬한 감기 기운으로 인해, 선홍빛 자태를 뽐내는 라즈베리 젤라토 앞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따뜻한 허브차를 주문했다. 안타깝게도 젤라토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별도의 음료 메뉴가 없었고, 레몬 소르베를 혀의 체온으로 최선을 다해 녹여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작고 도톰한 유리잔에 김이 폴폴 나는 허브티가 내 젤라토 옆에 놓였다. “감기에 걸리신 것 같아서요. 파는 메뉴는 아닌데 구해왔어요.” 순간 내 눈은 동그래지고 마음속엔 따뜻하고 둥근 젤라토가 둥실 떠올랐다. 난 이 동네 사람도 아니고 아마 여기를 다시 올 일은 매우 희박할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은 사실 그분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던 다정함이 잊히지가 않는 것이다.


불현듯 이 따뜻한 젤라토가 떠오를 때마다 그 다정함을 나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싶어졌다. 현실은 매번 달콤하지 않다. 오늘도 나에게 마치 꿀단지를 맡겨 놓은 듯 스위트함을 요구하는 당당한 사람이 있었고, 마음을 더 쓸까, 아낄까라고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갈팡질팡 속에서도 주차장 아저씨는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요’ 라며 인사를 건네주셨고, 이름밖에 모르는 어떤 분은 고맙다는 문자를 먼저 남겨주었다. 내가 주는 다정함 만큼 상대방이 나를 배려해주리란 법은 없으며, 어쩌면 쏟아부은 다정함을 쓴맛으로 돌려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 계산을 버리고 그 순간의 진실한 다정함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그래 너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함께 하는 시간에 다정함을 둔다면.’    




단호박 포타주는 버터에 양파를 충분히 볶은 후, 단호박과 우유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다. 믹서기에 곱게 간 후, 다시 냄비에 부어 생크림을 넣어주면 진하고 부드러운 텍스쳐를 맛볼 수 있다.

상온에서 충분히 말랑해진 버터에 레몬즙과 딜을 잔뜩 넣고, 바게트에 발라 먹는다. 딜의 상큼한 향이 단호박의 달달함과 잘 어울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