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흰 송아지를 타고
가물가물 눈을 떴다. 따가운 햇볕이 눈으로 들어왔다. 실눈을 뜬 채 여물이는 몸을 일으켰다.
“음머어!”
커다란 소울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채만 한 황소들이 여물이 주위에 몰려 있었다. 여물이가 놀란 눈을 하자, 소들은 하나둘 제 갈 길을 갔다. 더러는 곁에서 풀을 뜯었다. 고개를 돌려봐도 소 몸뚱이가 겹겹이 가려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여물이는 강아지처럼 기었다. 발굽에 차일까 볼록한 황소 배 밑으로 작은 몸을 요리조리 움직여 풀밭을 지나자 모래밭이 나왔다. 몸을 일으켰다. 여물이가 있는 곳은 강보다는 작고, 개울보다는 큰 냇가 풀밭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소들이 풀을 뜯었다.
뭔가 촉촉한 것이 손에 닿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송아지였다. 온몸이 새하얀 송아지가 혀를 날름거리며 여물이를 봤다. 아직 뿔이 나지 않아 송아지일 뿐 머리를 들면 여물이보다 훌쩍 컸다. 여물이는 커다란 송아지 눈에 제 모습을 비춰봤다. 헝클어진 머리가 보였다. 반쯤 풀린 고무줄 머리띠를 빼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옴팡지게 쓸어 모았다. 고무줄로 한 번 두 번 세 번 단단하게 뒷머리를 묶었다. 송아지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여물이는 노란 원피스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살포시 잡고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송아지는 그런 여물이를 보고 힘찬 콧소리를 내며 껑충껑충 뛰었다. 여물이가 환하게 웃었다.
송아지는 냇물을 건너려는 듯 물로 들어갔다. 여물이도 따라 발을 담갔지만 물은 금세 무릎을 지나 치맛자락을 적셨다. 여물이가 뒷걸음으로 물에서 나왔다. 송아지도 고개를 돌려 보더니 물가로 나왔다. 송아지가 여물이 옆에 앉았다. 등에 타라는 듯 꼬리로 찰싹찰싹 제 등을 때렸다. 여물이는 망설이지 않고 하얀 송아지 등에 올라타서는 두 손으로 꼭 목을 감쌌다.
“무어어!”
힘을 쓰듯 울음소리를 한 번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냇물은 송아지 가슴을 적셨다. 여물이는 두 다리를 올려 소 엉덩이에 걸쳤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송아지는 어느새 냇물을 건넜다. 여물이가 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둘은 강둑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강둑에 서서 냇가를 내려다보니 멀리 소떼들은 꾸물꾸물 굼벵이같이 보였다. 송아지는 뭔가를 찾듯 그런 소들을 바라보았다.
“엄마 찾아?”
여물이가 물었다. 소는 푸우 고개를 저었다.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여물이와 송아지는 언덕을 향해 달렸다. 주위는 금세 어두워졌다. 냇가 쪽에서 고추잠자리 떼가 언덕을 향해 날아왔다. 그 뒤를 시커먼 소나기가 따라왔다. 잠자리 떼가 여물이와 송아지를 머리 위를 날아 언덕을 넘었다. 곧바로 소나기가 덮쳤다. 커다란 바위 아래로 몸을 피했다.
“과과과!”
귀가 멍멍할 정도로 굻은 비가 쏟아졌다. 여물이와 송아지는 서로 꼭 껴안았다. 젖은 몸이 오도독 떨렸다. 그럴수록 여물이는 따뜻한 털로 덮인 송아지의 몸을 파고들었다. 송아지 다리 앞으로 물고기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물고기는 바닥을 파닥파닥 거리더니 다시 빗속으로 들어가 빠르게 사라졌다. 어디가 물 밖이고 어디가 물 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차 약해졌다. 여물이가 고개를 들었다. 소나기가 몰려왔던 곳으로부터 볕이 나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걷히고 해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둘은 바위 아래서 나와 언덕에 섰다. 훅 바람이 불어왔다. 잔뜩 습기를 먹은 바람이 송아지의 털을 날리고 여물이의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햇볕이 따가워졌다. 둘은 산 쪽을 향해 달렸다.
산이 가까워지자 억새밭이 나왔다. 뻣뻣하고 거친 억새 잎이 여물이의 팔과 다리에 상처를 냈다. 여물이는 쓰라리고 아팠다. 그러자 송아지가 먼저 억새를 헤치고 나갔다. 둘의 키를 훌쩍 넘는 억새밭을 간신히 벗어났다. 군데군데 바위가 솟은 억새밭이 끝나고 아름드리나무가 우뚝 선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물이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송아지는 그런 여물이를 놔두고 어둑어둑한 숲 입구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가지 마. 무서워.”
여물이가 말했다. 송아지가 걸음을 멈췄다.
“무어어.”
송아지는 고개를 돌려 한 번 울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 같았다. 여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아지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빙글빙글 돌았다. 여물이는 웃었다. 송아지도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며 요란한 콧소리를 냈다.
여물이는 어느 바위 위로 올라갔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송아지는 그런 여물이를 보더니 이윽고 숲 속을 향해 걸어갔다. 대낮인데도 숲 안은 밤처럼 어두웠다. 어둠 속으로 하얀 송아지는 금세 사라졌다.
여물이가 가물가물 눈을 떴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둘러보니 할아버지 댁 마루였다.
“우리 여물이 깼어?”
엄마가 다가왔다.
“엄마!”
여물이는 와락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 언제 왔어?”
“주말에 내려온다고 했잖아. 엄마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더라.”
여물이는 다시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엄마, 송아지 못 봤어?”
여물이는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오며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송아지?”
“응, 흰 송아지.”
“할아버지 댁에 소 안 키우는데.”
“아냐, 분명 흰 송아지랑 놀았는데.”
엄마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꿈꾼 거 아냐?”
“꿈?”
여물이는 왠지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풀썩 마루에 걸터앉았다. 엄마가 옆에 앉으며 여물이 어깨를 꼭 안았다.
‘나 여기 있어.’
여물이가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봤다. 아무도 없었다. 여물이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제 귀를 엄마 배 위에 갖다 댔다.
“여물아. 왜 그래?”
여물이는 엄마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배에 귀를 기울였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고개를 낮게 끄덕이기도 했다. 엄마가 물었다.
“엄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 나?”
여물이는 고개를 들고일어나며 엄마를 봤다. 환하게 웃었다.
“왜 그래? 얼른 먹을 거 달래?”
“응, 배고프데.”
“여물아.”
대문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