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이 틀린다. 어쩌다 맞을 뿐이다

by 홍단근

카프카가 지은 『변신』에서 주인공은 자고 일어나니 벌레가 되었다.

그는 가족과 사회에서 미움을 받고 끝내 버림받았다.

혐오는 사회적 관심과 인기를 얻는 도구 중 하나이다.

누구는 포플리즘을 활용하여 지지표를 얻으려고 했고, 누구는 클릭 수를 많이 받아서 경제적 목적을 위해 모욕을 도구로 사용했다.

그들은 빈부 격차, 세대 차이, 남녀갈등으로 편 가르기 및 여론몰이를 시작하고, 미디어는 그런 불화를 복제해서 증폭시키기에 바쁘다.

그들의 전략은 내부의 결속을 공고히 하고 중립적인 이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콘스탄틴>에서 루시퍼는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려는 아들 마몬을 주인공 대신 처벌했다.

자기 생각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는 선택 편향은 정보화 시대에 시간을 절약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혐오와 편향을 결합하여 악용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큰 악당은 사회 정의를 실현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에게 천사처럼 보일 수 있고, 표적 사냥으로 더 큰 악을 감출 수 있다.

이를테면 민감한 정치 이슈를 감추기 위해 특정 연예인을 마녀로 몰아가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혜로운 이들은 그런 속셈에 섣불리 동조하기보다 만남을 통해 실체를 확인하려고 들었다.

당신도 그들처럼 기회가 된다면 이질적이고 소수의 집단을 직접 만나보라.

우리가 남을 싫어하면 남도 우리를 싫어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외국인을 이유 없이 미워하면서 반대로 자신이 외국에 나갈 때 인종차별을 당할 수 있다.

혐오의 원리는 자원이 부족해서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설명되었다.

마치 석유는 곧 고갈된다고 떠들지만, 아직도 기름은 나오고 오히려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는 모순이 발생했다.

경제성이나 매장량처럼 혐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편견을 수혈받을수록 우리의 아량은 점점 좁아지고, 정보는 오염되기 마련이다.


지식이란 그 시점에서 조금 알고 있는 것일 뿐이다.

과거에 진리로 여겨졌던 천동설처럼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지식은 누군가의 정당한 의심으로부터 깨어지기 마련이다.

우유는 그대로 두면 썩지만, 끊임없이 휘저으면 치즈로 변할 수 있다.

우유처럼 내가 아는 사실도 편향되지 않도록 그 앎이 올바른지 의심하자.

내가 틀릴 수도 있다가 아니다.


나는 많이 틀린다.

어쩌다 맞을 뿐이다.

이제부터 누군가가 만든 공분에 쉽게 휩싸이지 말자.

남을 비난할수록 편 가르기에 미혹되고, 자신을 키보드로 댓글을 다는 방구석 여포로 만들 뿐이다.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를 만든 키요틴 박사처럼 남을 단죄하다가는 자신도 어느새 처단당할 것이다.

미움을 넘어 허물마저도 덮어주는 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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