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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Mar 03. 2017

'아줌마'와 함께한 인도네시아

내가 겪은 직장상사의 리더십


 아내와 내가 '아줌마'라고 부르는 직장 상사가 있다. 이발을 자주하지 않아 늘 장발을 기르고 다니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어느날 어머니께서 내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시다가, '이분이 네 처형댁 조카들 봐주시는 아주머니시냐'라고 물으신 일을 계기로 통상 '아줌마'라고 부르고 있다. 아줌마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내가 인도네시아 주재원을 하며 모신 상사이기도 하다.


 적은 연차(입사 3~5년차)에도 불구하고 주재원 근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한국에 돌아온지도 벌써 2년 반이 흘렀다. 사실 높은 위치도 아니었고 딱히 인사팀에서 업무나 역할을 정해준 발령도 아니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머무는 동안 내가 어떤 업적을 쌓았다기 보다는 '많이 배웠다.'라고 말하는게 더 적합할 것 같다.


 오늘, 인도네시아 법인 직원들이 다 같이 보여 '반둥(Bandung)'이라는 근교 도시로 워크샵을 다녀왔다고 SNS에 사진을 공유했다. 내가 떠난 이후로 법인 사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그만큼 모르는 얼굴도 많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일했던 몇몇 반가운 얼굴들 역시 여전히 떠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에 처음 진출한 소비재 기업들이 털어놓는 흔한 고충 중 하나는 '직원들의 잦은 이직'이라고 한다. 삼성과 현대처럼 거대 자본을 가진 국내 기업이 없기 때문에 가방끈이 긴 우수 인력들은 희소성을 가지고 외국 회사에 입사해 자주 이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록 대졸 초봉은 형편 없지만 그렇게 경력을 쌓아 2-3년마다 한 번 회사를 옮기면 10년도 되지 않아 연봉은 두 세배로 뛰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그들에게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무조건 비판할 수도 없다. 그것 역시 그들이 터득한 생존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법인은 2012년 3월에 처음 사무실을 열었다. 물론 시작은 임대 사무실에 책상 두 개 놓고 재무 매니저 한 명을 뽑아 놓은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 재무 매니저를 포함하여 요직에 있는 팀장들과 초기에 합류한 주요 포스트의 직원들, 그리고 판매 사원들의 대다수는 아직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위에 서술한 '일반적인' 외자 기업들의 케이스와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여러 다른 글로벌 회사의 인도네시아 지사에서 헤드헌터를 통해 러브콜이 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더 좋은 조건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할까? 나는 이 점을 초대 법인장, '아줌마'의 리더십에서 이유를 찾고 있다. 나보다 몇 달 먼저 인도네시아에서 온 아줌마는 타고난 영업맨은 아니다. 영업에서 근무한 경력도 많지 않고 겉보기에 그리 강인해 보이는 인상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작은 법인이 일하기 좋은 법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했다.



첫째, 그는 비즈니스 환경의 차이를 이해했다.

 어느 나라나 그 곳에는 'Local Practice'가 존재한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마찬가지고,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인도네시아에서는 매니저급 인력이 기사가 딸린 차량을 주요 채용 조건으로 꼽는다. 중요한 외부 미팅을 가는데 교통과 주차난 때문에 늦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절대 집에 차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곳에서 대학을 나오고 영어를 쓸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으려면 상당한 상류층이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인사팀이나 담당 임원들은 이러한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동남아 진출 경험이 없는 기업들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많은 수의 주재원들은 본사의 방침을 수용하고 직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따르도록 지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얼마 전 LG전자 프랑스 법인장이었던 이가 작성하여 회자가 되었던 글(기사참조)처럼 많은 한국 기업들이 '고압적이다'라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줌마는 본사와 직원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으셨다. 다른 회사들의 사례를 충분히 검토하고 이런 점들이 현지에서는 중요하다는 점을 들어 양해를 구하였고, 직원들 역시 본사의 프로토콜이 이러하니 이 선에서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을 설득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하나 쌓여 직원들의 신뢰를 얻었고, 설령 아줌마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일을 추진하더라도 '분명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둘째, Big Deal이 아닌 것이 목숨 걸지 않았다.

 많은 한국 기업의 주재원들이 현지 직원들의 역량(또는 책임의식이나 정직성)을 미심쩍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트한 SOP를 만들어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작은 것들도 보고 받아야 안심한다. 하지만 아줌마는 현지인 매니저들에게 많은 권한을 이양하고 그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였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셨는데,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할 때 즈음 지역 전문가 과정으로 인도네시아에 단기 파견을 온 동기가 웬만한 일은 별다른 보고 없이 나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다.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개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어 법인 전체의 잠재력도 극대화 되었다고 믿는다. 돌이켜보면 다들 즐거워했고, 보람찼던 분위기가 가득한 일터였다.



셋째, 개인적인 친밀함보다는 성과와 포상이 중요함을 알았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성과를 내고 그에 다른 보상이 일어나는 구조를 가진 조직이다. 물론 다들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면 좋겠지만, 사실 수직적 위계질서 아래 서로 평가하는 차가운 인간관계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아무리 구성원끼리 친하더라도 성과가 나지 않고 보상이 적으면 조직을 떠나는 건 한 순간이다.


 다행히 초기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성과는 좋은 편이었다. 아줌마는 공식적인 인사평가 뿐 아니라 부수적인 포상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매니저급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 직원들은 여권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은 관광비자를 받기도 힘들 뿐더러 소득 대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이 점을 활용해서 본사에서 초청하는 공식 행사 뿐 아니라 동남아 주변 국가라도 가볼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을 수립하여 성과가 좋은 직원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난생 처음 해외를 나가볼 수 있던 직원들과 판매사원들이 기뻐했던 것은 물론이다.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는 작은 포상에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이 나라 사람들 참 소박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나도 그렇지만 아줌마도 근무하는 동안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출퇴근 길 열악한 교통 환경 때문에 빨리 집에 들여보내야 했고 더군다나 대다수의 직원들이 워킹맘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SNS에 많이 돌아다니는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참고)'을 읽어보았는가. 아직도 많은 상사들이 직원들과 회식을 갖고 업무 외적인 소통을 통해 사무실에서 잃었던 점수를 만회하려는 우를 범한다. 가장 좋은 상사는 성과를 낼 수 있게 최대한 지원해 주고, 좋은 고과와 보상을 얻게 해주는 상사이다. 인간적인 친밀감도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쌓일 수 있다.


 아줌마는 직원들에게 항상 열린 자세를 취했다. 가정사와 회사일의 고충 때문에 한 매니저가 울면서 주말에 찾아왔을 때도 진심을 다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주말이면 소소한 간식을 챙겨 매장에 나가 판매사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오셨다. 사실 말이야 쉽지 제대로 된 대중교통도 없는 자카르타에서 몇 개 매장을 도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나도 아줌마를 따라 매장을 종종 돌았다. 나는 당시에 가족도 없고 주말에 몰에 가서 식사하는 것 빼고는 할 일이 없어 따라 한 일이었는데, 그런 점이 꽤나 감동적이었나보다. 2014년 8월, 인도네시아에서 마지막 출근하던 날, 한 판매사원이 예전 다른 외국계 경쟁사에서 일할 때는 법인장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본사에서 파견된 주재원이 매주 매장에 얼굴을 비추며 관심을 주어 감사했다며 눈물을 흘릴 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주재원 파견 경험이었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도 부족했던 것 같고, 너무 어린 연차에 파견되다 보니 발휘할 수 있었던 역량도 모자랐던 듯 싶다. 지금 다시 나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만약 다시 한 번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줌마가 몸소 보여주셨던 모범적인 리더십이 나에게 가장 큰 자산이 되어줄 듯 하다. 물론 남의 리더십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과 내가 직접 해보는 것은 분명 다르겠지만.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식사하다가 아줌마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사실 리더십에 대해 책도 좀 읽고 그걸 적용해 보려고 제린씨한테 가끔 써먹는 게 있거든? 근데 그게 책처럼 잘 안돼. 안 쉬워."


 그 때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다.


 "이미 지금도 훌륭히 잘 하고 계셔요."


 그리고 그 때 뿌리신 자양분은 이 글의 커버사진이 보여주듯 아직도 잘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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