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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Mar 07. 2017

'KBS'와 함께한 군생활

이등병이 겪은 분대장의 리더십


"야, 신병. 너 2중대냐? 넌 X 됐다. K상병님이 얼마나 무서운데!"


 자대에 배치된지 며칠 되지 않은 2004년 2월의 어느 일요일 밤. 나의 분대장이라는 사람이 휴가에서 복귀했다.


 울긋불긋한 얼굴, 다소 위로 치켜 올라간 눈동자, 얼굴에 스킨을 바르고 관물대 사물함을 발로 쾅 차서 닫는 박력. 그리고 껄렁껄렁한 말투와 행동.


 "야, 담배나 한대 펴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너 빨리 뒈지라고 주는 건데."


 그렇게 군기 빡세기로 소문난 KBS 상병(KBS는 그의 한글 이름 이니셜)이 이끄는 분대의 막내로서 나의 자대 생활이 시작됐다. KBS 분대장은 소문대로 무서운 선임이었다. 작업을 잘 못하는 건 용서해도 청소가 깔끔하지 못하거나 훈련 도중 부주의로 사고라도 날뻔한 날, 그리고 사격과 태권도에서 낙제를 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무섭게 혼냈다.


 물론 자신도 잘 못하면서 아랫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는 이등병, 일병 때부터 'A급 병사'라고 불릴 정도로 군생활에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장구류의 때가 잘 지워지는지, 화장실 청소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다못해 유격훈련 때 중간에 퍼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분대원들에게 하나하나 전수했다.


 아직도, 큰 훈련이 끝나면 물 가득 받아 넣은 목욕탕에 각종 장구류와 전투복을 집어넣고, 분대원 전원이 발가벗고 들어가 빨래와 샤워를 동시에 하던 장면이나, 유격훈련 전 주에 함께 피티체조 연습을 하며 즐겁게(?) 연병장을 구르던 장면, 갑작스러운 여단장 방문에 변기들을 다 막아놓고 물을 틀어 흥건해진 화장실 바닥을 분대장님과 둘이 치약 믹싱을 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군생활의 충만한 내공뿐 아니라 아랫사람도 챙길 줄 아는 리더였다.


 내가 복무하던 부대는 후방에 있는 2군 향토사단이었던 탓에, 전방의 1, 3군 예하 사단보다 없는 시설들이 많았다. 특히 종교시설이 없어 일요일이면 부대 밖에 있는 교회, 성당, 사찰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종교 선택의 자유는 없었는데,


1) 기독교: 교회에서 봉고차를 보내줘서 짤 없이 교회로 직행. 예배보고 교회 밥 먹고 청년부 사람들이랑 찬양하다가 다시 봉고차로 복귀. 이등병, 일병 및 신앙이 깊은 몇몇 상병, 병장 참석

2) 천주교: 부대에서 500m 거리의 성당에 걸어감. 미사 끝나고 교인 중 한 분이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 먹을 수 있음. 상병 이상 가능.

3) 불교: 부대 뒷산을 넘어 어딘가에 있는 절에 감. 위치는 아무도 모름. 가다가 중간에 PC방으로 직행하며, 상병 6-7개월 차 이상만 가능.


 일병이던 어느 여름날의 일요일. 생일이었는데 그날도 종교행사를 가기 위해 당연히 기독교 줄에 섰다.


 "야, 너 왜 거기 서있어. 일루와 오늘 형이랑 불경드리러 가자."


 그렇게 병장들 사이에 끼어 분대장님과 함께 처음으로 산을 타고 PC방에 가서 불경(?)을 드리고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햄버거를 먹고 부대로 복귀했다.


 게임을 하는 중에도 밥을 먹는 중에도 그는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가는 내내 더 갈궜다. 불문율을 어기고 일병이 PC방에 온 것도 다른 병장들이 좋게 볼리 없었는데 괜히 생일이라고 말해버리면 내가 눈치 보고 더 불편할까 봐 그런 배려를 했다는 것. 난 알았다.


 이렇게 거칠지만 따뜻한 그의 배려는 다른 분대원에게도 드러났다.


 맞선임이 여자 친구랑 헤어질 위기에 힘들어하던 어느 날. 그 날만 갑자기 저녁 점호를 일찍 했는데, 여자 친구와 통화하느라 전달받지 못한 그가 점호 중에 내무실로 들어왔다. 상병들부터 내리 갈굼이 시작될 위기 상황. 그때 분대장이 먼저 나서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먼저 그 맞선임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갈굼과 점호가 끝나고 모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OO이 오늘 점호 늦은 건 이걸로 끝이다. 지금부터 아무도 이걸로 OO이 갈구지 마라. 죽는다."


 그는 몇 번씩 이어지는 내리 갈굼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그의 이런 '츤데레' 같은 면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마음으로 따랐다. 훈련이나 작업을 잘하거나 정신교육에서 좋은 성과가 있으면 으레 포상휴가나 외박이 나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분대원들에게 이번 성과에 누구 공이 큰지 무기명 투표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를 더하여 공정하게 수혜자를 정했다. 짬밥이 높다고 받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못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 분대는 KBS 병장의 지휘 아래 뭐든 열심히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고, 분대 내 선후임간에 위계질서는 지키되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말년휴가를 떠났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대대는 사단 본부로 동원훈련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와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헤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가 휴가 복귀하는 날 저녁. 사단 본부에서 대대 상황실로 전화를 걸었다.


 "통신보안, 1대대 상황실 일병 XXX입니다."
 "어, XX야, 나 제린인데 혹시 KBS 병장님 휴가 복귀하셨니? 오셨으면 좀 바꿔줄래?"


 감히 말년병장을 오라 가라. 하지만 뭐 따질게 아니었다. 다다음날이면 그는 부대를 떠날 것이고, 당장 내일 아침부터는 입소하는 예비군들 챙기느라 전화할 짬이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통신보안, 병장 KBS입니다."
 "으허헝 K병장님 ㄴㅇㄹ햅ㅇㅈㅇ비ㅑㅇ숒ㅁㅇ 엉엉"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다. 야이 새끼야 이렇게 후임들 굴릴대로 굴려놓고 추억은 추억대로 만들어놓고 너만 이렇게 얼굴도 안 보고 전역해버리면 땡이냐 대충 이런 마음이었던 거 같다.


 다행히 그는 부대의 배려로 다음날 우리가 있는 사단 동원훈련장에 왔다. 마지막으로 사비를 털어 PX에서 잔뜩 간식을 사서 환송 파티를 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그다음 날 아침, 그는 전역했다. 아침 점호를 마치고 다른 두 명의 입대 동기들과 나란히 서서


 "부대 차렷, 후임병들에 대하여 경례! 충성!"


 그리고 우리도 그들에게 경례로 화답하고 멀어져 가는 그들을 환송했다. 내가 본 전역 장면 중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그를 떠나보내고 각자의 위치에 돌아왔다. 그제야 모두들 각자의 관물대에 꽂힌 편지를 발견했다. 분대장이 아침에 점호 나가면서 몰래 놓아두고 간.


 한 녀석이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모두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야 너 K 병장님이랑 얼마나 오래 군생활 같이 했다고 우냐?"라고 핀잔을 준 옆 자리 선임도 어느새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사실 군대와 회사는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관료제의 모습을 띠고 있고, 정형화된 규칙과 룰이 있는 것은 물론 인사고과와 포상(휴가나 외박)도 있고, 뒤쳐지는 구성원에 대한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왕따, 파벌 간의 갈등. '짬밥'에 의해 돌아가는 조직의 생리 등이 그렇다.


 그 안에서 다양한 리더들의 모습이 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아랫사람에게 무관심한 리더도 있고, 원칙 없는 지시로 부하들을 힘들게 하지만 가끔 사석에서만 나이스 한척하며 본인은 좋은 리더라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은 좋지만 기본기가 탄탄하지 못해 제대로 된 조언을 하지 못하는 리더도 있다.


 군대에서 분대장이라는 자리는 해당 분대에서 최고참이 되면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에 자질 검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대부분 20대 초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생활 초반에 KBS 병장과 같은 분대장 밑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니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회사생활을 하면서 '좋은 리더의 덕목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놀랍게도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덕목들은 13년 전에 불과 23살이었던 KBS 병장이 보여줬던 리더십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것들을 적어보며 글을 마칠까 한다.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1) 아랫사람들과 정보공유에 스스럼이 없어 리더가 자신을 신뢰한다고 믿게 한다.

2) 낮은 직급에 있을 때부터 탄탄한 실무 경험을 갖추고 있어 적절한 조언은 물론 긴급상황 시 직접 대응할 수 있다.

3) 조직 내 자신을 추앙하는 소수 집단을 만드는 등 구성원 간의 반목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지 않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리더가 자신을 케어한다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4) 공정하고 원칙 있는 보상과 징계(?)를 통해 모두가 열심히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5) 스스로도 윗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아 말단 조직 구성원들도 돋보일 수 있도록 한다.

6) 아랫사람들과 너무 허물없게 지내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선은 유지하되 가끔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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