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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Nov 18. 2017

대륙의 기억

Surf the new waves


 샐러리맨의 애환을 담은 일본 만화 '시마 시리즈'의 주인공 시마 코사쿠는 1984년 미국 지사로 발령을 받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 시마는 앞으로 펼쳐질 글로벌 시대에 대해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중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중국에도 우리 하츠시바 제품이 팔릴 날이 올까?"

 "바보 같긴, 중국은 공산국가라서 그러려면 수 십 년은 더 걸릴걸?"


 하지만 그 후, 6년이 채 지나지 않아 공산권은 붕괴한다.


<시마 시리즈>에는 중국의 잠재력을 알아채지 못하는 대화가 자주 등장한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즈음, 내 방 벽에 붙어 있던 세계지도에서 중국은 '중공', 대만은 '자유중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준말인 '중공'은 적성국가였고, 자본주의 노선을 택한 대만이 '자유중국'임을 고려할 때, 자유가 없는 1당 독재 빨갱이의 나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구권과 소련이 몰락했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했고 서울 올림픽으로 연을 맺은 탁구선수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결혼했다. 중국과의 화해무드를 보여주는 이 상징적 사건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94년, 사회시간에 이 이야기를 배우던 쯤, 여전히 어른들을 러시아를 '소련', 중국을 '중공'이라 불렀지만 냉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가 처음 만난 중국은 과거 공산주의 패권을 지닌 강대국이 아닌, '사람 많은 못 사는 나라'였다.


1989년, 결혼 발표를 한 자오즈민과 안재형


 학창 시절, 우리는 '짜장면'을 중국인을 낮춰 부르는 말인 '짱개'라고 불렀다. 그만큼 뒤늦게 자본주의를 도입한 중국은 짝퉁이나 만드는 후진국이었고 더럽고 냄새나는 나라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다들 중국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예측했지만, 10대의 나는 애써 그걸 부정했다. IMF로 한풀 꺾이긴 했지만 우리나라 역시 중국 못지않은 고도성장 시대를 달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변변한 기술 없이 자원이나 팔아먹는 덩치만 큰 나라가 근 시일 내에 우리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던 2001년, 나는 고3이었다. 그 해 수능을 망친 국민학교 동창 한 녀석은 재수 대신 유학을 선택했다. 녀석이 택한 나라는 영국도, 미국도 아닌 중국이었다. 다소 의아해하던 나에게 그는 부모님의 권유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중국어만 건져와도 성공이래."라는 말을 남기고 녀석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이 되었다. 제대 후 복학을 하고 나니 학교에는 중국인 유학생들로 넘쳐났다. 나와 같이 1980년대에 태어난 중국 청년들은 공산주의 시절 조국에 대한 추억이 없었다. 유년시절부터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란 그들은 부모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세대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유학생을 수용할 인프라가 전혀 갖추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거대한 마이너리티'를 형성하며 겉돌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그들을 무시했다.


 다른 대학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는 강의 시간에 이런 일을 겪었다고 했다.


 역사 교양과목 수업 중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정신문화 유산에 대해 강의하던 교수가 자신의 강의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앞 줄에 앉아있던 중국인 유학생에게 약간은 무시하는 투로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한국에는 이러한 훌륭한 정신적 유산이 있는데, 자네 나라에는 무엇이 있나?"


 그러자 홀로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단 그 중국인 유학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툴지만 단호한 한국말로 이렇게 답했단다.

근대화에 늦어 지금은 중국이 뒤쳐져 있지만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중원을 지배하면서 내려온 위대한 중화사상이 있습니다. 지금 중국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능력을 갈고닦으며 다시 일어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앞선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 와 있지만 이를 발판으로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강의실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이에 당황한 교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애꿎은 한국 학생들에게 소리 질렀다고 했다.


 "너희들 중국한테 안 따라 잡히려면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



 그 해 가을,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라며 '동북공정'을 주창했다. 내가 활동했던 연합 광고동아리 후배들은 '我的朋友(워더 펑요, 내 친구)'를 비꼬아 '워더 뻥이요'라는 캠페인을 만들어 '중국의 역사 인식이 모두 뻥이고, 계속 그렇게 우기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포스터를 제작해 서울 시내에서 플래시몹을 진행했다. 그런 후배들이 자랑스러워 나는 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그 사진을 올렸는데, 그날 저녁, 그걸 본 중국인 유학생 친구와 msn 메신저로 심하게 다퉜다.


대학생연합광고써크 '애드파워'에서 2006년 제작한 동북공정 반대 포스터




 대학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던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영미권이 아닌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영어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어는 어느덧 기업체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아그렇게 HSK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수도 늘어나던 그 무렵에 나는 사회에 진출했다.


 사회에 나와보니 중국의 영향력은 학교에서 체감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입사한 회사의 대 중국 매출 의존도는 높았고, 그 성장세도 몹시 빨랐다. '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로 진출할 수 있는 시장은 그나마 인종적, 문화적으로 유사한 아시아였고, 그중 중국은 인구와 성장잠재력이 엄청난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굳이 중국에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012년을 전후하여 중국인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밀고 들어왔고, 거대한 내수시장과 기회를 등에 엎고 기술력과 혁신을 앞세운 기업들이 미디어를 장식했다. 그리고, 올봄, 싸드 배치를 빌미로 중국은 강한 경제적 압박을 가해왔다. 이는 회사 매출에 악영향을 주어 나의 주머니까지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이제 시진핑이 한숨을 쉬면, 서울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인 내가 쓰러진다.




 나는 올해 35세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과 그 기간 동안 변화한 중국의 모습을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생각해본다. 떠올려보면 정말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중국의 위상은 너무나 달라졌다.


 얼마 전, '징동 닷컴'이라는 중국 전자상거래 플랫폼 CEO가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중국 내 재계 순위 9위라는 그를, 팀 후배가 로비에서 맞아 접견실로 안내했다.


 "자수성가한 분이라 그런지 매너도 좋으시고, 일단 수트 때깔이 남다르다라고요."


 그 날 후배는 퇴근할 때까지 수트 얘기를 세 번이나 했다.



 

 중국의 변화가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공산권이 무너지던 1990년대 초, 미디어가 보여주던 중국의 모습은 허울뿐인 계획경제가 남긴 피폐함과 후진성이었다. 어린 시절 '중공'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내가 기억하는 후진국 중국과 '최고급 수트의 후광'을 업은 2017년 '징동닷컴' CEO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중국. 이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데에는 불과 3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시마 시리즈'에서 미국 주재원이던 시마 과장은 상무가 되어 2002년, 중국 법인으로 발령받는다. 18년 전, 동료와 함께 "우리가 회사 다니는 동안 하츠시바가 중국에 진출할 일은 없을 거야."라고 나눈 대화가 무색하게 그 시기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답을 너무 현재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삶의 순간순간 우리는 변화의 시그널을 감지하지만 대개 그냥 지나치고, 그 파편화된 시그널들을 연결하여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흘려보낸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거대한 변화의 한 지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한참 뒤에 깨닫는다. 나 역시 삶 속에서 중국의 변화를 계속 목격했지만, 순간순간의 모멘텀은 무심코 지나친 채 어느새 커져버린 중국의 정치, 경제적 위상에 "와!"라고 탄성만 지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중국이, 그리고 우리가 얕잡아보고 있는 어떤 기회가 대세로 등장할지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30년 남짓한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이미 중국이라는 큰 변화를 목격했다.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질 앞으로의 세상에서 몇 번의 상전벽해를 목격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다음 변화에는 "아!"하고 마는 목격자가 아닌, 기회에 편승할 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촉을 다듬고 주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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