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부'에 대한 단상
청운의 꿈을 안고 신입사원 연수를 받던 2009년 겨울의 일이다.
회사 경영현황에 대한 지루한 강의가 계속될 무렵,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딛는 신입사원들을 위해 외부 강사의 강의가 하나 배정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미스 척산(전북 김제의 한 마을 지명) 출신’이라 지칭했던 낭랑한 목소리의 40대 강사님은 이제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 어떻게 시간과 돈을 쓰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자신만의 독특한 위트로 재미있게 설명해 주셨다.
“여러분, 돈 벌기 시작했다고 너무 많이 쏘지 마세요. 쏘더라도 4명 이하만 모였을 때 쏘세요. 그 이상 넘어가면 누가 샀는지도 모르고 기억도 못합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사람은 멀티를 잘 합니다. 꼭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일 두 가지를 묶어서 한 번에 하는 일은 시간 관리에 도움이 됩니다. 아침에 화장을 하면서 팟캐스트 뉴스를 듣는 일 따위 말이죠.”
이런저런 잡다한 사회생활 팁을 전수하시던 미스 척산 여사는 강의 막바지가 되어 가장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학창생활이 끝났다고 해서 자기계발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소득의 10%는 꼭 자기계발을 위해 쓰세요. 언젠가는 여러분에게 무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2, 30대 시절에 주식보다 더 의미 있고 유용한 재테크는 자기계발입니다.”
그리고 9년의 시간이 지났다.
얼마 전 회사 사무에 필요한 도서를 구입하러 서점에 들렀다.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그렇게 즐비하던 자기계발서들은 어디로 간 건지 이제 투자와 부동산, 비트코인에 대한 책들만이 메인 가판대에 즐비하다.
얼마 전 연말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 부부는 술이 좀 들어가자 이렇게 말했다.
“오빤 부자가 되는 게 꿈이래요.”
친구의 와이프가 먼저 새로 산 명품 코트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그 코트는 친구가 직업상 알게 된 지인을 통해 얻은 내부 정보로 수익을 내 사준 거라고 겸연쩍게 말했다.
“돈 벌려면 크게 한 방 땡겨야지, 범죄 아닌 선에서.”
하면서 친구 녀석은 껄껄 웃는다. 분위기를 깨기 싫어 나도 맞장구쳤지만 마음속에 이는 씁쓸한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 인간의 능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는 가고, 어느 때보다도 돈이 돈을 가져오는 시대가 되었다. 투자는 본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부와 가치를 창출하는 레버리지로 역할이 컸다. 하지만 경제 성장이 둔화되어 사회의 총체적 부가 증가하지 않는 오늘날, 투자는 그저 자신보다 멍청하거나 운이 나쁜 다른 투자자들의 자산을 빼앗아 부를 축적하는 행위로 점점 변질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지난주 월요일, 회사 후배 하나는 주말 잘 보냈냐는 말 대신 “그 새 또 많이 올랐어요.”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넣어둔 가상 화폐가 주말 사이 또 반등하여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이틀 새 내 월급 두 달치를 벌어들였다. “그러게 제가 하시라고 말했잖아요, 선배.”라는 말에 은근히 속도 쓰리다.
자본이 빠르게 스스로 증식하는 이 사회에서 희망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수 백 퍼센트를 육박하는 가상화폐의 수익률은 노동과 인간 능력의 계발, 그리고 다른 무형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직업과 노동을 통한 보상이 별 볼일 없어진 이런 세상에서 누가 수년간 힘든 연구를 하여 박사가 되고, 힘든 훈련을 통해 운동선수가 되고, 또 누가 리스크가 큰 사업이나 발명에 뛰어들어 희망을 찾을 것인가.
어려운 공부를 통해 전문직이 되고 고액 연봉을 받는 친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외국어나 자격증처럼 자기의 가치를 높여서는 절대 충분한 부를 얻지 못한다는 걸. 그렇게 우리는 비상식적인 투자 수익이 노오력을 가볍게 비웃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한 방”을 노리는 사이, 노동 없는 부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우리 아이들은 장래희망란에 ‘건물주’와 ‘비트코인 부자’를 태연하게 적는다.
9년 전 ‘미스 척산' 여사의 말을 곱씹어 본다. 소득의 10%를 자기계발에 쓰는 것은 여전히 가치 있는 투자인가, 아니면 그 돈으로라도 이 열풍에 뛰어드는 것이 맞는가.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세상이 온건 맞는 것 같은데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석연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