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tergrapher Oct 18. 2018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볍고 즉흥적인 조언은 사양합니다.


 나는 춤을 잘 못 춘다. 박치는 아니지만 동작 습득이 더디고 춤 선도 예쁘지 않다.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H.O.T.의 춤을 똑같이 따라 추는 친구들을 보면 꼭 다른 세상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흥미와 적성이 다를 수도 있는 걸까. 춤은 잘 못 추지만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것은 좋아했다. 노래방에서 TV에서 본 가수들의 안무를 포인트만 살려 살짝살짝 추면 친구들은 재미있어했다. 비록 퀄리티는 오리지널과 천지 차이였겠지만.


 올봄에 새 동네로 이사 오면서, 집 앞 스포츠 센터에 방송댄스 강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한 번은 꼭 배워보고 싶었지만 집이나 회사 근처에 가르치는 곳이 없어서 감히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등록을 하고 수업에 가려니 이번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넘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10대 때도 안 해본 일을, 100kg이 넘는 서른여섯 살짜리 아저씨가.


 하지만 수강생들은 대부분 아가씨, 아줌마들. 이런 분위기에서 수업에 혼자 들어가는 일은 꽤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나는 수업에 자주 늦었다. 수업 중인 수강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습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걸그룹 웨이브를 따라 하는 육중한 내 모습을 대형 거울로 마주하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매 시간 춤 동작을 따라 추고 땀을 흘리면 몸에 엔도르핀이 솟아나는 걸 느꼈고, 역시나 오늘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웃으며 귀가하곤 했다. 어느 정도 춤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나는 할머니 생신 잔치 때 수업에서 배운 춤을 축하 공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 아버지께서는 부끄러워하시며 차마 아들의 춤사위를 쳐다보지 못하셨지만.





 그렇게 즐겁게 춤을 추며 몇 달이 흘렀다. 안무를 익힌 노래가 열 곡이 넘어갈 때쯤, 아내는 어느 날 밤, 대뜸 댄스 수업을 그만두면 좋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 날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아내는 남편 방송댄스 수업 듣는다는 이야기를 자랑하듯 슬쩍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남자 직원들은 제정신이냐고 제각기 한 마디씩 거들었다고 했다. 여자 30명만 있는 수업에 어떻게 안심하고 보내냐며. 아내는 몇 달 보내 봤더니 남편이 정말 춤만 열심히 추는 것 같아서 그런 걱정은 안 한다고 대답했지만, 그들은 되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했다. 설령 남편은 그럴 마음이 없을지 모르지만 여자 쪽에서 먼저 접근해 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면서.




 그것이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할 때는 아무렇지 않지만, 알고 나면 걱정거리인 것들이 있다. 물론 아내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믿지만, 동료들의 얘길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차라리 댄스 말고 남자다운 다른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항변했다. 나는 정말 춤이 재미있어서 다니는 거라고, 설마 댄스 수업에 여자 없이 남자만 30명만 있어도 즐겁게 다녔을 거라고, 수업이 끝나면 씻지도 않고 5분 안에 집에 오는 거 알지 않느냐고. 심지어 나처럼 뚱뚱하고 머리 큰 아저씨를 어떤 아가씨가 관심 있어하겠냐고까지 말했지만, 아내는 그래도 불안한 건 불안한 거라며 버텼다. 결국 언성이 높아져 싸움으로 번졌고, 그날 밤 나는 식식대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봤을땐 100%야. 남친 안되겠네~"


 결국 나는 다음 달 댄스 강좌에 등록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단지 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내의 동료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쉽게 던졌을까. 내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보았을까? 그렇다면 정말 아내를 생각해서 진심 어린 충고를 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이었을까. 혹시 술도 좀 들어간 김에 뭣 좀 아는 척하려고 “OO 씨 잘 몰라? 남자는 이래~” 우쭐대며 가볍게 한 말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밉고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럴 자격이 있는가’ 되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여럿이 모인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면, 나는 마음이 들떠 이런저런 얘기를 여과 없이 하는 편이었다. 연애 고민을 털어놓은 동료나 친구들에게 다 안다는 듯 “마음이 식은 거네~” “야, 남자가 그러는 건 100%야.”하며 사적 의견을 진리인양 떠벌린 적, 나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심코 으스대며 한 말이었겠지만, 듣는 사람은 ‘내가 정말 뭘 잘 모르나?’하며 마음속에 의심과 불안이 싹틀 수도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가볍게 던진 조언에 상대방은 돌아가 남자 친구에게 따지고, 하지 않아도 될 부부싸움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나 역시 자각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언젠가 아내의 동료들을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나의 가벼운 말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알량한 편견과 경험으로 타인의 상황을 재단하기 쉽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아끼고,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태도를 경계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일로 남의 연애나 가정사에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유산, 그 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