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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Jun 03. 2018

출,사표 혹은 출,사표

[Day 3] 직장인, 나

1.

지금 검색창을 켜서(되도록이면 네이버나 구글 말고 다음을 이용해주세요) 이 순간 떠오르는 단어를 하나 입력 후 엔터키를 눌러보세요. 찰나의 시간 후 당신 앞에 보이는 건 어떤 화면인가요?


혹시 ‘프리미엄링크’라는 제목 아래 연노랑색 바탕에 이런 저런 광고문구가 보이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당신 머릿 속에 떠오른 그 단어는 ‘팔리는 단어'입니다.


2.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내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물 다섯 살의 나는 갓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스물 여섯 살의 당신은 세번째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었지요. 나는 당신에게 ‘단어를 파는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일은 ‘검색광고를 파는 일'이라고. 그리고는 당신에게 검색광고가 무엇인지 한참을 설명해야 했지요. 또, 나는 광고주를 직접 만나 광고상품을 파는 영업사원은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광고대행사이기에 영업기획, 교육기획, 상품기획, 사업기획 등 ‘기획'이 붙은 일은 뭐든 해야 하는 그냥 ‘회사원'이라고요. 스물 네 살 12월에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고 바로 다음 날부터 ‘회사’라는 곳에 ‘출근’이라는 걸 해서 ‘온라인 광고’라는 낯선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그냥 회사원.


학부 졸업학기에 들었던 어느 교양수업에서 자기소개를 할 땐 ‘글을 읽고 쓰는 일로 먹고 밥벌이를 하겠다'고 대차게 말했는데, 나는 그냥 단어 한 조각 한 조각을 생선토막처럼 팔아치워 먹고 사는 사람이 되었네요-그렇게 자조하는 내게 당신은 그저 빙긋이 웃어보였지만, 그 후 언젠가의 이메일에서 ‘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라고 나를 다독였죠. 무너지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당신의 그 말이 ‘회사원'으로서 나의 품위를 지켜줬습니다.


한 차례 ‘회사’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 말 덕분에 나는 꼬박 8년 동안 ‘월급’이라는 것을 받아 세금을 내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적금을 붓고, 보험을 들고, 양가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반려견의 사료과 장난감을 사고, 허릿병을 고치고, 가끔은 여행도 하고, 자동차를 바꾸고(면허도 따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밥도 사고, 신세진 분들께는 술도 한 잔 대접하고…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삶이 현격히 바뀌리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마약중독자 같은 월급쟁이’라고 자조해도, 저 시간 속에 후회는 없습니다. (쇼핑 대신 운동을 좀 더 할 걸…하는 정도?)

마음이 몇 번씩 무너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함께 일한 동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무너지게 한 것도 동료들이었지만요)

그리고 내게는 숙제처럼 남은 당신이 해준 ‘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라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나는 숙제 같은 존재일 것이기에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 아직도 노력중인 것을 당신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된지는 이제 꼬박 2년째입니다.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일,이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같은 ‘회사’에서 여전히 ‘월급’을 받는 삶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광고에서 서비스로 업무의 영역이 바뀌었습니다. 백과사전과 책서비스의 콘텐츠를 관리하고, 포털사이트 검색결과에 이 콘텐츠들이 잘 보이게끔 하는 업무입니다.


이 바닥 월급의 원천이 광고가 아닐 수는 없기에 여전히 광고 접점의 어떤 일들을 할 수도 있겠지만, 스무 살 즈음 “글을 읽고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겠지요”라는 막연한 바람 속에서 적어도 한 가지-읽는 일에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고 벅차게 기쁘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정된 날,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모습으로 찾아와 인사해주었던 당신을 위해, 당신이 계시처럼 들려주었던 노래의 가사처럼 ‘그저 슬픈 노래’로 남지 않기 위해, 남은 한 가지-쓰는 일에도 절실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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