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래 Jun 03. 2018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Day 2] 글쓰기의 의미

1.

글쓰기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요.

나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요.

나는 언제까지 글쓰기를 계속할까요.

내가 정말, 쓰는 존재이기는 한가요?


2.

어제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나 포함 세 사람이 점심을 먹었는데 어쩌다 야구 얘기가 나왔어요. 한 사람은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메이저리그 통계에까지 정통할 정도로 야구매니아였어요. 나는 그 중간쯤이고요. 요즘 내가 응원하는 팀이 환골탈태라고 할 정도로 명경기를 펼치고 있어서 야구매니아 님이 알은 체를 하며 먼저 얘기를 꺼내면서 대화가 야구 이야기로 흘러갔어요. 


야알못 님이 내게 ‘무슨 재미로 야구를 보냐'고 물었어요. 현상이나 행태를 딱부러지는 말로 설명하는 데는 젬병이어서 나는 “어… 그게… 보다 보면 피가 끓어요. 한 이닝 한 이닝 지날 때마다 1도씩 높아지는 거 같아요. (이 때 야알못 님이 ‘혈압이 솟는 건 아니고요?’라고 반문해서 우리 모두 잠깐 웃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8회쯤 되면 이깟 공놀이가 뭐라고...싶어서 현타가 와요. 그리고 그런 현타가 오는 순간에도 내 피가 끓고 있다는 게 좀 재밌어요.”라고 횡설수설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야구박사 님이 거들었어요. 항상 조심스럽고 예의바른 분이어서 ‘루나의 말에 조금 덧붙이자면'이라고 시작하는 걸 잊지 않고, 이렇게 말했어요. 


“야구는 승부의 순간의 연속인 것 같아요. 투수와 투수, 투수와 타자, 타자와 야수… 그런 승부의 순간이 이어지면서 루나가 말하는 ‘피가 점점 끓어오르는' 재미를 느끼는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이나 그런 게 뿜어져 나올테니 중독되는 것에나 다름 없겠죠.”


승부의 순간의 연속! 그것이었구나! 


나도, 야알못 님도 야구박사 님의 명쾌한 설명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 연속된 승부의 순간이 우리를 중독의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또 언젠가 직관을 갔다가 뙤약볕 아래서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프로 데뷔 후 첫 경기, 첫 타석에 오른 스무 살의 고졸 신인 타자. 마운드에는 20년의 세월 동안 마치 ‘구도자'처럼 매일 또 매일 공을 던져온 관록의 백전노장이 서 있습니다. 자기 나이만큼의 시간동안 수 천, 수 만 번 던졌을 그 공을 받아쳐야 하는 타자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그 두 사람의 승부는 어떻게 끝이 날까요. 서투른 방망이질 세 번 끝에 허무하게 삼진으로 물러나게 될까요, 아니면 데뷔 첫 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에 새로운 영웅의 이름이 오르게 될까요. 응원하는 팀을 떠나 수 만 개의 눈동자는 그 순간에 초집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 야구 얘기는 그만 할게요. 야구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게다가 당신은 야구 얘기를 싫어했죠.


부산이 고향인 당신. 고등학교 담장 너머가 사직 야구장이어서 매일 같이 들려오는 피가 끓는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귀를 틀어 막았다는 당신.

왜 ‘그깟 공놀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던 당신. 왜 ‘그깟 공놀이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별종 취급 당하는지' 모르겠다던 당신.

그런 당신에게 ‘야구는 승부의 순간의 연속이래요. 그래서 중독되는 거래요.’라고 말해봤자 당신은 ‘저는 승부가 싫습니다. 중독은 더 싫습니다'라고 말할 게 뻔하니까요. 그런 당신이었으니까요.


3. 

야구 얘기를 꺼낸 건,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지, 어떤 마음으로 쓰는지'에 대한 질문에 내가 제대로 답하지 못할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가슴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단어를 찾지 못해 단편적인 단어 몇 개나 툭툭 던지며 비루한 말솜씨나 뽐낼 것이 뻔합니다. 


만약 당신이, 어제 그 점심시간의 야구박사 님처럼 내 곁에 있어줬다면, 당신은 분명 ‘쓰는 존재'에 대해 대변해주었겠지요.


어째서 다른 이의 언어를 읽고, 품고, 탐하는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삶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언어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흠모하는지.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은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하면서도, 그런 오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어째서 항상 머릿 속에는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지을 생각 뿐인 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모르면서도, 계속 까먹으면서도, 그럼에도 숨을 쉬듯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당신은 ‘승부의 순간의 연속''만큼이나 명쾌한 표현으로 나의 마음을 읽어 그대로 읊어줄 것입니다. 식어버린 국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눈만 바라봐도 지나온 수십 년과 다가올 수십 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우리 사이에는 굳이 입술을 떼어 육성으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그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어내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없습니다. 


4.

관념의 세계를 떠나서, 조금 서글플 수 있겠지만, 우리 현실을 이야기해봅니다.


시를 쓰는 법관이 되고 싶다던 당신은, 시인은 되었지만 끝내 법관이 되지는 못했지요.

소설을 짓는 회사원으로 살고 싶다던 나는, 여전히 회사원이기는 하지만 소설가가 될 길은 요원하기만 하네요. 

양쪽 세계 모두에서 허명을 얻고 그 사이에서 우아하게 세 박자의 춤을 추는 우리의 모습. 그것을 포기하지 못해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의 열망을 놓지 못하고 있죠,


당신은 마지막 편지에서 온전히 ‘쓰는 존재'로  사는 것이 이제 당신의 길임을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소설을 짓는 회사원으로 살고 싶어하는 회사원'일 뿐이어서 경계 너머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고 있습니다.


앞서 나는 나의 글은 내 이름값의 부채를 값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읽어주는 사람들의 애정으로 내 부채는 탕감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읽어주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 글에 당신의 부채까지 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저쪽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지 못한다면, 내 글은 마지막 그날까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일기이자 당신에게 보내는 사과편지가 될 것입니다.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늘 그랬듯 안부를 전합니다. 건강과 용기와 약간의 행운을 빕니다.

나의 글은 내 부채에 대한 증명도, 실패와 절망에 대한 기록도 될 수 있겠지만, 허락된다면, ‘쓰는 존재'로서 행복한 우리를 위한 축원문 또한 되기를 기원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이름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