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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Oct 31. 2018

취향의 성장

[Day 4] 요즘의 관심사

1. 

얼마 전 나의 집이 생겼습니다. 엄밀히 말해 소유격 조사 ‘의'는 나보다는 은행 쪽에 붙이는 게 더 맞을 것 같지만 아무튼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우리에게 딱 알맞은 공간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2.

스무 살에 상경해 친척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통학한 세월이 1년.

이후 졸업할 때까지 점점 높아지는 학점 커트라인을 방어하며 4인 1실 기숙사에서 지낸 것이 3년.

취업 후 한 살 터울 후배와 5평짜리 원룸에서 둘이 부대끼고 살았던 게 1년.

후배가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면서 다시 고등학교 동창과 어렵게 구한 투룸 다세대 빌라에서 2년.

그러다 결혼해서 남편도 나도 흙수저니까 또 다세대 빌라에서 7년.

그렇게 집을 떠나온지 15년 만에 다시 ‘내 집'이란 게 생긴 겁니다.


그 사이 내게는 이렇다 할 ‘공간의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게 생길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내 취향'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모조리 버려도 후회 없을 싸구려 가구들, 낡고 촌스러운 침구들, 화장대도 없어서 플라스틱 정리함에 아무렇게나 넣어놓았던 잡동사니들, 그런 것들을 마주하면서 ‘새 집에서 새 출발'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출발선에서 내 공간을 꾸며야 할 차례가 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첫번째 고민은 가구였습니다.


3.

많이 보아야 안목도 늘어난다는데 그럴 시간조차 없어서 결국 나는 가장 쉽고도 안전한 선택을 했습니다. ‘따라하기'. 가장 안목이 좋은 친구에게 제품과 브랜드를 추천받아 친구와 함께 쇼룸에 가서 식탁을 골랐습니다. ‘하드우드' 원목이라서 상판에 별도의 약품처리를 하지 않아 뜨거운 것을 올리거나 물방울 하나라도 떨어지면 그대로 하얗게 나뭇결이 올라오는 까탈스럽게 그지 없는 원목식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식탁을 모시고 사는 것 같아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 집에 먼지 한 톨 떨어지는 것이 싫어 태어나서 최고로 부지런한 요즘을 보내고 있는 주제에 허옇게 얼룩진 식탁을 그냥 보아 넘길 리 없습니다. 집들이 겸 놀러 온 아주버님은 속편하게 유리판을 깔라고 했지만 그건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럴 거면 왁싱처리된 MDF합판 식탁을 샀겠죠. 


찾아보니 식탁을 판매한 업체에서 ‘유지보수 키트'라는 것도 팔고 있었습니다. 원목식탁의 얼룩 위에 얇게 사포질을 하고 깨끗한 면수건에 천연오일을 묻혀 나뭇결 방향 그대로 슥슥 기름을 먹이고 나니, 식탁은 처음 내게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아니, 4인용 식탁 왼쪽 아래 귀퉁이부터 오른쪽 위 귀퉁이까지 그렇게 꼼꼼하게 기름칠을 하고 나니 오히려 첫 모습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 식탁을 살 때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원목 식탁은 관리만 잘 하면 20년도 거뜬히 쓸 수 있을 거라고. 지금 당장 비싼 것 같아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지금 이 글을 쓰다가도 잠시 멈추고 손바닥을 쫙 펼쳐 식탁의 질감을 느껴봅니다. 지금의 질감과, 1년 후, 10년 후, 20년 후의 질감 모두 다르겠지요. 한 해 한 해 내 손길의 정성과 온도로 인해 더 정이 들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글을 쓰는 책상이기도, 신랑이 건담을 조립하는 작업대이기도,우리가 밥을 먹는 식탁이기도.


4.

있어도 좋고 없어도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이지만, 역시 실내에는 생기 넘치는 초록색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에 살던 집은 베란다는 고사하고 거실창도 없어서 식물을 키울래야 키울 수 없었죠. 심지어 나는 ‘식물학살자' ‘그레이핑거'로 유명했으니까요.


이번에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무조건 ‘키우기 쉬운' 식물들을 찾아나섰습니다. 원래 계획은 거실에 뱅갈고무나무를, 침실에 아레카야자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선물로 알로카시아 화분을 깜짝선물로 보내주어서 그 녀석을 거실에 두기로 했습니다. 빛은 얼마나 쬐어야 하는지, 물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줘야 하는지, 잎이 노랗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관리방법을 간단히 적은 플래그도 화분마다 꽂아두었습니다.


제일 큰 화분 두 개를 들이고 나서 조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근처 화원을 발견하곤 거기서 화장실에 둘 공기정화식물 화분 두 개를 더 샀습니다. 검색해보니 싱고니움과 스파티필룸은 음지에서도 잘 크고 암모니아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화장실에서 키우기 적격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많든 적든 잘 자라기 때문에 죽이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파티필룸 모종이 화분보다 더 큰 것 같아서 포기 나누기를 해주려고 하다가 큰뿌리를 잘못 건들었는지 반 포기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남은 반 포기와 싱고니움이 씩씩하게 잘 자라주고 있어서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새벽부터 양재 꽃시장으로 가서 화병에 꽂을 꽃과 향치자화분을 사왔습니다. 향치자는 키우기도 쉬울 뿐 아니라 향이 매우 강해서 거식 한귀퉁이-그 소중한 원목식탁 위-에 두었는데 온거실에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화병에 꽂아놓을 꽃으로는 원래 라넌큘러스를 염두에 두었는데, 라넌큘러스는 겨울에나 나오는 꽃이라 지금 계절에는 볼 수 없다고 해서 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아스틸베'라는 신기하게 생긴 꽃무더기를 데려왔습니다. 무심하게 툭 꽂아두어도 아주 멋스럽습니다. 양재 꽃시장에서는 유칼립투스를 한 팔에 가득 안을 만큼 가져와도 단돈 2,500원이어서 그렇게 데려온 유칼립투스는 아스틸베와 함께 화병에 꽂아두기도 하고, 침실 머리맡에 걸어두기도 하고, 욕실 테이블야자와 함께 두기도 했습니다. 


‘이미 다 큰 꽃과 잎사귀'말고 씨앗부터 키우고 싶어서 무난히 잘 큰다는 오이, 방울토마토, 상추, 시금치, 스윗바질 씨앗을 사다가 조그만 화분에 심어두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나니 대견하게도 모두 싹을 틔워 매일 아침 저녁으로 녀석들의 안위를 보살피는 게 일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향치자, 아스틸베, 유칼립투스



5.

‘공기정화'를 담당하는 실내식물의 유행에 앞서 ‘마음의 정화'를 위해 거실에 커다란 그림을 걸어놓자는 것이 신랑의 희망이었습니다. 예술품의 원본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주머니 사정에는 아직 버거운 일이어서 고전명화에서 모던아트까지 프린트해주는 걸로 유명한 업체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주문했습니다. 둘 다 바닷가 출신이라 그런지 황금빛 햇살이 비치는 바다의 풍경을 마치 ‘창 밖의 풍경'처럼 담은 그림으로 골랐습니다. 가뜩이나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그림을, 가장 큰 사이즈로 선택해 걸어놓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거실에 나오면 마치 고향바다의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합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 물론 카피입니다



6.

다음 차례이자 마지막 미션은 ‘테라스 관리'입니다. 어쩌다보니 아파트인데 인조잔디 마당과 테라스가 붙어 있는 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시공이 조금 잘못되어 있어 한 번 하자보수를 했음에도 배수가 잘 안 되는 불편이 있기는 하지만 전문가를 불러 방수처리를 하고 분위기 있는 어닝을 설치하고 나니 조금 쓸만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여기에 방부목을 대고 데크를 까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집 개 마하도 뛰쳐나가 실컷 우다다를 할 수 있고, 신랑과 나도 큰 맘 먹고 마련한 캠핑의자를 끌고 나가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거나 여름밤 하늘 아래서 맥주를 한 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테라스 한 켠에는 데크를 깔지 않고 베란다 텃밭을 가꿀 계획도 있습니다. 알로카시아, 아레카야자, 향치자, 싱고니움, 스파티필룸 이런 아이들이 실내에서 무럭무럭 자란다면 테라스에서는 측백나무, 커피나무, 무화과나무, 철쭉 이런 것들도 키워볼 수 있을 겁니다. 


자, 그럼 저는 이제 테라스의 너비와 길이를 재러 나가봐야겠습니다.


7.

취향에는 높고 낮음도, 귀하고 하찮음도, 좋고 나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취향은 취향일 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배우고, 경험하고, 부지런을 떨며 가꿔나가는 취향은, 분명 그저 즐길 뿐이었던 이전의 취향과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 또한 성장이라면 성장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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