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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Oct 31. 2018

세 개의 공포

[Day 6] 포비아

1.

나를 진실로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쉬이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순식간에 나를 옥죌 수 있는 약점이 될 테니까요.


2. 

한동안 시간의 유한함이 무서웠습니다. 나도 결국 '물질로써 소모되는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였습니다.


2년 전 건강검진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이삼 분 남짓한 요식행위처럼 치러지는 문진 시간에 의사는 '대체로 건강한 편이고,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에 비해 위가 튼튼한 편이지만 그래도 관리를 좀 하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관리라는 것이 '짜거나 맵게 먹지 않고, 술을 줄이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일찍 자고, 물을 하루에 2리터씩 마시고, 일주일에 3일은 땀이 날 정도로 30분 이상 운동을 하라'는 소리일 것이 뻔해서 심드렁하게 듣고 있는데 의사가 갑자기 내 위내시경 사진을 띄우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작년에 찍은 내시경 사진이고, 이게 올해 찍은 사진이에요. 좀 더 빨갛게 변하긴 했는데 걱정하실 건 없어요. 사람의 몸은 어차피 소모품 같은 거라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이 정도는 누구나 흠집이 납니다."


꽤...신선한 말이었습니다. 그게 나를 위로하려던 말인지 그냥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의사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린 아니었어요.

그 소모품 같은 육체를 돌봐주어야 하는 본인은 무슨 엔지니어쯤 되는 건가?

어쨌든 그놈의 염불처럼 외워되는 '저염, 절주, 정신건강, 규칙적인 수면, 물, 운동' 이런 레퍼토리를 듣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산다 한들 내 수명에 큰 차이가 없을 거란 걸 전문가가 인증해준 셈이니까요. (물론 수명이 아니라 삶의 질에는 영향이 좀 있겠지만)


그 이후로 시간에 따라 '닳아버리는 내 육체의 유한함'이 무서웠습니다. 언젠가 늙고 병들어 지금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것에 막연한 불안을 느꼈습니다. 스물 다섯 살의 육체와 지금의 육체가 확연히 다르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고 나서부턴 한 해 한 해의 컨디션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도 했습니다. 내 기억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내가 나일 수 있는' 알고리즘을 짜서,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기준으로 안드로이드 육체를 만들어서 등등...


세상은 이렇게나 즐거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내 인생은 이렇게나 행복한데 그것이 점점 소멸해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부자들은 이미 영생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그 시도에 성공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그 플랫폼에 올라타볼 수 있을까? 얼마 정도 들까?


이런 한심한 생각은 다른 일로 상담을 받다가 '본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걱정할 필요도 없고 무서워할 일도 아니'라는 조언을 듣고 그 기세가 한풀 꺾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유한함을 무서워 하는 이유는, 시간의 물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3.

어느 월요일. 오전에 정기 리포트를 쓰는데 갑자기 엑셀에서 '틀고정'이 어느 메뉴였는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수천 번도 넘게 클릭 했을 그 버튼을 못 찾아서 2분 정도를 우왕좌왕하며 당황하는데, 갑자기 '헉'하면서 숨이 막히면서 호흡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까닭 모를 공포감이 내 뒤를 엄습하고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어지럼증과 함께 뒷목께부터 등줄기를 타고 허리춤까지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내가 감히 진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공황'이라는 게 이런건가 싶었습니다. 몇 번 서툴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 탕비실로 달려가 찬물을 두어 모금 들이키고서야 겨우 호흡이 제박자를 찾았습니다.


그 순간 나를 정말로 무섭게 했던 건 '엑셀을 할 수 없는 나' 따위가 회사원으로서 어떤 쓸모가 있을까-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회사원이 아닌 나'는 어떤 가치를 갖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조직생활은 영원하지 않으니 언제든 조직 밖에서 일하는 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그렇게나 말해놓고 정작 나도 그 답을 알지 못하고 있던 겁니다. 그 답을 찾을 때까지 나는 벼락 같이 기습해오는 공황을 몇 번이나 맞닥뜨려야 할까요. 답을 찾았다고 한들 그것이 영원한 정답이 될 수 있을까요. 


답을 찾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조차 나를 두렵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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